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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4월 3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선진평화포럼 창립대회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유장훈 기자 |
아래 2003년 6월호 월간조선의 孫鶴圭 당시 경기도 지사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사람이 4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4년 전 孫씨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업적을 변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對北불법송금, 노무현의 對北정책, 특히 '평화적 北核 대책'을 비판했다. 요사이 孫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즉 對北굴종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하고 불법송금 사건에 대한 수사가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관을 이렇게 180도로 바꾸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런 사람을 뽑아준 유권자도 '손학규類의 사람들'이란 평가를 얻을 것이다.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변호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朴正熙 시대 한국의 「지니 계수」(불평등을 측정하는 계수)가 東아시아에서 일본·대만 다음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일방적인 성장 위주, 재벌 특혜의 정책만 한 게 아니라 꾸준히 분배에 노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全斗煥 대통령은 광주학살의 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중화학공업 투자의 후유증을 치유해 지금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전자·조선 등의 기틀을 튼튼히 했어요. 盧泰愚 정부는 그때 이미 개방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시대의 過(과)와 함께 功(공)도 봐야 합니다』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비판
『金泳三 정부는 세계화를 표방했지만, 「세계화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 아니라, 세계화(segyehwa)」라고 정신 없는 소리를 했어요. IMF 외환위기로 세계화가 「글로벌 스탠더드」, 「아메리칸 스탠더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IMF의 요구대로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정치적인 욕심이 너무 커서, 세계화의 큰 길에서 샛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現代가 뒷구멍으로 5억 달러 이상 뭉터기 돈을 북한에 주면서 살아남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닙니까』 ―金大中 정부는 경의선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연결해 한국을 동북아의 물류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지난 5년 내내 경의선 복원만 얘기하다, 결국 아무 성과없이 끝났습니다. 이번에 盧武鉉 정부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 라인을 북한으로 관통시켜 북한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건설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북한 核문제가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이런 프로젝트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장기적인 비전으로는 얘기할 수 있는 일들이죠. 金大中 정부나 盧武鉉 정부나 북한 核문제에 대해 「오직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평화적으로만 하겠다고 떠드는 건 북한 核을 다룰 수 있는 국제적인 역량을 스스로 제한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손발을 스스로 묶는 거예요. 「힘의 균형」, 「힘에 의한 평화」라는 오래 된 분석틀이 북한 核문제를 풀 때도 작동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인물연구] 孫鶴圭 경기도지사의「한국 現代史와의 화해」 (2003년 6월호 월간조선) 『사회를 발전시키는 正義만 正義. 한국을 東北亞의 네덜란드로 만들자』 인구 1000만의 巨大 道政 책임자 ●영국 유학 후 한국 사회의 참모습을 처음 보았고, 충격과 혼돈에 빠졌다. 1980년대 후반 서구 사회의 잘못된 전철을, 악을 쓰면서 답습하겠다는 운동권과 線을 그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자본과 기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경기도에 투자되는 돈을 막아, 다른 지역으로 돌린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은 東北아시아의 네덜란드가 돼야 한다. 영어마을 설립은 그 준비작업의 하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사회적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과학高·외국어高 같은 특수목적고를 대폭 늘리겠다.
●국가지도자의 가장 큰 임무는 우리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민들에게 갈 길을 제시하는 일이다.
●盧武鉉 대통령은 세상 돌아가는 데 대한 감이 없다 孫 鶴 圭
1947년 경기 시흥 출생. 경기高,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大 정치학 박사. 14~16代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2002년 7월 경기도지사(한나라당). 金演光 月刊朝鮮 편집장 (yeonkwang@chosun.com) 茶를 따라 주는 국회의원
