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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歌客)
황 석 영
1
강 건너편에는 큰 저자가 있었다.
새벽에 잉어의 옆구리 같은 반짝이는 빛조각들을 가르고, 짐을 가득 실은 나룻배들이 강을 거슬러오는 것이었다.
마을의 부옇게 밝아오는 하늘 위로 날개도 없이 구불대며 기어오른 머리카락 모양의 연기들이 흐느적거리며 흩어지는데, 나룻배가 물 위로 흘러가는 것이나 뱃전에서 노질하는 사공이나가 한가지로 서서히 갈라지는 새벽의 회색빛 허공 속에서 차츰차츰 드러나는 게 아닌가. 잠깬 가축들의 응얼거리는 울음이나, 아이들이 부신 눈을 열고 서로 불러대는 소리나, 성문 옆 탑루에서 때리는 동종(銅鍾)소리나, 풀무간의 쇠망치 소리나, 하여간에 새벽마다 이 모든 소리들이 강 건너편에서 들려올 적에는, 심지어 수백년을 묵어온 음산하고 흉흉한 묘지와 성곽에도 생명이 다시 깃들일 것만 같았다.
해가 이슬을 말리고, 사람들의 타박거리는 발길에 때가 하얗게 벗겨진 오불꼬불한 길과 언덕에 먼지를 일굴 무렵이 되면, 나귀와 수레에 진귀한 과물이며 곡식을 실은 농부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고향의 소식들을 전하는 곳이 바로 강 건너편 저자였다.
그러면 또한 강 이쪽 편은 무엇인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는 외눈박이의 쬐끄만 문둥이 거지새끼인, 내가 혼자서 사는 빈 사원(寺院)이 있는 거칠고 막막한 들판이 강 이쪽 편인 것이다. 나는 그 저자에서 얼마 전에 쫓겨나 나룻배에 다시는 오르지 못하도록 엄명을 받고서, 들쥐와 살쾡이와 개구리와 뱀들만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굶주리고 있는 참이다.
나는 날마다 곪아터진 종기와 가시나무에 째진 무릎과 그나마 하나밖에 없는 눈구녕에는 진물이 흘러내려 파리떼가 수없이 날아드는 가엾은 꼬락서니로 강변에 나아가 건너편 저자를 그리워하였다.
저자에서는 밝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히히덕거리는 말의 부서진 쪼가리들이며, 기름진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률의 가락이 물을 건너서 내 코와 귓전에까지 날아와 후벼대곤 했다.
그뿐이랴. 내가 사원의 깨어진 기왓장과 무너진 토담 아래에서 들짐승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질리고 떨려서 잠들지 못하고, 밤새껏 목청이 갈라지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강 건너편 저자는 꿈과 같이 거기에 빛나고 있었으니……밤 저자에서는 여름 꽃발처럼 다투어서 피어난 작고 큰 모닥불과 등롱과 등근 창, 모난 창의 촛불과 나룻배의 종이등 불빛까지 어우러져, 장자(長者)네 청 기와집 안채의 요염한 작은댁들이 휘감고 있는 오색 비단보다 훨씬 현란한 것이었다.
아, 나는 어떻게 되어 이곳으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것은 바로 내게 생명을 주었으며 이 세상의 아름다운 이치를 깨닫게 하였던 수추(壽醜) 때문이었다. 나는 죽어버린 수추가 다시 살아 함께 저 강을 건너 저자의 한가운데 서서 자랑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모든 썩은 것들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
진눈깨비가 몰아치던 어느 이른 봄날 점심 무렵이었을까. 저자에 행인의 발길이 끊어지고, 모두들 불 곁을 찾아 아늑한 지붕 아래 뜨거운 국을 마시러 사라져, 또한 워리 개마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음산한 봄 날씨를 핑계삼은 술꾼들만이 주막 안에서 왈왈 시끌덤벙 다투고 화해하고 웃고 고꾸라지는 판이었는데, 이 가엾은 외눈박이 거지 새끼는 먹을 것을 찾아 진창을 헤매다가 지쳐서 다리 아래 거적조차 없이 맨살을 비벼대며 앉아 있었다.
