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회로서의 교회
티토 2,1-14; 루카 17,7-10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4.11.12.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과연 우리네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해 주는 내용입니다. 즉 믿을 교리는 지킬 계명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해서 드리는 흠숭지례를 기본으로 하고, 교회 안에서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간에, 신자라면 갖추고 지켜야 할 기본 처신의 계명에 대해서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던 하느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듯이, 이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보여주는 삶과 활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드러내는 하느님의 성사이셨듯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이게 드러내야 하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신자들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사람들에게 보이게 드러내는 교회의 성사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상의 빛’이며 ‘땅의 소금’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3-14)
지킬 계명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은 대신윤리(對神倫理), 즉 하느님께 대해서 흠숭을 드려야 할 경신례(敬神禮)입니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께 흠숭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오직 무상으로 받은 생명으로 역시 무상으로 주어진 온갖 자연환경과 사회적 여건을 누리면서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나라를 받아들여서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이룩하는 데 힘쓰다가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시작되고 마치게 되어 있는 이 운명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베푼 사랑뿐입니다.
이 경신례에서 드러내야 하는 흠숭의 영성이 모든 대인윤리(對人倫理)의 기본입니다. 신앙인들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흠숭지례(欽崇之禮)에 버금가는 처신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하느님다움, 즉 신성(神性)을 드러내야 하지요. 이것이 ‘대조사회로서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재이유라는 교회관입니다.(로핑크) 세상 사람들의 무명(無明) 즉, 하느님을 모르는 처지에 대해서는 빛을 비추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서는 의롭고 거룩한 행실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빛과 소금의 처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처신의 핵심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분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생애 말에 골고타 언덕에서 짊어지신 나무 십자가만이 아니었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케리그마(Kerygma)에 있어서나,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디다케(Didache)에 있어서나 에누리 없이 다가온 어려움이었습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곡해하려 들다가 끝내 그분을 사람들에게서 떼어내려고 십자가에 달아 못박았고, 고작 열두 명 밖에 되지 않던 제자들은 그토록 자상한 가르침에 대해서 도통 알아듣지 못하고 믿음도 둔해 빠진 낙제생들이어서 속을 썩였습니다. 복음선포 활동에서 주어진 적대적 박해와 제자양성 활동에서 주어진 몰이해의 십자가는 골고타 언덕에서 짊어지셔야 했던 나무 십자가보다 더 가볍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바리사이들이 오해한 대로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가 아니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으로서 부활하셨으며 그러기에 박해자로서 설쳤던 자신의 행보를 벼락과 번개로 가로막으셨음을 알고, 자신의 죄과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티토에게 전하는 사목적 권고는 과거 자신의 행실에 대한 반성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고백성 충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교회의 내부 질서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잔인하게 신자들을 죽이고 있던 야만적인 로마인들의 행태에 비해서 분명히 그리고 날카롭게 대조적인 질서였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빛이요 땅의 소금이 되는 교회 내 대인윤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는 이들은 악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티토 2,12)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으므로”(티토 2,14),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자의식이요, 신앙의 정체성이 이것입니다.
바오로와 베드로 같은 사도들의 이런 확신과 당부가 티토 같은 제2세대 사도들에게로 이어지고 확산되어서, 결국 야만적인 로마의 박해를 이겨내고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한반도의 평화 및 민족의 화해라는 민족의 복음화의 과업은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 받고 있는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의 처신과 가정과 사회에서의 신앙생활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나침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16세기 초와 17세기 초엽에 우크라이나에서 수도자요 주교로서 활약하다가 이교도들의 손에 순교한 요사팟 주교 순교자를 기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대신경으로 신앙으로 고백할 때마다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티토에게 당부하고 있는 내용은 초대 교회에서 사도 직무가 조금씩 제도화되어 가고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반영합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감독은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하거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티토 1,6-9)
이런 훈계는 당시 교회의 신앙풍토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품성을 열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현실에 적용해 보더라도 비단 주교 직무 뿐만 아니라 일반 사제들이나 수도자 내지 평신도들 모두에게 바람직한 신앙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고를 계승하는 뜻으로 오늘날의 주교 복장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색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당신 제자들에게 전해 주시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온 삶을 바치셨습니다. 인격과 삶에 뿌리내린 믿음이 아니고서는 비록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일지언정 온전히 전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래,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 바오로 이래로 겨자씨 한 알만한 크기로라도 믿음이 전수되고 계승되는 전형적인 통로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와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인격과 삶 안에 뿌리내린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여러 가지 위기 징후들은 믿음의 전수 과정에 상당한 흠결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특히 가정이라는 통상적인 신앙 전수의 장이 취약해졌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책이나 교리책을 읽히는 것만으로 전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은 온 교회의 힘이 모여야 할 정도로 집중된 역량을 필요로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아 보여도 밀도는 알찬 순도 100%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유서 깊은 신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공소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교우촌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교우촌은 신자 가정들의 연합 공동체였습니다. 공소 지붕에 걸어놓은 종을 치면 각 가정의 교우들이 아이 어른 할 것없이 함께 모여서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바치고, 성직자가 없어도 공소회장의 주관 아래 공소예절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 친척보다 더한 친교를 나누며 함께 생활을 나누었던 기초 공동체가 교우촌이었습니다.
지난 1990년대 이래 서울을 비롯한 여러 교구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지금껏 벌이고는 있지만, 교우촌의 활력을 계승하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도시화와 핵가족화 현상의 영향도 있고 개인주의화된 신앙의 영향력도 있을 것입니다. 각 본당에서 봉헌되는 새벽 미사와 저녁 미사가 그나마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법적으로 사도들의 계승에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제도화가 진행되어서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만, 신자들 사이에서 믿음이 인격과 삶을 통해 전수되는 일반적 계승과정을 회복시키는 데에 우리 교회의 역량을 모아야 합니다. 가정들의 연합으로서의 신앙 공동체 형성도 시급하고, 각 신자 가정의 성화도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들의 신앙을 함양하고 성숙시키는 일이야말로 신앙 전수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인격과 삶을 통해 믿음이 전수되어 세세대대로 존재해야 하는 믿음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 공동체 또한 수도 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해 진복팔단을 살아가는 사도적 신앙 전수의 표양으로서 평신도 가정을 위한 교회의 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