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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
출애굽기 24:12-1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설날을 맞았다. 일 년에 두 번씩 새해를 맞는 우리 민족은 참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 일단 긴 연휴가 반갑다. 의무감으로라도 부모를 찾아뵙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 식구도 강원도 부모님 댁을 찾아 보려고 한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지만 따듯한 추억의 공간이 있어 다행이다. 여러분의 명절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길 소망한다.
설날의 가장 큰 이벤트는 무엇일까? 단연 세배이다. 누구나 세배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닐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에 와 닿는 축복이다. 만복(萬福), 다복(多福), 지복(至福), 행복(幸福)은 모두가 얻고자 하는 소원이다.
명절은 언제나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시간이다. 어제 안양중앙시장을 갔더니, 그야말로 대목 시장이라, 북새통이다. 대목을 기다리는 상인들이 있고, 모처럼 쉼을 즐기는 일에 매인 사람들이 있다. 평생을 자식을 바라기하며 살아오신 부모들의 기다림은 가장 클 것이다.
우리 어머니 일기에서 명절 끝 심정을 적은 대목이 오래 기억이 남는다.
“들석이다가 빈집이다. 빈집이다. 쓸쓸하다. 서운하다.”(1997.9.17.)
1)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로, 변화(산상변모)주일이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에는 공통된 단어가 하나있는데, 바로 산이다. 성경에서 산은 신성하고, 신비한 곳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출 24:12).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6).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8).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마 17:1).
각 본문은 시대적 배경도, 그 주인공도 다 다르지만 모두 산 위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고, 신비한 환상을 목격한다. 그 음성은 새로운 출발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그 환상은 새로운 시작에 앞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시작에는 의미가 있고, 축복할 만하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다. 그래서 새해를 두 번씩 맞는 우리 민족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산으로 모세를 불러내셔서, 40일을 시내 산 위에 머물도록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12).
모세를 산으로 부르신 까닭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삶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가로질러 마침내 시내 산에 다다랐다.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의 애굽의 도시에서 종살이로 살 때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광야는 열려있는 땅이다. 그러나 위험한 땅이다. 은혜와 사랑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땅이다. 이제 애굽을 탈출하여, 노예 생활을 청산하게 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비전이요, 로드맵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 오르게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12).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시기 위해서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3).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선택 받은 선민으로서 계속 권리와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
자유인이 되는 것, 자유 의지로 사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출애굽 직후 광야에 들어선 초입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해 대들었다. 모세를 비난하고, 불평하였다. 그들은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기보다 예속과 굴종을 더 낫게 여겼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을 욕되게 하였다. 그들의 의식과 마음이 온통 노예근성으로 절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참 자유인으로 사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여전히 불확실하다면 다시 산에 올라야 한다. 그 부르심에 잠잠히 순종해야 한다. 바로 ‘기다림의 시간’이다.
2)
모세가 드디어 산에 올랐다. 백성들은 산 아래에 남겨 두었다. 언제인지 기약은 없으나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아론과 훌이 백성을 지도할 것이다. 따라서 산 아래에서는 모세가 돌아올 때까지 비상 대기 상태였다.
모세도 이래저래 마음이 안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광야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루는 마음일 것이다. 성화하고 보채는 백성들을 두고 온 것도 불안했을 것이다. 사실 모세의 입장에서 앞으로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을 갈 생각을 하면 얼마나 캄캄하겠는가? 그들은 대책 없이 광야로 쏟아져 나왔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스스로 세운 계획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모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구름은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젠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6일이 지났다. 모세는 아무 일도 없이 꼬박 엿새 동안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렸다.
대개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다. 네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산다. 그들은 집집마다 알록달록한 깃발을 하늘 높이 내 거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천에다가 기도와 소망을 적는다. 깃발이 기도이다. 그리고 그 깃발을 지붕 위에 올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세찬 바람이 그들의 기도와 소망을 훑어가면서 하늘에 알려준다고 믿었다.
역시 높은 산에 사는 티벳 사람의 속담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이 없고, 해결 안될 문제라면 걱정을 말라.” 사실 세상에 걱정과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네팔 사람이나, 티벳 사람처럼 산에 사는 사람들의 믿음대로라면 세상에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
아무리 모세라도 산 위에서 기다림은 얼마나 초조한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안내방송도 없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 역시 얼마나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텐 붐은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기다림의 시간’은 너디에나 적용된다.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다.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다. 모세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모세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 준비됨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그 용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준비되지 않다면 사람은 결코 부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준비는 역사를 바꾼다. 준비가 능력(비르투)이라면, 불려 나오는 것은 운명(포르투나)이다.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여러분의 삶을 바꾸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라.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제자들은 그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한 위대한 모세를 보았다.
출애굽의 주역 모세는 영웅적인 행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산 위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뎠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18).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경건한 고독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3)
조선시대 말, 정약용 3형제는 조선시대 천주교를 받아들여 박해를 받은 실학자로 유명하다. 세 사람은 가까운 친척 이벽에게 <천주실의>라는 책을 전달받아, 읽었다. 눈이 환하게 열리는 느낌이었다.
양수리에서 캄캄한 밤에 한강에 배를 띄우고 한양으로 신앙모임에 참여하러 가는 길에 그는 이렇게 속마음을 표현하였다. “캄캄한 하늘에서 은하수를 보는 듯 눈이 번쩍인다.” 캄캄한 하늘은 당시 지배적인 유교를 의미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조선의 절망을 의미한다.
멀리 바라보이는 빛인 은하수는 바로 예수의 복음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대의 선각자는 빛을 발견한다. 정약용이 위대한 인물인 것은 그가 어둠 속에서 아침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빛을 찾았다. 그를 선각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마틴 루터 킹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의 앞길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을 때, 우리는 세상 안에 위대한 축복의 힘,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이 막혀 있을 때에 길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어두운 과거를 밝은 내일로 바꾸어 주시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 위에서 40일 동안 머물렀다. 모세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그는 앞으로 광야 길 40년을 걸어갈 힘을 얻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이라고 불리는 로드맵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다.
시내 산은 광야 40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산에서 머문 40일 밤낮, 모세는 ‘계명과 율법, 예배와 성막’에 대한 모든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이 계명과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었다.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규제가 아니다. 오히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로운 삶을 누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리고 모세는 산을 내려 왔다. 산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없다. 산은 계속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오는 법이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행하였다. 이것이 출애굽의 과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 산 위에서 베드로는 그곳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산 위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신 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본격적인 메시아로서 활동을 전개하신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한다.
성경에서 ‘40일’은 얼마나 의미 있는 기간인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또 부활하신 후에 40일 간 땅 위에 머무셨다. 이 40일은 시험의 기간이고, 연단의 자리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친밀감을 느끼는 은혜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순절은 하나님과 친밀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친밀감을 훈련하는 기회이다. 평소에 반복했던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줄이고, 나쁜 버릇을 끊는 기회로 삼아라. 평소에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고, 평소에 안 해 봤다면 이번 기회에 날을 정해 금식도 하고, 평소 게을렀다면 이번 기회에 나눔을 실천하라.
눈을 들어 그 산에 오르라. 잠잠한 가운데 기다리라. 그 은혜 안에 머무르라.
오늘 나됨은 내가 신실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하며 사는 것은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 손을 내미심으로서, 위로부터 허락하신 사랑 덕분이다.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12).
다가오는 사순절 동안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은총의 시간 안에 늘 머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