그맘때쯤에 웬 난데없는 비렁뱅이 가객(歌客) 하나가 구부러진 등에 거문고 엇비슷이 메고 진창에 맨발을 축축 담그면서, 제가 아직 어찌될 줄 모르고서 저자의 가운뎃길로 하염없이 내려왔던 것이다. 거문고를 메었으니 노래라도 할 줄 알겠구나 싶었으되, 꼬락서니가 내 사촌이 틀림없었다. 나는 다리 아래 쪼그리고 앉아 이제 막 살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또랑물 속으로 싸락눈이 떨어져 녹아 사라지는 모양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무슨 소리인가를 들었으며, 이상한 가락이 내 어깨 위에 미풍같이 나부끼며 얹히고, 다시 목덜미로 깊숙이 꽂히더니 정수리에서 발뒤꿈치로 뚫고 들어와 맴돌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직하고 힘찬 목소리가 가락 위에 턱 걸쳐서는 이 싸늘하고 구죽죽한 저자를 따뜻하게 데우는 것만 같았다. 나만 일어섰는가? 아니다. 내가 뒤가 급해진 느낌으로 안달을 온몸에 싣고서 다리 위루 올라갔을 때에, 저자의 술집 창문마다 가게 반지문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둘씩 끄집어내어지는 중이었다. 다리 위에서 비렁뱅이 가객은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서 고개를 푹 숙여 머리가 없는 자처럼 땅속에다 소리를 심고 있었다. 술 먹던 사람들과 수다쟁이 떡장수 아낙네며 나들이 나온 처자들이 모두 한두 발짝씩 모여들어 다리 위에는 음률에 끌린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소리로구나. 저런 소리는 이 저자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 들었다.”
한 곡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제각기 허리춤을 끄르고 돈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잦아질 제 나는 새암과 선망으로 이를 악물었고 다음에는 저 신묘한 소리로 돈을 벌게 하는 거문고를 박살내버리고 싶었다.
“하나 더 해라.”
“이번에는 긴 것을 해보아라.”
사람들이 제각기 아우성을 치는데, 가객은 고개를 가슴팍에 콱 처박고 잠잠히 앉아 있었다. 그는 부지깽이처럼 길고도 여윈 손을 뻗쳐서 무릎 근처에 흩어진 돈들을 긁어모아서는 제자리 밑에다 쓸어넣는 것이었다.
“노래를 한가지 밖에 모르느냐.”
“얼굴을 들고 해라, 안 보인다.”
“고개를 들어라.”
내던진 밑천을 뽑으려고 주변에 웅기중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비렁뱅이 가객의 얼굴을 보려고 자꾸만 재촉했다. 고개를 처박고 있던 그가 작심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모인 사람들을 한바퀴 휘이 둘러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회가 동했을 매처럼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가객은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는데, 가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더러운 얼굴은 더욱 흉하게 일그러져 가락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그 추한 얼굴에 씌워 사그라지고 말았다. 눈도 코도 입도, 제자리에 붙어 있건만, 어쩐지 얼굴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은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증오는 곧 심한 역증이 나게끔 했다. 사람들은 일찍이 노래에 감탄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더럽게 나타난 가객의 용모에 불 같은 증오가 일어나 더 이상 근처에 서 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 소리는 우리가 속아들은 것이다. 이렇게 기분 나쁜 노래는 들은 바 없었다.”
“온 세상에 미움을 퍼뜨리는 가락이다.”
“구역질이 나는 목소리구나.”
누군가가 돌멩이를 집어들고 던졌다. 잔 돌멩이가 큰 돌멩이로, 발치쯤에서 머리쯤으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이 운 나쁜 비렁뱅이를 거의 때려죽일 지경이었다. 나도 빠질세라 돌을 들어서 그의 등때기를 호되게 때려주었다. 돌이 그의 이마를 터뜨리고 살을 찢어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추한 얼굴을 빳빳이 쳐들고 사함들을 노려보았다. 돌팔매가 어지간히 그쳐간 뒤에 이번에는 구경꾼들이 그의 발밑에 떨구었던 돈을 찾아가느라고, 그를 밀쳐내고 아우성을 치면서 자리 밑을 뒤져냈다. 사람들은 완강하게 버티면서 노려보는 가객의 팔다리를 잡아 다리 밑으로 내던져버리고서, 돈을 찾하가지고는 제각기 침을 뱉고 흩어져가버렸다.
