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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작업하던 차상찬전집이 드디어 나와서 지난 화요일에 처음 펼쳐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올해도 역시 차상찬과 함께 이 봄이 시작되는가 보다 -
이 전집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차상찬의 글들을 모두 찾아 모아서 전집으로 내보자는 생각에 따라 나온 전집 1차분 3권이다. 애초 차상찬기념사업회에서 이 전집을 기획할 때 나는 편집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약간의 의견을 보탰을 뿐, 그저 한문 관련 기록들에나 좀 도우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편집위원회에서 어떻게 일을 하고 누가 작업을 하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작년 초여름 께인가 원문입력 교열과 주해를 부탁한다며 원고들이 내게로 넘겨져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집안의 대사를 연말에 치르고 연초부터 겨우내 전체 분량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며 이 작업에 매달려야 하였다.
사실 이번 1차에는 차상찬이 함께 창간에 관여하고 기자로 뛰었던 잡지 <개벽>에 실린 글들만 추려내 수록하기로 한 것이다. 1, 2권에는 당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팔도답사 보고서인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라는 기획에 따라 차상찬이 집필한 글들을 실었고, 3권은 기자나 작가로서 기고한 나머지 글들이다. 기념사업회를 맡은 강원도민일보에 2일자로 발간 기사가 났었다.
이 전집은 5월경 기념사업회에서 학술대회를 곧 개최하게 되어 그 자리에서 배포가 될 모양이다. 시나 도에서 예산을 주었으므로 애초 출간기념회를 열고 또 작업자들이 간단한 발표를 곁들이자고 하다가 번거롭다고 그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애초 나는 차상찬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으나 국문학 전공자처럼 그리 많은 걸 아는 입장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거치며 애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일제시대의 글을 읽을 때는 많은 생각을 함께 하며 꼼꼼히 따져가며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맞다고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교열하고 주해한 담당자로서 여기에 느낀 점들을 몇 가지 덧붙여 보기로 한다.
내가 차상찬 작업에 미리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었던 것은 사실 그런 난점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던 내가 문학과 거리를 둔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사실 한자나 한문의 독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이 작업을 무난히 해낼 수 있었다고만 할 수 없는 점도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지고 유명한 잡지인 <개벽>의 원문이지만 그것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문학평론을 공부할 때의 경험이 있었다. 그건 80년대 후반 그때까지 금기시되며 묻혀 있던 일제 때의 카프문학론을 해방 후 처음으로 국문학과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당시의 신문잡지들을 뒤지며 골머리를 싸매고 읽어냈던 경험이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누구라면 다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 다수였고 백낙청 선생이나 얼마전 타계하신 김윤식 교수도 응원을 마다하지 않으셨었다. 그 공부의 결과는 임규찬(성공회대)에 의해 방대한 자료집으로 처음 공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쯤이면 이광수나 김유정처럼 유명 문인들 전집은 대부분 다 만들어졌겠거니 싶었다. 각종 사전류도 많이 만들어지고 또 문학사 부분에서도 많이들 연구작업이 이뤄져 있겠거니만 여기고 있었는데, 나의 그런 빗나간 짐작이 탈이 된 셈이었다. 내게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현대문학 전공자는 아예 한문 한자를 잘 모르는 채로 글을 읽는 것 같아 보였다. 글을 읽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그걸 120 내지 150%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50~60%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헌데 <개벽>지의 원문은 더구나 이미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로 원문이 다 인터넷으로 볼 수 있도록 공개돼 있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미 인터넷 상으로도 수없이 복사되어 나돌고 있기도 한 그 원문의 입력이라면 그것은 기실 반 이상이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기엔 수많은 오탈자가 섞여 있어서 적어도 전집본이라면 그런 잘못을 전부 찾아내고 주석을 달아서 원문의 본모습을 알고 읽을 수 있도록 살려내야 하였고, 이번 전집본을 출간한다는 의미도 바로 그 점에 있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그러나 결코 쉽지가 않았다.