孫鶴圭(손학규·55) 경기도지사는 부드럽다. 국회의원 시절 여의도 의원회관 방으로 찾아가면, 茶器(다기)를 펼쳐 놓고 차를 따라 주곤 했다. 잔이 비면 찻 주전자에 든 물을 계속 따라 주었다. 『어때 이렇게 먹으니까 참 맛있지』라며 재미있어 했다. 설악산 신흥사의 會主(회주)인 오현 스님 등 불교계 인사와 친분이 두터운 그는 『스님들하고 만나면 마음이 잘 통한다. 그 분들이 茶道(다도)를 가르쳐 줬다』고 했다. 그는 7년 전부터 불교 조계종에서 시상하는 「萬海大賞(만해대상)」의 심사위원 자리를 맡고 있다. KNCC(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로 사회운동을 펼쳤던 그가 만해대상의 심사위원이 된 것을 보면, 그의 交遊(교유)에 경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孫鶴圭 의원은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정치부 기자들의 투표에 의해 「가장 신사적인 국회의원」으로 선정돼 2000년과 2001년 연이어 백봉 羅容均 선생을 기리는 「백봉 신사상」을 받았다. 2001년에는 제2정무장관실(여성부의 전신)과 여성신문사가 수여하는 「평등 부부상」을 받았다. 까탈스러운 기자들에게, 가장 혹독한 관찰자인 아내에게서 꽤 괜찮은 남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은 셈이다. 그 부드러움 때문에 정치인 孫鶴圭가 싫다는 사람도 가끔 있다. 『1993년 경기 광명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金泳三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로 승승장구했지, 무슨 투지를 보여 주었느냐』는 얘기들이었다. 전형적인 경기高 모범생 냄새가 난다는 얘기도 들어 봤다. 孫지사가 1965년 서울大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朴正熙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15년간 걸어간 길을 보면, 그가 결코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韓日회담 반대 데모로 시작된 서울大 문리대 시절 그는 시위로 투옥됐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소설가 黃晳暎(황석영)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구로공단에 뛰어들었고, 탄광·철공소·목공장 등에서 일하면서 수배와 도주를 반복했다. 1973년부터 청계천 빈민가에서 朴炯圭(박형규·現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동 이사장) 목사 등과 손잡고 기독교 사회운동을 벌였다. 청계천에서 활동 중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朴正熙 체제의 종식과 함께 그는 사회운동에서 손을 떼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직업 혁명가로서 대한민국 체제의 변혁을 꿈꾸던 그는 영국에 유학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화해했다. 1980년대 후반 主思派(주사파)가 횡행하던 운동권과 스스로 선을 그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정계에 뛰어들었다. 지난 5월13일 화요일 오후 4시 수원 경기도청 인근의 도지사 관저에 도착하자, 낡은 티셔츠 차림의 孫지사가 기자 일행을 맞았다. 『사진 촬영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다. 인터뷰 자리에는 경기도 공보관인 車明進(차명진·43)씨가 배석했다. 車씨는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공보보좌역으로 오랫동안 일했고, 李후보를 도와 지난 大選을 치렀다. 그가 지난 3월 경기도 공보관에 임명되자 일요신문 등 몇몇 주간지에서 『孫鶴圭 지사가 홍보 전문가인 차명진씨를 영입해 5년 후의 大選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孫지사는 『정말 그런 얘기가 있었느냐?』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옛날 얘기를 하나 했다. 직업 혁명가를 꿈꾼 15년 『대학 2학년 때 데모를 하다가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어요. 그때 같이 수감된 대학의 선배 하나가 제게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앞으로 2년 후에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를 10년쯤 하다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그리고 대통령에 출마하겠다」 그때 「아, 이렇게 인생을 계획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뭔가」 하고 자책을 했어요. 그런데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질 않더라구요. 내가 국회의원이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금부터 이런 저런 준비를 하겠다, 그게 되겠어요?』 시위 얘기가 나와서인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그의 학생운동 시절로 이어졌다. ―대학 2학년 때 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고 강원도 함백의 탄광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탄광으로 간 계기가 있습니까. 『무기 정학은 기한이 없으니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지도를 펴놓고 탄광지대가 어딘가 찾다가 함백으로 무작정 찾아갔어요. 「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산비탈에서 貨車(화차)를 휙 돌려 쏟는 일인데 잘못하면 사람까지 같이 돌아가요』 ―시위에 단순히 참여한 것 하고, 「基層(기층) 민중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대학 2학년 때부터 「앞으로 직업 혁명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까.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어요. 韓日회담 반대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3학년이 되고서는 직업이 학생 운동가가 됐어요. 학교 시험을 우습게 알았고, 고시 보는 친구들, ROTC 하는 친구들을 의식이 없다고 비웃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직업 혁명가를 꿈꾸는 생활을 계속 한 거죠』 ―그런데 탄광 일은 왜 그만 뒀나요. 『한 달쯤 일하다가 우연히 신문을 봤는데 내 무기정학이 해제됐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때는 그런 것도 신문기사에 났어요. 그러고 보니 참 옛날 얘기다. 학교에 가니 다른 애들은 정학이 풀렸는데, 나는 연거푸 맞은 두 개의 무기정학 중에 하나만 풀렸다고 해요. 한 학기 쉬었어요』 ―체제에 불만을 품고 在野(재야) 反정부 투쟁에 뛰어들어 1970年代가 끝날 때까지 일로매진했지요. 혹시 자랄 때 집안이 어려웠습니까.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어머니도 교편을 잡으셨어요.