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 © 유튜브 말하는동물원 뿌빠TV
사랑을 공개한다: “푸바오야,행복해야 돼”
푸바오는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자이언트 판다의 이름이다. 푸바오는 유명하다. 푸바오를 구경하러 에버랜드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유튜브(뿌빠TV)를 통해 푸바오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푸바오 영상에서 대부분의 경우 푸바오는 인간처럼 묘사된다. 두 사육사는 푸바오에겐 ‘할부지(할아버지),’ 푸바오의 부모에겐 ‘아부지(아버지)’다. 그리고 푸바오 사육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푸바오 에버랜드 관람객들과 푸바오 영상 열혈 시청자들은 일괄로 이모·삼촌으로 통칭된다. 졸지에 푸바오를 중심에 두고 판다 종족과 인간 종족을 아우르는 엄청난 대가족이 형성되었다. 이는 에버랜드와 사육사들이 처음부터 의도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그 콘셉트는 성공적이었다. 매우 많은 사람이 푸바오를 친밀하게 느끼고 자기 가족의 일원인 양 사랑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푸바오 중국 반환(중국의 자이언트 판다 외교정책)에 참견하는 사람들도 출몰했다. 그들은 1~2년 전부터 꾸준히 중국 반환을 반대한다는 생각을 발언하기도 하고, 푸바오 짝짓기 상대로 알려진 젊은 수컷 판다 정보를 캐낸 다음 “이 결혼 반댈세”라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행을 푸바오에 대한 다정한 애정표현으로 간주하며, 푸바오에 대한 사랑을 공적으로 공유하며, 다정다감한 자신에게 만족스러워하며, 나아가 푸바오 사랑이 어슷비슷한 타인들과 집단적 동질감에 젖어 드는 것을 즐겼다.
푸바오 사랑을 만인에게 공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주장한다. “사랑하는 푸바오야, 행복해야 돼.” 하지만 정작 이 사랑을 받아야 할 당사자인 야생동물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에게 이 한국어는 그냥 해독 불가능한 음향일 뿐이다. 문득 ‘우정과 달리 사랑은 공적으로 공개되는 순간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아렌트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사랑의 경우, 사랑받을 당사자보다 공적 공개를 더 중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지도….
사랑을 비교한다: “푸바오의 마음을 나는 아는데 사육사는 모른다”
지난 연말 즈음하여, 푸바오에 대한 사랑을 만천하에 공개해 온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이름으로’ 공격과 비난이 난무하는 현상이 갑자기 일어났다. 2023년 12월 말, 실외 방사장에 있는 푸바오가 내실 안쪽 공간에 모여있는 어머니(아이바오)와 동생(루이바오&후이바오)의 냄새를 맡고 머리로 닫힌 차단문을 들이받으며 울음소리를 내는 한 편의 동영상이 공개되고 난 뒤였다.
사육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 울음소리는 독립생활 완성단계에 들어선 푸바오가 표출한 ‘낯선 판다 냄새에 대한 관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독립생활 야생동물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속성이 그날 자연스럽게 표현된 셈이다. 따라서 강 사육사는 그들 사이에 있는 차단문을 개방하지 않은 채, 낯선 판다 냄새가 아닌 익숙한 사육사의 목소리로 관심을 옮길 수 있도록 푸바오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랜선 이모·삼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고 싶은 푸바오가 차단문이 닫혀있어 못 만나니까 슬퍼서 우는 거 아니냐’, ‘왜 모녀를 못 만나게 하느냐’, ‘왜 가족을 갈라놓느냐’, ‘푸바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아는데 사육사는 모르는 게 틀림없다’, ‘사육사가 틀렸다’라는 의견을 폭풍 치듯 표명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푸바오의 감정에 얼마나 더 깊이, 얼마나 더 크게 공감하는지 역설하였다. 사육사들을 비롯해 에버랜드 측이 자이언트 판다의 개체적 속성, 영역 관리에 관한 야생성을 환기하는 등 부랴부랴 노력을 기울였으나, 의인화 콘셉트에 익숙해져서 오래도록 자기들의 사랑을 공적으로 유지해 온 푸바오 사랑꾼들의 의지를 돌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푸바오라는 사랑받는 동물 당사자보다 ‘공개적 사랑 표현 자체’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혹시 아닐까?
◇ © YT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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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측정한다: “너, T지?”
융(Carl Jung)심리학이론을 독학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두 소설가 모녀가 의기투합하여 제작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꽤 유행 중이다. MBTI는 여덟 가지 성격 지표를 통해 사람들의 성격에 대하여 유형화, 도식화를 추구한다. ABO 혈액형 방식보다 유형의 개수가 많아서 조금 더 정교해 보이지만, 사실상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유형화된 집단에 집어넣어 파악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보면 ABO 방식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MBTI 적용 사례 중 다소 위험스러워 보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T/F에 대한 일상적(?) 대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MBTI 유형 구조에서 T는 사고형(thinkin)을, F는 감정형(feeling)을 가리키는데, MBTI 추종자들 사이에서 “너, T지?”라는 표현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 냉정하고 냉담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거의 대체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심리학 전문가들은 MBTI 유형 구조를 단순화하여 수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T 유형은 공감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을 주로 사용하는 특징을 표상한다고 설명한다(F 유형은 감정적 공감을 주로 사용함). 그러므로 ‘F 유형=다정한 사람, T 유형=냉정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한 개인을 인식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앞서 언급했듯 사랑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에 대해 적잖이 우려했던 아렌트는 심리학에 대해서도 염려하는 편이다. 한 인간의 심리를 당사자 아닌 다른 사람이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의 명백한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이상인 것 같다. 아렌트는, 자기가 자기의 심리(심연)를 아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고백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동의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젯거리입니다(I have become a problem to myself.)”였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를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언제나 100%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무심코 하는 행동, 무심결에 하는 말이란 내 사전에 없다, 그렇게 자부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으리라.
사랑은 감정을 초월한다: “하나님 앞에서 고립된 나와 너이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1920년대 중반에 아렌트가 집필한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이었다. 그 사랑 개념에서 아렌트는 ‘이웃사랑’에 주목하였다. 아렌트에 따르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기독교의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현전 속, 개인의 고립 가운데 발견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환언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 고뇌하며 충실할 때,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생명체 즉 이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이웃사랑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내 감정이 차고 넘쳐서, 내 감정에 휩쓸려서, 내 감정이 약진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솟구쳐 나타나게 된 ‘무엇’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바라야 하는 사랑, 또는 갖춰야 하는 사랑이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렌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이 강조하는 이웃사랑도 당연히 아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타인을 고립된 존재, 독립된 개체로 자각하는 실존적 자기의식 단계를 전제한다. 사랑에 대한 이 같은 현실적으로 다정한 (낭만적으로 다정한 게 아님) 정치적 해석을 머릿속에 담아두고서, 이제 각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자.
솟아오르는 자기감정에 기초해 ‘내 말대로 하면 네가 잘될 거야’라며 내게 손 내미는 사랑이 진정 다정한 사랑일까? 아니면 독립된 개체로 나를 바라봐주고 혹 미숙할지라도, 심지어 다음 순간 고난에 빠질지라도 나의 판단과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랑이 진정 다정한 사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