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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윤차례문화원/화윤차문화협동조합 / 010-2592-5189
 
 
 
카페 게시글
!!누구라도 자유롭게!!~~~ 스크랩 일지암
명전 추천 0 조회 26 07.10.26 16:31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일지암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였으며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 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일지암
 
일지암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연못에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고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 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석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 돌 평상은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 가까이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흥사와의 관계를 맺게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소치 허련(허유)이 이곳에서 초의선사의 그림공부 지도를 받았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 김정희라는 스승을 만나게 된 곳으로 당시 조선후기 일지암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학문과 예술의 활동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곳은 조선말의 대 석학들이라 할 수 있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그리고 초의선사가 교류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대흥사 일지암은 우리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일지암
 
아이콘 초의선사
 
초의선사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강사인 완호윤우(琓虎 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 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지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흥사에 전해온다.

초의선사는 중년이후 큰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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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26 20:20

    첫댓글 어머나!~ 이렇게 좋은 일지암 사진을 올려주시다니! 이곳 차인들을 데리고 차문화유적 답사를 한번 가야지 하면서...그때나 사진을 담아와야겠다고 생각했는 데.. 그맙습니다. 언젠가 반야로 차인들과 일지암 본당에서 일지암 초당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던 기억이 감미롭게 되살아 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차꽃 향이 솔솔 올라오겠군요.

  • 작성자 07.10.26 21:24

    이곳에서 만1년간 불목하니하며 차공부하던 저의 친정집입니다.비와 천둥치면 산이 울던 산울림을 혼자서 감내하며 차가 무엇인지 햇수로 3년을 살다 내려와서 가끔씩 다니러 갑니다.유천물 가져다 차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 07.10.27 07:25

    명전님의 불목하니 시절을 그저 부러운 삶이라 합장으로만 흠모합니다 오래전, 여연스님 처음 일지암 살이 시절 에 발걸음 권하시던 몇분들의 깊은 뜻을 저버리고 외지 만행에 젖었더니~ 이제와서 차의 길을 올곧게 가지 못해 안타까워 찻물 울구기도 손 떨립니다 이국 땅에서도 차생활 그리워하는 이들 있어 이글을 담아갑니다

  • 작성자 07.10.27 09:40

    여연당 큰스님의 자비로 불목하니 하며 3개월간 돌솥에 공양을 지어 들인 것을 가장 기억 남는다고 떠나는날 이놈아 내가 시봉한줄 아느냐고 당신의 자비를 가슴에 담고 내려가라고 하산하는 제자를 걱정하십니다.제자는 스승을 닮아가는 것도 좋으나 자신이 스승인줄 착각하죠.그것 고치는데 힘들었습니다.

  • 07.10.28 21:52

    일지암 사진을 보니 작년에 일지암 다녀온 기억에 새롭습니다, 일지암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도 찍고 옛날의 흔적을 찾아보기라도 할듯 연못을 내려다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앞에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산새에 감탄을 하며 내려가기가 못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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