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4남3녀를 데리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큰누나와 큰형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왔어요. 큰형은 나중에 대학을 나왔어요. 큰 재산은 없었지만, 시흥에 논밭이 조금 있어서,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애국해라」, 「어려운 사람들을 동정해라」 이런 訓育(훈육)을 많이 받았어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金芝河(시인), 金道鉉(前 문화체육부 차관), 玄勝一(한나라당 국회의원), 金正男(前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같은 문리대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의식화된 거죠. 저는 순진한 아이가 이데올로기적인 학생 운동권에 엉뚱하게 接木(접목)된 케이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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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4월 3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선진평화포럼 창립대회에 참석해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유장훈 기자 | 「또박이」기질 때문에 학생운동 리더 돼 孫지사는 『경상도 출신이 장악한 문리대 운동권에서는 경기高 출신들은 잘 받아 주지도 않았다』며 『매사를 또박또박 처리하는 「또박이」 기질 때문에 결국 서울大 학생운동의 리더가 됐다』고 했다. 『韓日협정 반대 시위를 할 때 빠짐없이 참석했어요. 맨 앞줄에서 플래카드를 들든지, 유인물을 돌렸어요. 단식농성을 할 때 다른 애들은 슬쩍슬쩍 나가서 뭘 먹고 와요. 그러면서 「단식은 다 먹고 하는 거야. 우리가 몸을 버리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게 아니라, 저항을 하기 위해 단식한다」고 아주 어른스러운 얘기를 해요. 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단식하면 사나흘 꼬박 굶고, 단식 끝내고 데모하러 나가서 붙잡혀 가서 또 두들겨 맞고…』 그는 문리대 학생운동의 주축이었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멤버들이 구속되고 연구회가 해체되자, 「후진국 문제연구회」를 만들어 이 단체를 주도했다.
「민족문제 연구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민족이라는 말이 스탈린주의式 개념이라고 해서, 후진국 문제연구회로 개명했다고 한다. 후진국 문제연구회는 1980년대까지 맥이 이어지는 서울대학교 중요 이념 서클의 하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反美, 사회주의라고 봐야죠. 『그렇죠. 그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미국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였으니까. 反日 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로 돌았어요. 거기에 反매판, 反재벌이 더해졌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초년병들의 필독서가 김성두의 「재벌과 빈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였어요』 ―당시 운동권이 毛澤東(모택동)의 중국과 胡志明(호지명)의 월맹에 상당히 경도됐었죠. 『196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左翼 역사책,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교본으로 했습니다. 「세계사 교정」, 「조선사 교정」, 「조선사회 사상사」를 읽었어요.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구체적인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큰 모순과 작은 모순이 있는데, 작은 모순은 보류해 두고 큰 모순을 주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毛의 논리에 매혹됐어요』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학생운동하다가 감옥에 갔다왔는데 입대에 지장이 없었습니까. 『네, 3학년 끝나고 영장이 나와서 곧 바로 입대했어요. 학생운동 출신 중에 일부 친구들은 「군대가는 건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이다. 거길 왜 가느냐」고 했어요. 관념적으로는 직업 혁명가를 꿈꾸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원칙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35개월을 特泊(특박) 한 번 안 나오고 사병으로 복무했어요. 제대하는 날 오전에 제대복 입고 근무하고, 중대장·선임하사 하고 점심 먹고 나왔어요』 ―어디서 근무했습니까. 『전반부는 포천, 후반부는 파주에서 했어요』
黃晳暎과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 그는 『3년간 사병으로 軍 복무한 게 인생에 큰 보탬이 됐다』고 했다. 『경기高·서울大 나온 사람들이 마음속에 삐뚤어진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경우가 많아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고참이고, 장교·하사관 중에 저보다 어린 사람이 많았어요. 그 중에는 내가 승복할 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서 배우고, 사람에게 겸허해지는 경험은 군대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겁니다』 1972년 4월에 제대하고 복학한 그는 1971년 張琪杓(장기표), 金槿泰(김근태), 李信範(이신범) 등이 연루된 「서울大생 내란음모 사건」을 피해 갈 수 있었다. 1972년 10월 「10월 維新」이 선포됐지만, 그는 다음해 봄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사회혁명의 길로 나선다」는 각오 아래 구로공단으로 뛰어들었다. 『소설 쓰는 黃晳暎씨와 의기투합해서 둘이서 구로공단에 조그마한 자취방을 얻어 놓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요. 그때는 기업체들이 「중학 졸업」 학력을 요구했어요. 경기중학 졸업 증명서를 가지고 취업이 되겠어요? 黃晳暎씨는 명문인 경복중학에 들어갔지만, 퇴학 맞고 제적당하고 해서 중·고등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어요. 그래서 취직이 쉽게 됐어요. 黃晳暎씨가 「너는 형편없는 학교를 나와서 취직도 못한다」고 놀렸어요. 