“웬 사귀(死鬼) 같은 놈이 나타나서 일진을 잡쳤다.”
“저런 놈은 저자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마도 지옥에서 귀졸이 인도 환생한 모양이다.”
뱀을 징그러워하고, 구더기를 더러워하며, 호랑이를 무서워하며, 꽃을 어여삐 아는 것이 사람의 정이고 보면, 그 낯선 가객을 미워하여 대면조차 하기 싫은 것이 또한 사람들의 똑같은 심정이었으니, 그런 일을 수없이 겪었을 가객 자신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 진창 위에는 행인의 발길이 끊기고 여러 집들의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와, 사람들의 방금 보고 들은 소문을 주고받는 두런대는 말소리, 그리고 갈데없이 다시 차가운 눈발을 피하여 다리 아래로 기어들어가야할 나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저자의 음식찌끼를 맡은 주인으로서 나 같은 신세로 군입을 달고 찾아온 동업자에 대한 거리낌으로, 이제 내 아늑한 보금자리까지 빼앗겨서는 안 될 일이므로, 저 더러운 상판대기의 걸인 풍각쟁이를 쫓아내고야 말리라고 결심을 단단히 했다.
나는 주먹만한 돌멩이 두 개를 양손에 움켜쥐고 만약에 다리 밑을 떠나지 않는다면 대가리를 까서 물속에다 처박겠다는 마음이 되어 아래로 내려갔다. 까짓 이곳 저자 사람들이 모두들 입을 모아 그를 쫓아낼 뜻을 비췄으니, 흘러 떠다니는 주제에 내게 맞아죽는단들 별로 섭섭할 까닭이 없을 듯했다. 그는 어느 틈에 얼굴의˙ 피를 씻고 흘러내려가는 물가에 앉아 있었고, 나는 돌을 쳐들면서 목구멍에 악착스런 바람을 한껏 넣어서 소리쳤다.
“이놈아, 여긴 내 집이다.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네깐 놈을 또랑물 속에다 장사지내어 붕어밥이 되게 할 테야.”
그런데도 그 녀석은 물가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아직도, 내 얼굴이 아니다. 아직도 아직도, 낯설구나.”
이렇게 수없이 중얼거리면서 그는 볼 위로 눈물을 철철철 흘리고 있었는데, 내가 그래봬도 인정 있고 마음 여리기로는 저자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나 남을 도와준 적은 없으므로 문득 사람마다 싫어하는 그가 가엾어져서 슬그머니 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돌이 물 속에 떨어져 풍덩, 하는 소리와 더불어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다보았다. 문둥이인 나보다도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마도 격에 어울리지 않는 그 신묘한 가락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너도 날 미워하니?”
그가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 더럽게 인상 나쁜 몰골을 일부러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하면서 잠깐 대답을 미루었다.
“당신보다 내가 더욱 더러운데, 이제 보니 당신은 저자 사람들하구 똑같다. 그들 어느 누구보다도 못생기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노래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고 나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슬그머니 이 침입자의 곁에 가서 다정한 사이처럼 나란히 앉았다.
“그렇다면 노래를 불러서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말구, 아예 노래를 부르지나 말지. 노래를 부르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당신 얼굴에 주의를 돌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처럼 동냥이나 하면서 살면 되지 않아.”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내 얼굴이 추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의 음률을 완성했던 그 순간부터였다. 그런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그저 문둥이 깨꾸쇠야. 당신은?”
“내 이름은 스스로 지어 수추라고 한다. 너무도 오랫동안 신묘한 가락을 찾아내느라고 이제는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내 본명이 무엇인지, 내 부모는 누구인지, 내 나이는 얼마인지,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내 동네 사람은 어떠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드디어 가락을 찾아내고 내 노래를 완성했다. 그런데…… 완성하자마자 나는 내 얼굴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당신이 얼굴을 쳐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미칠 듯이 죽이고 싶어했지.”
내 말을 듣고 나서 수추는 제 얼굴을 감싸쥐고 부르짖었다.
“내 온몸에는 이제 미움만이 꽉 들어차 있는가보다.”
