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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오래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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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래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지니고 있을까?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간절히 바랄까?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일까?
그 반대의 사람일까?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내세의 희망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삶이 고통뿐이고 행복이 도대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랄 것입니다.
이는 이번 시합에서 패색이 짙은 사람이 이번 시합은 빨리 포기하고
다음 시합이나 이길 것을 희망하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고통뿐인 사람이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 모두가 내세 희망을 바라고 더 간절히 바랄지,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바라고 더 바라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은커녕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인한 내세의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고통이 너무 오래가면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다가 아예 불신케 되고 희망도
꺾이곤 하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 없는 내세가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들 그런 내세를 우리가 희망하겠습니까?
하느님 없는 내세를 우리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한들 왜 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믿음은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비록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특히나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거나 희망을 빨리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과 고통의 어둠을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마치 어둠이 오래되면 어둠 속에서도 보게 되듯 하느님 사랑이 차츰 보일 것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그렇게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내세를 기다릴 겁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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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당신께서 작은 자로 오신 것은 저희를 너무도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늘 작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유로 제가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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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교해 아주 보잘것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이룹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사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 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으로 갈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누룩이 반죽 된 밀가루 덩이를 통째로 발효시키듯,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과 인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익을 찾는 이는 사랑을 갈망하고, 사리사욕을 찾는 마음은 희생 봉사로, 교만은 겸손으로 바뀔 것이고 어둠은 밝음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는 변화의 도구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대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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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 중에 ‘남양 성모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저는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하였던 마리아가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34년 동안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성모님의 성당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한결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저의 친한 동창 신부의 형님이기에 30년 전에 ‘남양 성모 성지’엘 몇 번 갔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빈들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었는데 34년이 지난 지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성모님의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성당에 자리를 잡기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괴로움은 동료 사제들의 몰이해와 오해였을 것입니다.
60이 훌쩍 넘은 신부님은 아직도 청년과 같은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지난 팬데믹 때입니다. 3000곳이 넘는 성모성지 중에서 남양 성모 성지가 교황청에 의해서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남양 성모 성지는 교황님과 함께 팬데믹 종식을 기원하는 ‘묵주기도’ 성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교황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30곳의 성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성모님과 함께하려는 좋은 몫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성모 대성전 아래에 ‘예술원’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예술원에는 공연장, 극장, 식당, 카페, 전시관이 들어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성모 대성전으로 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던 것처럼 신부님은 ‘예술원’이라는 그물을 던지려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성모님의 전구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4번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였습니다. 밀양의 김범우 토마스 하느님의 종이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거제의 윤봉문 요셉 복자가 있는 순교 탑에서 하였습니다. 전주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가족이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베티의 무명 순교자가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모두 산이나 언덕을 오르는 곳에 있었습니다. 남양 성모 성지의 신부님은 기존의 십자가의 길과는 다른 십자가의 길을 ‘꿈’ 꾸었습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던 것처럼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고 그 끝에는 순교자의 무덤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나와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부활을 희망하는 그런 십자가의 길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신부님과 이야기하면서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누룩’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좋은 몫을 ‘선택’했으니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누룩은 부풀어서 맛있는 빵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이 넘쳐나는 신부님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성모님의 사랑으로 신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겨자씨, 희망의 겨자씨, 믿음의 겨자씨’를 키우면 좋겠습니다. ‘청빈의 누룩, 순명의 누룩, 정결의 누룩’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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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늘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심어지고 자라나면 새들이 앉아 쉴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겨자씨가 하늘나라와 닮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리는 곳에 사용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빵을 만들거나 음료가 됩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빵도 발효된 음료도 먹거나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밀가루보다 작은 양이 들어가지만, 그 가치는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이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들려주신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겨자씨와 누룩을 들여다보면 하늘나라는 그 자체로 큰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작디작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심어지고 키워지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를 키워내면 많은 새가 우리가 키워낸 하늘나라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씨앗은 이미 우리 마음과 신앙생활 안에 심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키워내야 합니다. 작은 하늘나라를 큰 나무로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밀가루가 아니라 누룩입니다. 하늘나라는 무엇인가를 더욱 맛깔스레, 더욱 커다랗게 만드는 매개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품고 있다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기쁨은 두 배 혹은 더 크게 변할 것입니다. 사랑 또한 깊고 진한 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그 자체로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을 더 크고 더 깊고 맛깔스레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성경 안에서 주님의 등장을 표현합니다. 이 하늘나라는 움직이며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작지만 큰 나무이고, 우리를 더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늘나라 곧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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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돌
해가 떠오르는 아침
십자가 동산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바닥돌
여기저기 박혀있는 바닥돌 중에
유독 눈에 띤 이유는
반으로 쩍하니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버티기 힘든 무거운 무언가가 지나갔으리라
그래서 버티다 못해 갈라졌으리라
버티느라 참 힘들었겠다....
