모든 것은 空, 아무 행동이나 된다? - 공(空)에 대한 오해
기자명 동대신문 입력 2014.05.13 10: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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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판단 상실해 ‘선과 악’ 가리지 못하는 것일 뿐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된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아무 행동이나 해도 된다”는 식의 오해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선도 악도 없다”는 확신 아래서 계나 율을 거리낌 없이 어기는 사람도 있다. 이는 공을 터득한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공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용수보살의 <중론>에서는 이런 사람을 공견(空見)에 빠진 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견해(見解)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어떤 부처님도 그런 자를 교화하지 못하신다.”
공이란 갖가지 생각과 이론에 대한 집착과 고착을 씻어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공의 가르침을 듣고서 다시 공 그 자체에 집착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는 경고다.
구마라습이 한역한 <중론>에서는 이에 대해 주석하면서 “병이 들면 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런 약 때문에 병이 생긴다면 치료할 수 없다”거나 “불이 나면 물로 그 불을 끌 수 있지만, 물에서 불이 나면 그것을 끌 방법이 없다”고 비유한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런 공견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부르며 비판하였다. 악취공이란 ‘공을 잘못 이해함’이라는 의미로 타공(墮空) 또는 낙공(落空)이라고도 한다. 타공이나 낙공은 ‘공에 떨어짐’이란 뜻이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공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공견이다. 공의 가르침은 우리의 인지(認知)를 정화하는 빨래비누와 같다. 옷감에 묻은 더러운 때를 빨래비누를 이용하여 깨끗하게 지울 수 있다.
그런데 빨래가 완전히 끝나려면 때를 빼는 데 사용했던 비눗기도 헹구어내야 한다. 비눗기를 헹구지 않은 옷을 입고 다닐 경우, 때는 없어졌지만 비누 냄새가 펄펄 날 뿐만 아니라 피부도 상한다. 공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다. 공의 조망을 통해서 갖가지 분별을 해체했으면, 공에 대한 분별 역시 내려놔야 한다.
비유한다면 장작을 태울 때 나무토막 하나를 불쏘시개로 사용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것 역시 불속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공의 가르침으로 분별을 타파하지만 그런 공에 대해서 다시 집착하면 또 다른 분별이 될 뿐이다. 공도 역시 공하다(空亦復空). 공으로 수행하지만 궁극에는 공도 버려야 한다.
용수보살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공의 가르침을 소금에 비유한다. 소금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농촌 마을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소금을 쳐서 먹었다. 마을 사람 하나가 그 이유를 묻자 “소금이란 것은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을사람은 “그렇다면 소금 그 자체는 너무나 맛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서 소금 한 움큼을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입안이 헐고 쓰리고 상했다. 그러자 손님에게 따졌다. “어째서 당신은 소금이 맛있다고 했는가?” 손님은 대답했다. “어리석은 사람아! 양을 맞추어 먹어야 맛있지 어찌 소금만 먹는가?”
공의 가르침도 이와 같아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공덕은 전혀 짓지 않고서 공만 체득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견(邪見)으로 선근(善根)만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공이라고 오해한 자, 입으로는 공을 얘기하나 그 행동에는 탐욕과 분노와 교만이 남아있는 자.
<대지도론>에 의하면 이렇게 공을 오해한 자는 현생에는 폐인이 되고, 내생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공은 기사회생의 명약과 같지만 오해할 경우 극약이 되기도 한다.
김성철 교수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동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