“나는 이렇게 종기투성이에 얼굴이 찌그러진 문둥이지만 미움 같은 건 없다. 당신과 다리 밑을 반씩 나누어 써도 괜찮다. 다만 당신이 이 저자에서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면.”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점점 수척해지고 쇠약해져서 죽고 만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노래를 부를 테다.”
“그래, 저쪽 강 건너편 사원 빈터에는 사람이 살지 않지.”
“가르쳐줘서 고맙다.”
수추는 돌로 맞은 상처 때문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일어섰다. 처음처럼 거문고를 등뒤에다 엇비슷이 걸쳐메고는 그를 저주했던 저자를 떠나 수추는 강을 건너갔다.
3
수추가 다시 내 다리 밑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은 내가 장터의 구석구석마다 은밀히 싸갈긴 똥이 굳어 먼지가 될 만큼의 날이 지나간 뒤였다. 이제는 나무 위에 드리웠던 자랑스런 오동나무의 잎이 누렇게 변하고 구멍이 뚫려서 한장 두장씩 나부껴내려 물 위에 헤적이며 떠나는 즈음이었다. 나는 수추가 맨손인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는 좀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는 결심인 것이 분명했다. 수추가 그의 거문고를 불태워버렸던 것이고, 그의 이글거리던 눈빛은 사그라들어서 어린 짐승의 눈처럼 양순하게 짖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문 밖에서 타살당한 내 아비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순하고 슬픈 꼬락서니가 되어버렸다. 나는 가을 낮의 따사한 햇볕과 미풍을 즐기면서 종기에다 연신 침을 바르면서 누워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깨꾸쇠야…….”
이 저자 바닥에서 나를 향해 그런 목소리를 낼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는 우라지게도 놀라서 후닥닥 일어났다. 또 짓궂은 놈들이 나를 골탕먹이려고 무슨 수를 쓰러 온 줄로만 알았다. 수추가 발치에 서서 조심조심 나를 흔들고 있었다.
“얘, 나두 여기서 살게 해다우.”
수추는 애원하듯이 말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맛있는 음식을 꺼내놓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추가 강 건너 편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이 내가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수추는 천천히 얘기했다. 그가 말하던 대로 모두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러한 얘기였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완전한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의 세상을 떠나 강을 건너갔다. 강을 건너 자갈밭과 모래언덕을 넘어 드문드문 잔솔들이 자라난 광야를 결어간 수추는 무너진 절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절터의 계단에 앉아서 거문고를 뜯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나직하고 힘차면서 구슬픈 노래가, 음절마다 살아서 뛰는 고기의 꼬리처럼 펄떡이는 생명을 지닌 거문고 소리가 빈 사원에 널리 퍼지고, 널리 퍼진 소리들은 광야 가운데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새들이 일시에 울음을 그쳤고, 맹수들은 포효를 잊었으며, 나무숲들은 가지를 떨도록 바람에 내맡기지 않고서 오히려 바람과 타협하여 숲의 소리마저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 새들이 깃을 찾는 대신에 사원의 돌담과 지봉과 마당 위에 가득히 내려앉아 그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숲 그늘 속에는 조심조심 다가오는 짐승들의 발자취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이윽고 여러 개의 눈알들이 가지 사이로 빛났다. 수추는 제 노래의 가락에 취하여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어둠이 깔리고 밤이 되었으나 그는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시냇물도 흐르는 소리를 죽이면서 그의 노랫가락 아래로 스며 지나가는 듯했다.
해가 떠올랐고, 그는 짐승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가 거문고 위에서 시선을 거두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을 때, 갑자기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그 수백마리 새의 날개치는 소리에 창공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짐승들이 뛰어 달아나는 소리로 나무들은 거칠게 흔들려서 마치 폭풍이 시작되는 듯했다. 수추는 물가에 앉아서 제 그림자보다도 못한 용모의 실상을 비춰보면서 울었다. 한 추악한 사내가 구름을 머리에 이고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추는 생각했다. 그가 제 음률에 도달했을 적에도 시냇가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가락이 그의 손끝에서 울려퍼졌을 순간에 그는 물속에 떠 있는 한 범상한 사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추는 물을 마구 헤쳐놓고는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음률을 완성한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그 얼굴을 미워하였다. 따라서 시냇물도 미워하였다. 미워할수록 그의 얼굴은 추악하게 떠올랐다. 수추는 그럴수록 노래를 끝없이 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추는 강 건너편 광야에서 몇날 몇밤을 짐승들이 일시에 몸서리치면서 달아났다가, 다시 밤이 되면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모여들고, 또 해가 떠오르면 그의 곁에서 달아나는 일을 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는 이러한 애증에 시달려서 자꾸만 여위어갔다.