괜찮다
갈라지면 어떻고 깨지면 어떤가
그 안에 다시 흙을 채우면 된다.
갈라진 것은 갈라진 것으로 둔다.
왜냐하면
우리 천주인들에게 돌의 깨짐은
부활의 상징이고,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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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덜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진정한 목표에서 멀어진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브롤트의 말로, 크게 공감되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 정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펼쳐 보니, 예상처럼 산 정상과 전혀 다른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어차피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하잖아? 가다 보면 다시 정상으로 가겠지.’
두 번째, ‘그냥 산에 가기만 하면 되잖아? 굳이 정상에 가지 못했어도, 이 산은 간 거지.’
이런 마음으로는 산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산 정상이라는 목표를 결정했다면 산 정상만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목표만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이 다쳤습니다. 다친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병원이고 병원만을 바라보고 바쁘게 뛰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요일마다 신학교에 가서 강의합니다. 어느 날 강의하러 가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싫다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강의하러 갔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에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 실천’이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작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때, 목표에 가까워지면서 엄청난 결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점점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면 어떨까요?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과연 소홀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사랑 실천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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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대니얼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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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소원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삽시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평생 쓰는 강론이지만, 제일 힘든 일이 강론쓰는 일입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매일 산을 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강론을 쓰는 일은 살아 있음의 확인이기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산을 넘듯 강론을 쓰려합니다. 때로 생각이 안날 때, 막막할 때 옛 시집을 펼쳐 봅니다. 18년전 2005년도 이때쯤 시가 눈에 띄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렇다
흘러간 것들에 마음
아파해하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쓸쓸해하지 말자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흘러간 사람은
사랑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에, 사랑에, 시간에 충실한 게 제일이다
이게 영원한 현재를, 젊음을 사는 길이다
흐르고 흘러도
늘 새롭게 만나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예수님의 평생 화두가, 평생 희망이자 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삶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꿈의 사랑,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꿈은, 희망은 바로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아니 이미 이런 하느님의 나라 꿈을 앞당겨 살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이런 궁극의 꿈이,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인내심을 지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29일 교황님의 주일 강론중 한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꿈꾸도록(dream)’ 불림을 받았으니 ‘꿈꾸는 교회’ 바로 이게 교회입니다. 모든 이의 종, 가장 미소한 형제자매들의 종인 교회의 꿈입니다. 교회는 결코 좋은 행동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활짝 열린 문들을 지닌 ‘자비의 안식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겨자씨와 누룩의 한쌍의 비유도 하느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임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줍니다. 이 비유자체가 우리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너무 평범하고 자명한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비단 겨자씨만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큰 열매들을 낸 배나무들, 연약한 배추모종이 큰 배추가 되어 먹게 된 일 등, 참 놀라운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놀랍다, 새롭다, 좋다 이게 하느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눈만 열리면 늘 놀랍고 새롭고 좋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배수확이 끝난 “텅빈 충만”의 넉넉하고 편안한 배밭사이 오솔길 산책 역시 하느님 나라의 체험입니다. 만일 흉작이었다면 텅빈 충만이 아닌 “텅빈 허무”의 참 쓸쓸한 배밭의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가을 인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중에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중에 활짝 깨어 관상의 눈, 관상의 귀로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잘 보고 잘 들으며 하느님께 최대한 잘 협조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적변화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누룩이 상징하는바 무궁무진합니다. 부패인생을 하늘 나라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누룩같은 효소들이 바로 희망이요 기쁨이요 감사요 기도요 성령이요 말씀입니다. 희망의 누룩, 기쁨의 누룩, 감사의 누룩, 성령의 누룩, 말씀의 누룩, 기도의 누룩등, 개인은 물로 공동체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하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고 살게 합니다.