<개벽>지란 잡지는 이미 87년 이후 해금이 되면서 영인본으로 2번이나 출간된 적이 있었지만, 결호가 섞여 있는가 하면 인쇄상태에 따라서 판독이 불가한 곳이 부지기수다. 또 압수되고 검열에 대비해 임시호를 발간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판본에 따라서는 인쇄중에 활자가 빠져버린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두세 번씩 다듬어졌다고 하는 작업원고들조차도 수많은 오탈자가 걸러지지 않은 채 나에게로 넘어왔다. 현대문학 전공자는 원텍스트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고 여겨졌다. 다행히 올해 초에는 아단문고(adanmungo.org)에서 원색으로 스캔하여 온라인으로 서비스되는 자료가 알려지게 되었고, 또 옥광산 달아실의 차상찬문고 수장고에 있는 권호들도 참조해볼 수 있도록 배려가 베풀어지는 행운이 뒤따라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호수라도 미진한 곳은 적어도 3~4군데의 비교와 대조가 이뤄지는 확인과정을 거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래와 같이 이 글들은 우선 발표 당시의 원문을 그대로 수록한다는 방침에 따랐으므로 본문에는 원래대로 까다로운 한자들은 물론이고 한시나 한문문장도 다수 섞여 있고, 그래서 이런 원문 상태의 전집을 일반인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판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나 더 아래 사진은 나중 글이므로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책이 나오고 나서 편집위 첫모임이 있었는데, 이런 일반의 접근성 문제를 해결할 안들의 제안도 없지 않았다. 강원도답사기를 풀어서 책으로 내자거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전부 책으로 내보자는 의견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간 원문입력과 교열 및 주해작업이라는 한정된 역할을 위주로 이 일을 해왔지만 전집 편찬에 대해서는 나름의 다른 생각들도 없지 않았다.
우선, 차상찬이 열심히 글을 쓰고 또 그 자신 공부를 하게 된 것이 이 '조선문화의 기본조사'에 기자로서 참여하면서부터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전집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1, 2권을 그 내용으로 배정하였다. 하지만 <개벽>지를 실제로 하나하나 호별로 뒤적여본다면 그런 판단을 내리기조차 쉽지 않음을 대번에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여러 필명으로 글을 쓰거나 아예 필자명이 없는 글이 있고, 대표로 '일기자(一記者)'라고만 밝힌 글도 많다는 것이다. 검열과 또 제한된 기자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집에서는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필자의 글은 모두 싣지 않았다. 그래서 특히 일반인들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질 경기도나 경성 답사의 경우에는 정작 별로 실린 글이 없게 되고 말았다. 다 싣자니 무책임하기도 하거니와 분명히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덩어리 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상찬이라는 개인의 전집이라고 해도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차상찬이라고 밝혀진 글만이 아니라 동료인 박달성이나 김기전 등 다른 사람이 쓴 글들도 함께 보아야만 당시의 전모가 제대로 파악 가능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여튼 차상찬은 조국 땅의 곳곳을 내땅이라 여기며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녔고 새해를 맞는 설을 3번이나 당지에서 청승맞게 보내기까지 하면서 전국을 열심으로 답사하였고, 전하고 싶은 많은 생각을 행간에 숨겨두며 글을 썼다. 그의 답사기를 읽는다는 것은 곧 1920년대의 식민지 조선팔도 곳곳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상찬이 어떤 인물이냐는 생각에는 아직 별 할 말이 없다. 그의 글을 1천 쪽 넘게 보았지만 뭐라고 쉬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자직을 자신감 넘치게 수행한 언론인이자 뛰어난 글쟁이요 재담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홍명희나 최남선처럼 일본유학을 거친 지식인이 아니요, 그보다 선배로서 한학을 바탕으로 동학 내지 천도교를 거쳐서 신지식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가 천도교청년회의 취지에 백분 공감하며 그 활동을 함께 한 것은 사실이나 박달성 혹은 김기전처럼 대놓고 이념적 지향으로 내세우지는 않는 입장이었다. 천도교측의 분기점이 되는 갑진개화운동(1904년) 이후 차상찬도 그 길로 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한학을 지켜나갔던 선배나 스승 세대를 두고 거침없이 '모화주의자'라는 말을 해대기도 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차상찬은 정말 '개벽'의 세계관을 함께 한 것이었으므로 글도 엄청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식민당국과의 마찰을 겪으며 30, 40년대를 지나기까지 우리가 차상찬을 독립운동의 기대감 같은 기준으로 보면 그건 분명 잘못일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다. <개벽>지로 한껏 뽐내던 천도교의 역할도 식민지의 경과와 함께 '개조'에서 '협력'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옴으로써 주목해보면 좋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를 덧붙여 본다.