어느날 그는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훤한 대낮에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가 이제 막 거문고의 가락에 얹히려는 참에 줄이 탁 끊어졌다. 이 끊긴 줄이 내어놓는 무참한 소리가 그의 노래를 산산이 으스러뜨리고 말았으며, 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거문고를 계단 위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자르릉,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악기가 부서지고 그의 노래마저 함께 부서져버렸다. 그의 발밑에는 살해된 가락의 시체만이 즐비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수추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 가운데서 진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을 잤다. 그는 노래로부터 놓여난 것이다. 수추는 파괴된 악기와 버려진 노래를 회상할 뿐이었다. 수추는 이 죽음과 같은 휴식 안에서 비로소 노래만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미워했던 제 모습이 이제는 변화된 것을 알았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시냇물에 구부렸을 적에 수추는 또다른 얼굴을 만났다. 그의 눈은 삶의 경이로움에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입은 웃고 있었고, 뺨에는 땀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모든 산 것들이 그러하듯이 만물의 소멸에 대하여 겸손하였다. 그가 자신을 추악하게 본 것은 그 마음이 자기를 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는 그의 생처럼 절대로 완전함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이 자기를 보고 까닭없이 미워함을 두려워하기 전에, 수추는 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록 다시 살아
야 함을 느꼈다.
그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 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수추는 부서진 악기의 조각들을 주워모아 불을 살랐다. 불꽃이 날름거리면서 남은 형체를 삼키더니 이윽고 사그라지는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바람에 불려 날아가버렸다.
수추는 강을 건너서 저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동냥 그릇을 내밀자 사람들은 그득그득히 음식을 담아주었고, 수추는 뜨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다.
4
나는 이 비렁뱅이 가객이 이제는 미쳐버린 게라고 생각했는데, 다리 밑에 오던 날부터 수추는 괴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짓무른 종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노라면 그는 엎드려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곤 했다. 나는 그가 고름을 빨아주고 상처를 핥는 동안에 잠들었다. 수추는 내가 추워서 떨면서 신음하면 뒤에서 감싸고 체온으로 나를 녹여주었다. 나는 수추와 함께 지내는 동안 줄곧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날마다 나를 다리 밑에 남겨두고 저자로 나가서 일을 했다. 나룻가에서 그가 짐을 부리거나 수레를 끄는 일을 해서 떡과 고기를 사들고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저녁마다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잔치가 있는 집이나 슬픈 일이 일어난 집을 찾아가서 주인께 공손히 청하여 조심스럽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아늑하고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정과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돋아나게 했다. 수추는 제 추했던 얼굴을 이제는 모두 잊었다. 물 위에 떠오른 제 모습이 자기가 아니라던 헛된 생각은 모두 사그라진 것이다.
그의 눈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저를 닮은 사랑스럽고 겸손한 사람들로 비춰졌다. 나아가서는 수추 자신이 그 사람들을 닮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저자에서 예전의 수추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저자 사람들은 아침에 그가 경쾌한 걸음걸이루 가게 앞을 지나는 모습을 대하면 문득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기쁨이 가득 찬다고 말을 했다. 강변 나루터에 가면 언제나 그의 콧노래라든가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고, 그는 짐을 부리면서 내내 저 자신에게 들려나 주듯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곡조를 배워 모두들 따라서 부르게 되었다.
다시 봄이 찾아와 이 강변 저자에 죽은 것들이 소생하고, 새들은 찾아와서 목청을 다투어 울고, 나도 겨우 눈보라와 강추위에서 살아나 빨빨거리며 장터를 헤집고 다닐 철이 되었다.
저자에서 거리잔치가 벌어지는 날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모두 오색 등을 꺼내어 손질을 하고, 음식을 장만했으며 색실과 대나무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행복한 잔치를 대비하느라고 부산한 중에 문득 수추의 노래를 생각해 냈다.
"그렇게 훌륭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 것을 몰랐구나.”
“하나 그에게 악기가 없다는 건 좀 흠이란 말야.”
