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빛나도록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티토 1,1-9; 루카 17,1-6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2024.11.11.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의 공통 주제는, ‘제자가 되는 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 짓게 하지 말고, 형제가 죄를 지으면 용서해 주며, 순수한 믿음을 지니되 겸손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제자인 티토에게 신앙에 따른 진리를 삶과 가르침으로 보여주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산다 함은 부활을 사는 것이요, 신앙의 진리를 가르친다 함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의 길은 밤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세상의 무명을 비추어 주는 빛입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바라보자면, 세상의 죄를 없애고 인간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 현실과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서 자유 행사에 주저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에서 존재적 차원의 죄를 겨냥하는 교부들의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그런 근본적인 죄의 현실을 전제하고는 있지만 정작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로서의 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남을 죄 짓게 하는 일”(루카 17,1ㄴ)들은 믿는 이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지요. 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일”(루카 17,2)은 은총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세속화에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으면 신자 공동체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다툼,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미움 등의 행위를 말합니다. 어찌나 예수님께서 크게 경계하셨던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루카 17,2)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이렇듯 엄중한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은 그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있으면 죄를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시며 밀어붙이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겨자씨가 보여주는 작은 크기가 아니라 꽉 차 있는 밀도입니다. 분명히 겨자씨는 다른 식물의 씨앗에 비해 작지만, 그 속이 알차기만 하면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서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커다란 나무로 자라기 때문입니다.(마태 13,31-32 참조) 그러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뜻은 ‘작아 보여도 알찬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아무리 커다란 죄도 아주 작은 그러나 밀도가 확실한 믿음의 실천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캄캄한 어둠도 아주 작은 빛으로 몰아낼 수 있는 이치와도 통합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 하더라도 땅에 심겨진 돌무화과나무를 바다로 옮겨놓을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신 예수님의 장담은 결국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한 작은 사랑의 행동이 지닌 위대한 영적 효과를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인들은 믿는 이들의 나약함을 파고 들어 소소한 죄를 짓게 만들어서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인들이 조장하는 죄의 구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투신을 감행합니다. 이러한 투신에는 막대한 영적 기운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함은 기본이요 천상에 계신 성인들과 지상의 의인들과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 영적인 통공을 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본산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에페소로 옮겨진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시샘하던 유다교의 고발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치명당해야 했었는데, 이 엄혹한 상황에서 먼저 치명한 사도 바오로의 뒤를 이어 초대교회를 이끈 사도들이 티모테오와 티토입니다. 티모테오가 본산인 에페소를 맡았다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넒은 지역을 오가면서 바오로가 건설한 공동체들을 맡았던 사도가 티토입니다.
처음에 티토는 바오로 사도의 비서로 발탁되어 많은 선교여행에 동참하면서(갈라 2,1 이하 참조) 신앙의 가르침을 들었고, 특히 에페소 공동체와 많은 교류가 있었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코린토 공동체를 여러 번 방문하여 사도 바오로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큰 기근이 예루살렘에 닥쳤을 때 모금을 독려하러 가기도 했고(2코린 7,7), 아폴로를 위시한 선교사들이 코린토를 찾아와서 바오로를 비난하는 바람에 분열 사태가 일어났을 때 에페소 돌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가 ‘눈물의 편지’(2코린 10-13장)를 써서 티토에게 전달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티토는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을 설득해서 사도 바오로와도 화해하기를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다시 쓴 ‘화해의 편지’가 2코린 1-9장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티토에 대해서, “내 동지이며 여러분을 위한 나의 협력자이고, 교회들의 대표이며 그리스도의 영광”(2코린 8,23)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니까 티토는 바오로의 제자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크레타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대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을 상대로, 겨자씨 한 알만한 그러나 밀도는 확실한 사랑과 믿음의 실천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또한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마르티노는 4세기 경에 헝가리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군인으로 출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잇는 한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서 덮고 잘 수 있는 이불로 삼으라고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그 외투차림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신비체험 후에 그는 하느님을 알게 되어 세례를 받고 나중에는 사제가 되었으며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착한 목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결과,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귀족이나 입을 수 있었던 값비싼 외투의 절반을 그 추운 겨울 밤에 거지에게 나누어 준 행위는 자신이 받고 있는 은혜가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며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았다는 체험을 인식하는 정신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네 삶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기본사실을 알려주는 전제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우리네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이끌어주는 존재이심을 알아야 인간으로 성숙합니다. 이것이 그저 하느님을 복을 주는 대상으로만 알고 요구하고 기대하는 자세로부터 졸업해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기복적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적 성숙을 지체시키는 장애요소이므로 신앙이 성숙하기를 바라는 평신도들은 유치원 수준의 기복신앙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성숙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신앙인들이 보여주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그가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수준입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성당에 다니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대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청원하는 기도에 얼마나 더 큰 축복으로 응답 받느냐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어렴풋이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복음이 복음사가별로 네 가지 종류나 있다는 정도의 지식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 등 복음사가들이 각기 처한 상황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나름대로 처절한 응답으로 쓰여진 기록임을 모르고 복음선포를 듣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앙생활의 목표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처럼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착하게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사는 평신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는 지식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형편없이 적고 초라한 처지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힘을 주어 권고하듯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평신도들이 성직자나 수도자에 못지않게 동등한 공동책임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교계제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신자이고, 또 수도자는 수도회 안에서 수도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신자인 것처럼, 평신도는 가정 안에서 세상에 나아가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또 증거하는 신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하느님 백성 안에서 또 하느님 앞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는 우열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 마땅히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차별이 생겨나고 있는 이유와 빌미는 바로 평신도들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나 살기 위해서 투신하는 몫과 정도가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 모자란다는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평신도들이 받고 있는 가정의 성화와 세상의 성화라는 그 소명이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서 절대 열등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집착의 상징이요 기복신앙적 흔적인 삶의 외투를 잘라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마르티노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