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 이은희
인류가 죽음을 피한 적은 한 번도 없건만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간들, 자연의 냉정한 순환을 본다면
얼마 전, 제가 진행하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미국의 장의사이자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Ask a Mortician) 운영자인 케이틀린 도티가 쓴 책 <고양이로부터 내 시체를 지키는 방법>(이한음 옮김, 사계절 펴냄, 2021)을 소개했습니다. 다소 엽기적인 느낌의 책 제목은, 은유도 비유도 아닌 실제 상황에 대한 더없이 직설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작가가 죽음에 대한 강연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들었던 기상천외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은 직접적입니다.
주검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죽은 뒤에도 근육의 생화학적 반응으로 움찔거릴 수 있고, 장내세균이 생성하는 가스에 의해 소리가 날 수도 있지만 벌떡 일어나서 걸어다니거나 말을 걸어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화장하고 남은 뼈를 보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엔, 그냥 뼈를 보관하기보다는 뼛가루를 가공해 아름다운 장신구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렇게 다소 엽기적이지만 매우 사실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책이었죠. 이 책을 제가 추천한 이유는, 죽음이라는 회피하기 쉬운 주제에 매우 직설적으로 답하는 작가의 태도가 죽음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피상적인 시선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탄생은 삶의 순간, 죽음은 삶의 일부
케이틀린 도티의 책은 그들의 이후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책날개에 ‘죽음의 긍정성 운동을 지지하는 장례지도사’라고 작가 소개가 돼 있습니다. 소개글답게 작가 도티는 죽음에 정말 ‘긍정적’입니다. 죽음에 긍정적이라고 해서 도티가 죽음을 찬미하고 우리 모두 죽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탄생과 성장이 삶의 순간인 것처럼 죽음 역시 삶의 일부로 바라보고 편견 없이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죠.
인류가 태어난 이래 죽음을 피한 적은 단 한 건도 없었지만, 죽음을 그대로 직시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안정적인 국가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피상적이거나 왜곡돼서 받아들여집니다. 한 예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죽음은 매우 차별적입니다. 주인공의 죽음은 장렬하고 숭고하지만, 상대역 엑스트라의 죽음은 하찮거나 대수롭지 않게 그려지거든요. 히어로물 주인공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만, 주인공을 막기 위해 달려든 적들은 너무도 쉽게 쓰러지고 그 죽음마저 뒤이은 수많은 죽음에 가려 곧 화면 밖으로 사라집니다. 슈퍼히어로는 특정한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역설적으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일이 많습니다. 주인공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도티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긍정은, 이렇듯 피상적이고 왜곡되게 그려지는 죽음에 대한 덧칠을 벗겨내고 죽음과 그 뒤에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첫걸음을 도티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내뱉고 심장이 박동을 멈추고 뇌가 활동을 정지한 뒤의 순간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이후의 신체는 인간으로서 그가 누리거나 가진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고, 심지어 자기 몸을 스스로 움직일 권리조차 누릴 수 없습니다. 그 몸은 고스란히 타인 혹은 살아 있는 다른 것에 맡겨집니다. 장의사의 손길 혹은 자연의 분해자에게 말이죠.
주검을 살아 있는 것처럼
도티가 사는 문화권에선 사람이 죽으면 장의사가 주검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단장해 관에 누이면, 가족은 죽은 이를 둘러싸고 특정한 절차에 맞춰 장례식을 치른 뒤 그대로 매장하거나 화장해서 그 재를 땅에 묻습니다. 인간은 모두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아왔으니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자연 순환적 개념에 부합하는 방식이지만, 도티는 이 과정을 실제 행하면서 의문이 듭니다.
장의사의 손길을 거친 주검은 마치 산 채로 긴 잠을 자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는 결코 살아 있을 때와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보이려면 약간의 조작과 변형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요. 죽음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화학적·생물학적 제어 방법을 사라지게 합니다.