성장하는 겨자씨같은 개인이나 공동체, 변화시키는 누룩같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았던 요셉수도원이 이제는 많은 이들이 깃들 수 있는 커다란 나무로 계속 성장중에 있고, 또 알게 모르게 세상의 누룩이 되어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수도원의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말씀의 겨자씨”가 잘 자라게 하시고, “성체의 누룩”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사랑의 겨자 나무”가 되고 “주님 사랑의 누룩”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궁극의 꿈이자 소원은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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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품>
힘들고 지친
벗 하나가
나의 작은 품에
스르르 깃들어
머물고픈 만큼
마냥 머물고
쉬고픈 만큼
맘껏 쉬다가
제 길 찾아 떠난
나의 빈 품에
벗 둘 벗 셋
수많은 벗들이
머물고 쉬다
그렇게 떠나고
이내 또 다시
그렇게 깃드니
자그마한 나의 품은
어느덧 사라지고
나는 어느새
벗들의 온누리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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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9)
겨자씨와 같은 하느님 나라와 믿음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고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면, 믿음이 곧 하느님 나라요 하느님 나라가 곧 믿음인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와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믿어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믿음이 온전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그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를 받았습니다(마태 16,19 참조).
-암브로시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생애
진 앤슬릿 허스타쉬는 엑카르트의 시대에 파리가 차지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에는 교황이 있고. 독일에는 황제가 있지만, 샤를마뉴 대제의 유산인 프랑스에는 이와 다른 지적인 주권이 주어져 있다.” 도미니코회 수도승들은 파리에 둥지를 틀었고, 공식적으로 수도회가 조직되던 그해에 지적인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1217년 9월 이래로, 그들은 파리에서 살았으며. 파리 시 남쪽 끝에 있는 성 자끄 요새 근처에 정착했다. 엑카르트가 살던 소(小) 수도원은 토마스 아퀴나수가 살았고, 이보다 앞서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살았던 곳이다. 당대의 지적인 흐름과 접촉을 유지했던 이 설교자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코 역시 1219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머물렀다. 엑카르트가 살던 시대의 주된 논쟁은 파리 대학에서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인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이의 논쟁이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을 지배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였다. 하지만 12세기에 아벨라르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소개한 이래로, 상당수의 현상 수호자들은 더 세계 내적이고 자연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온건 실재론을 아방가르드, 갑자기 나타난 이론, 신앙에 대한 이성의 위험한 습격이라고 간주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세속주의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지자인 시제 브라방에 맞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앙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신학적인 쟁점올 해결할 만큼 통찰력이 넘치고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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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다른 사람과 비교한 적이 없습니까?
비교하는 것은 판단의 다른 한 형태이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법>을 쓴 댄 그린버그(Dan Greénberg)는 이 책에서 비교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를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독자들에게 만약 자신의 삶을 정말 불행하게 만들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고 말한다. 비교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연습문제도 몇 가지 내준다.
첫 번째 연습문제는 대중매체의 기준으로 이상적인 몸매를 가진 남자와 여자의 전신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체 치수를 재서 사진 속 모델의 치수와 비교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이 책이 약속한 대로 우리는 비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더 비참해질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음 연습문제로 넘어가면, 첫 번째 문제는 단지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체의 이름다움은 비교적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린버그는 뭔가 더 중요한 것, 즉 성취 면에서 우리 자신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가 독자들이 자신과 비교할 수 있도록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몇 사람을 뽑았다면서 가장 먼저 제시한 이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다. 그린버그는 모차르트가 구사할 수 있었던 여러 나라 말과 그가 10대에 이미 내놓은 위대한 작품을 열거한 후 독자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것과 모차르트가 열두 살 나이에 이루어 놓은 업적을 비교 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한다.
이런 연습을통해 스스로 불러온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 마저도 이처럼 비교하는 사고방식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얼마나 강하게 막아 버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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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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