먼저 '기본조사'의 강원도호(1권 239쪽에서 352쪽)의 내용에 대해서다. 차상찬이 춘천사람인 만큼 강원도를 혼자 답사하며 나름 더 열심히 다니고 아마 더 멋진 글로 소개하고 싶었다는 점은 행간에서도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의 답사 실정은 예상만큼 여의치 못했고, 벼르던 금강산 소개도 뒷날로 미루게 되고 말았다. 나는 여느 다른 도호보다도 강원도호에 열심히 주석을 달았었다. 하지만 최종원고에서는 다른 도호와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주석의 숫자나 분량을 많이 줄여야 하였다. 지금도 500번을 넘는 주석이 달려 있어서 많다는 느낌을 준다지만, 원래 내 초고에는 새로 찾아진 특별한 내용들이 몇 가지 더 있었지만 나중에 책으로 낼 때 넣자는 의견에 따라 그런 자세한 내용들은 죄다 삭제해버렸다. 무용한 노력을 한 셈이 되고 만 꼴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열심히 작업한 뒤의 허망함보다는 거기서 찾아진 내용들을 되도록이면 시민들에게 돌려주어 공유하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남은 과제라면 과제가 될 것 같다.
다음으로 말할 점은 강원도호 중에서도 차상찬 역시 춘천의 상고시대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맥국 문제와 관련해서는 과거의 지지류에서는 언급되지도 않은 말까지 스스로 덧붙여가며 화천 홍천 등을 예전의 맥국 땅이었다고 말해놓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함께 보성고보를 나온 이병도와의 식민사학을 공유해서 그런지, 아니면 일제가 말하던 고대역사를 나름으로 재구성해보려던 생각에서 그런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금도 맥국문제에선 과거의 논리대로 무조건 춘천을 '맥국의 고도'라고 굳게들 믿고 있지만, 우리가 아는 맥국이란 표상에도 이와같이 일제시대를 거치며 부풀려진 측면이 분명 있다는 점도 따져봐야 한다. 일제가 '소시모리론'이란 걸 만들어냈고 그것을 가지고 교과서에까지 실으며 은연중에 춘천이란 도시를 중요시하며 치켜세웠듯이 춘천의 고대사도 맥국문제로 파장을 달리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지만, 차상찬에게서 내가 확인한 점은 그 역시 소시모리론을 따로 써서 반박할 생각을 공표하기까지는 하였지만 글로써 발표한 것은 없고 이처럼 '강원도호'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놓은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춘천과 관련해서는 고향이라서 그런지 명승지나 자라우마을을 자세히도 소개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내가 예전 <춘주지>에 실었던 <춘천의 근대풍경 3제>에서 등선폭포를 소개하며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 언론에 소개되었다고 했던 말들도 이젠 1923년의 이 <개벽>지 42호를 통해서 처음 언론으로 전국에 소개되었다고 고쳐져야 할 것이다. '경천폭'이나 '구곡롱'(구곡폭포)이란 말로 말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주목해서 봐주었으면 하는 부분은 차상찬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전계심비의 석문(釋文)을 이 <개벽>지에 실었다는 점이다. 차상찬은 특히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이능화가 일제 아래 일본화된 기생들에 촛점을 맞추어 '해어화'를 소개한 것에 비하면 차상찬은 그와 달리 우리의 올바른 여성들 역사에 주목한 사람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차상찬은 진주에 논개가 있는 것처럼 춘천에는 전계심이 있다고 전국에 널리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 비문을 보면서 나는 다시 2번이나 거듭하며 비석을 찾아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만져보며 글자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판독하여 읽었다. 그리고 주석 또한 여느 비문보다도 자세히 달면서 기존에 잘 소개되었지만 미흡했던 번역이나 부족한 설명으로 미진하게만 여겨졌던 전계심비의 해석과 전래에 대해서 만족스런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이 점은 별도로 글을 발표할 예정임). 이처럼 명승이나 고적을 답사한 고을마다 선별하여 수록한 것은 당시로선 설사 일제의 기록을 따른 것이라고 해도 독자들에게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세세히 알려주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기록이었고 지금도 그런 만큼 중요시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과거 지지류 속의 기록과 일제가 붙인 이름들이 혼재된 것도 따져가며 살펴볼 점이다. 마치 일제가 붙인 이름이 표준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지금 문화재연구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이참에 반성을 좀 해보면서 말이다.