죽은 몸은 원래 분비되던 소화효소의 화학작용과 그들의 내장 기관에서 공생하던 장내세균의 생물학적 활성에 따른 합작으로 몸 안쪽부터 녹아내립니다. 그 과정에서 피부는 부패해 검게 변하고 내장 기관은 썩어 불쾌한 냄새를 풍깁니다. 이 과정을 제어하기 위해 장의사는 일단 주검의 정맥을 절개해 피를 빼내고, 동맥에 포름알데히드와 알코올을 섞어 만든 방부액을 주입합니다. 이때 주검의 혈색을 유지하려고 방부액을 붉은색으로 제조하지요. 주검의 피를 모두 방부액으로 교체하면 배 속에 투관침을 찔러넣어 주검 내부에 있는 액체 상태의 물질을 제거하고 역시나 빈 곳에 붉은색 방부액을 채워넣습니다. 몸 내부를 가득 채운 방부액은 주검이 최소한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부패하지 않게 하고 몸이 팽팽하게 유지되도록 돕지만, 이후 땅속에 누인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는 오히려 방해됩니다. 주검을 관에 넣어 땅에 묻는 행위는 몸을 구성하던 물질이 다른 생명체의 몸으로 이동하는 순환 과정을 물리적으로 차단합니다. 이것이 과연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일까요?
자연은 죽은 동물조차 살게 하네
문득 몇 년 전 취재를 위해 한 법의학 연구소의 야외 실험실에 방문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이 연구소는 주검의 사후 변화를 관찰해 범죄 수사에 필요한 법의학 자료를 만드는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원들은 일반적인 성인의 표준 몸무게와 비슷한 크기의 돼지를 다양한 상황(땅 위/땅속/물속 등 다양한 장소와 여름/겨울/장마/건조한 날씨 등 다양한 환경)에 놓아두고 그 사후 변화를 관찰해 기록하고 연구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때는 한낮에 다소 볕이 따갑게 느껴지는 초여름이었고, 이 시기에 풀숲이 우거진 초지 위에 방치된 사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한 지 4주쯤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하얗고 제법 통통했을 돼지는 시커멓게 변해 속이 빈 가죽주머니처럼 쭈그러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낯선 광경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사체에서 풍기는 결코 향기롭다고 할 수 없는 냄새였습니다. 시취(屍臭)가 어찌나 지독한지 눈이 시릴 정도였는데, 연구원은 이곳이 야외인데다 시간이 지나서 냄새가 많이 약해진 상태라고 말해주며 무덤덤하게 사체의 이곳저곳을 들추었습니다. 연구원이 들추는 곳곳에 다양한 벌레가 우글거렸고, 연구원은 조심스레 핀셋으로 애벌레와 고치를 집어 시험관에 넣고 하나하나 레이블링을 했지요.
자연적으로 주검의 분해는 내부 소화효소와 장내세균이 시작하지만,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은 주검에 몰려든 시식성(屍食性) 곤충입니다. 자연계에서 시식성 곤충은 파리류와 딱정벌레류, 송장벌레, 수시렁이, 개미 등 다양한데 사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몰려드는 곤충의 종류가 달라지고, 환경조건에 따라 곤충의 발달 단계와 정도가 달라집니다. 이 점을 이용해 주검에서 발견되는 곤충의 종류와 그것의 월령을 알면 주검의 사망 시간을 역추적할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과 낯선 냄새가 망막과 후각세포에 준 충격이 조금 잦아들자 그제야 주변이 보였습니다.
자연은 생물을 살게 만듭니다. 식물은 동물에게, 동물은 또 다른 동물에게 먹이가 되어 그들의 몸을 만듭니다. 자연은 죽은 생물조차 살게 합니다. 그들이 반쯤 썩어가는 사지를 달고 좀비가 되어 뛰어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동물의 몸을 구성하던 물질을 다시 산 것의 몸으로 이동시키는 거대한 순환 고리를 가졌죠. 죽은 돼지는 곤충과 박테리아의 먹이가 되고 균류와 식물의 양분이 되어 또 다른 생물의 몸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먹이사슬의 사이클에 들어가지 못한 부스러기조차 흙으로 스며들거나 공기 중에 날아가 환경의 일부가 됩니다.
단 하나 분자조차 낭비 않는 자연의 순환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두렵거나 겁나서가 아니라, 일견 냉혹하면서도 조화롭고 단 하나의 분자조차 낭비하지 않게 짜인 순환 시스템이 지나치게 효율적으로 느껴져서입니다. 적어도 생물학적 죽음에는 자원의 순환이라는 기계적 효율성 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 아니며 죽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탄생에 원죄를 지울 수 없다면 죽음에 해결을 미루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한겨레 21>, 제1370호. 등록 : 2021-07-07 16:03 수정 : 2021-07-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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