“그가 노래를 해주면 우리 잔치가 더욱 복될 터인데.”
“악기를 마련해주자. 그의 노래가 더욱 빛나도록.”
이러한 의논들이 되어 장터의 여러 사람들이 다리 아래로 찾아와 악기를 마련해줄 터이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떠들었다. 수추는 여러번이나 사양을 하다가 권유에 못 이기어 드디어 다리 위에 늘어진 오동나무를 가리켜 보였다.
“저 나무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이건 생각보다도 쉬운 청이라고 여러 입으로 말들 하였다. 곧 살집 좋은 일꾼들에 의하여 나무가 베어졌고, 수추는 그날부터 망치와 끌을 들고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불에 그슬리기도 하고, 오줌독에 담그기도 하고, 바람에 말리고, 땡볕에 쬐었다. 여러 날 만에 수추는 전에 그가 등판에 엇비슷이 메고 왔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거문고를 만들었다.
그가 시험삼아 줄을 퉁퉁 퉁겨내니까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져 폭우가 되고 벽력이 치면서 강줄기로 합치고 폭포가 되어 무한히 큰 물의 출렁거리는 소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거리잔치 하는 날, 수추는 그 새로운 악기를 들고 저자의 한가운데로 걸어나갔다. 수추의 노래와 거문고 소리를 들으려고 먼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저자는 도회가 되어버렸다. 아픈 사람들이나 슬픔에 겨운 사람들이 수추의 고통을 씻어주는 노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며칠을 걸어서 저자에 이르렀다.
수추는 사람들의 구름 속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흘려보냈다. 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힘을 솟구치게 해서 살아 있는 환희를 갖도록 했다. 노래하는 그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믿음을 전파시켜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몸짓에서 몸짓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이 목청을 합하여 저자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불렀다.
수추의 거문고 소리와 노랫소리는 저자에 모인 군중들의 제창에 먹히어 들리지 않았으나, 그 곡조와 가락과 춤은 그대로 수추의 것에서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합쳐졌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누군가가 내 더러운 얼굴에 뺨을 비비며 나를 끌어안고 외쳤다.
“복 많이 받아라.”
노래는 자꾸만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이 소문을 알게 된 우리 저자의 장자가 사람들을 보내어 수추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장자가 그를 잡아가두기 전에 물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너를 당장에 놓아주리라.”
“저는 살아 있는 한 노래를 불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은 용서 해주지.”
“저는 제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장자는 하는 수 없어 그를 잡아가두었으며, 악기는 빼앗아버렸다. 그는 빼앗은 악기를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줄을 모두 끊어버렸고, 그것들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 밥상을 만들어버렸다. 그렇지만 수추는 감옥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곡조로 노래를 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재빠르게 저자 바닥으로 퍼져나가 누구나 따라 부르게 되었다.
장자는 이번에는 그자의 혀를 잘라버리라고 명했다. 수추는 혀를 잘리었다. 장자의 부하들이 까마귀들에게 먹이려고 높은 감나무 가지에다 그 혀를 매달아두었다. 나무에 앉는 까마귀마다 수백번씩 그 혀를 쪼았으나 너무도 견고해서 먹질 못했고, 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허공에서 싱싱한 선홍의 빛깔로 펄떡 이며 살아 있었다.
수추는 목구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안으로 꽉 잠긴 노랫소리가 또 저자 바닥에 깊이깊이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몰래몰래 그것을 따라 불러 꿈만이 떠도는 밤에도 잠꼬대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장자는 끝내 수추의 목을 자르라고 명했다: 수추의 목이 잘려 저자의 장대 위에 드높이 효수되었다. 장대 위에 얹힌 얼굴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던 행복한 자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더 수추가 남긴 노래들을 불렀다.
장자는 드디어 수추에 대한 기억의 잔재를 보두 없애버리라고 명했다.
다리는 허물어지고, 오동나무의 밑동은 뽑혀지고, 나는 강 건너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장터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수추의 노래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으니 그가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아직도 수추의 팔딱이는 혓바닥을 품에 지니고서, 새로운 새벽이 밝을 때마다 강변으로 마중을 나가는 것이었다.
〔세대 1975. 9; 가객, 백제 1978〕
2016년 7월 1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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