다음으로는 남조선 지역도 그렇지만 특히 북선지역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아는 바가 적은데, 주석을 다느라 일일이 과거 지지류를 들춰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차상찬이 한문 원문을 인용할 때는 대부분이 원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고쳐서 인용하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차상찬의 그 버릇이 지금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만 당시 잡지기자로서는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리란 가정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누히 말하며 강조하였듯이 한자말은 그것이 바른 글자인지를 확인하려면 원텍스트를 반드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틀린 것을 바로잡으려면 그 근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문 주(注)의 원칙이 그런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도 전국8도의 연관된 군현지들을 거의 다 들춰보게 되었다.
'조선문화의 기본조사'가 중요한 만큼 전집에서 처음의 1, 2권을 차지하였고 그 전체 분량을 숙독하며 교열과 주석을 마쳤다. 3권에도 교열 및 주석자로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3권 중에서 내가 본 글은 많지 않다. 하지만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우선 눈에 띄게 되었던 이 제3권에 있는 판독 불명의 한자 표기를 죄다 찾아보고 판독하여 별도로 '정정표'를 만들어 발표하도록 올렸다는 점만 말해둔다.
이 '기본조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삼일만세를 거치고 나서 문화통치라는 시대인 1920년대 초반의 조선팔도를 발로 누비며 당시의 조선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시 각 시군들의 주민 구성은 어땠고 경제 침탈은 얼마나 당했는지, 식민지 통치가 실제로 어떻게 행해지고 받아들여졌는지를 현실감 나게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그 땅과 변해진 그 땅을 함께 서술함으로써 변화상도 알게 해주었다. 차상찬이 염두에 둔 것은 당시의 최근 과거사, 즉 동학농민혁명과 삼일만세운동이 해당 지역에서는 어떻게 얼마나 있었나 하는 점을 반드시 거론하였다는 점도 돋보인 점이었다. 그 기록이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는 금과옥조처럼 여겨진 것들이 많다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마치 춘천의병이나 원주의 민긍호 대장에 대한 글처럼 말이다.
더구나 명승고적이나 인심과 풍물을 함께 거론함으로써 이를테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구상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도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두고 싶은 점이다. 지금은 모두 10권으로 나와 여전히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온전히 유홍준만의 독창적인 노력은 아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유홍준의 답사기 이상의 가치가 있는 글이라 보인다.
첫댓글 수고많으셨습니ㆍ 감사합니다 정선생님을 늘 뵐수 있어 행복합니다 ㆍ진심으로 전집 출간 축하드립니다
윗글이 전집작업을 한 소회 위주로 작성되어 정작 이번에 전집이 출간되는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 당연시하듯 미뤄둔 감이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시도예산의 지원을 받아서 사업이 추진되는 일 가운데 제일 난감하고 맞추기 어려운 것이 1년단위로 그 기한 내에 결과물을 제출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업 가운데 책으로 결과물을 내는 일은 더욱이나 어렵다는 것이, 작업을 하면서 여러 난관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경우 내용에 따라서는 당장 대중에게 잘 읽히는 것도 있고 공공의 자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출간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 후자의 경우는 지방의 지역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그 가치가
필요로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차상찬전집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김유정의 경우 그 원본 전집이 고 전신재 선생에 의해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우리 문학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전집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차상찬은 언론인이자 문필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지만 이처럼 전집으로 낸 것이 처음이고, 그 과정 또한 지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원본을 찾아내는 일부터 글 자체도 여러 차례 검증을 거쳐서야 텍스트가 확인되기도 하므로 결코 단순히 책을 뒤적여 글로 담아내는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고 바로 대중들 입맛에 맞는 책들이야 누군들 낼 수 없겠으랴마는 이 전집과 같이
춘천의 인물로서 과거 우리나라의 문화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의 글을 묶어서 그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단계의 작업을 거치는 것은 어렵더라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화적 가치를 말하면서 요즈음 인문학의 소용이 많이 거론되지만 전집작업이란 바로 그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의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위에 전집본을 학술대회 시에 배포한다는 말은 주최측에 계획을 재문의한 결과
현재 수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분께는 드리도록 하겠다는......
一宅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며 마음 고생도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상당부분 공감이 됩니다. 편집위원들 중에 이 책의 확장성이나 활용에 대해 깊이 고민한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정해진 기간에 책을 완성한다는 실적에 의미부여를 하고 주관처는 돈벌이로 생각하고...
하지만 이렇게라도 정리를 하고 나면 후학들 중에는 연구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요.
여러가지로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