그래서 국졸 학력만 요구하는 목공장에 취직했어요. 몇 달 다녔는데 그 회사 간부가 제 동창이었어요. 維新 후라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어요. 다른 직장을 찾겠다고 구로공단에서 뒹굴었죠』 그 무렵 그는 朴炯圭 목사를 만난다. 朴목사는 『노동운동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빈민선교』라면서 孫鶴圭를 기독교 사회운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는 權晧景(권호경·前 기독교 방송 사장), 金東完(김동완·現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 공동대표) 전도사와 함께 청계천의 판자촌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들어갔다. 1973년부터 1970년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기독교 사회운동에 매달렸다. 朴炯圭 목사가 그에게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나,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다. 『목사들이 女工(여공)들을 교육시키고, 조직화하고, 그 험악한 시절에 노동조합도 없는데 파업을 유도하고, 동시에 여공들이 주체적인 삶에 눈 뜨게 하는 일을 했어요. 全泰壹(전태일)의 죽음이 기독교를 일깨우고, 기독교는 진보적인 「혁명의 신학」, 「희망의 신학」으로 선회했어요. 목사들의 활동을 보면서, 기독교가 민주화 인권운동의 우산 역할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운동의 실체고 동력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나는 운동권 친구들로부터는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지금은 도움을 받지만 기독교는 결국 우리의 적이다」고 비판을 받았고 일부 목사들로부터는 「孫鶴圭는 기독교에 침투한 불순세력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어요』 1974년 4월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의 극형 대상자 명단에서 빠졌다. 1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서 그해 3월5일 결혼했기 때문에 모의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哲(이철), 柳寅泰(유인태)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공소장에는 「孫鶴圭의 결혼식장에서 민청학련 결성을 모의했다」는 혐의 사실이 빠짐없이 게재돼 있다. 制世그룹 李彰雨의 철공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해 孫지사는 1975년부터 2년간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했다. 『정부에서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어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회」를 잡으려고 金觀錫(김관석), 朴炯圭, 權晧景(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시켰어요. 총무인 내가 모든 장부와 서류를 갖고 있으니까, 내 검거에 2계급 특진을 내걸었어요. 내가 반공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지, 목사도 아니지, 뭔가 크게 사건을 만들 수 있다고 보고 달려 든 거예요. 나중에는 결국 기독교계와 정부가 협상을 벌여 유야무야됐어요. 나는 2년간 숨어 살면서 철공소에서 일을 했어요』 ―어디에 있는 철공소입니까.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철공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했어요. 나중에 制世그룹을 세운 李彰雨(이창우) 선배의 철공소였어요. 이 양반이 서울大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어요. 간이 배 밖에 나왔는지 나를 가명으로 일하게 했어요』 ―용접기술을 정식으로 배웠습니까. 『「시다」 하다가 간단한 용접 정도를 했고, 정교한 건 못했어요. 1년 좀 넘게 했어요. 그 전에 반년쯤 강원도 원주의 과수원에서 일했어요』 그는 검거를 피해 다니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못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孫지사는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4~ 5개월 전에 암으로 입원 중인 병원에 돈을 3만원 가지고 몰래 찾아갔어요.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놈아, 우리 집안 다 망하게 하려고 하느냐. 빨리 가라」고 하세요. 우리 형들이 나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날 위협을 당하고 엄청나게 고생을 했거든요. 제가 3만원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이게 무슨 돈이냐. 이거 빨갱이 돈 아니냐」고 해요. 그런데 그 돈은 그날 아침 어머니가 막내 며느리인 제 아내에게 주신 돈이었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공산당의 사주로 나쁜 길에 빠졌다고 믿으셨을 거예요. 그렇게 탄압을 받으니까 더 극렬하게 저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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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19일 탈당과 제3세력 형성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백범 기념관에 들어서고 있다. ©유장훈 기자 |
維新시절 이뤄진 수많은 시국사건과 시위에 그는 간여했다 趙英來(조영래)가 쓴 「全泰壹 평전」, 金芝河의 양심선언을 옥중에서 빼내 일본으로 내보내 출판했고, 구속자가족협의회를 만들고, 東亞鬪委(동아투위)의 투쟁을 지원했다. 그는 10·26을 부산 인근에 있는 보안부대 취조실에서 맞았다. 『釜馬(부마)사태가 일어나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내려갔어요. 보안사에서 이틀간 나를 추적하다가 끌고 갔어요. 釜馬사태를 민청학련 사건처럼 만들려고 달려 들었어요. 중앙정보부 對共수사단장이 수사팀을 이끌고 내려왔어요. 보안사 들어가서 이틀 동안 不問曲直(불문곡직)하고 매를 맞았어요. 그러고 신문을 시작했는데 하루 만에 끝났어요. 사흘쯤 더 지나서 朴正熙 대통령이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보안사에서 아무 일 없이 풀려 났나요.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니까. 중앙정보부의 對共 수사관들이 황급하게 다 돌아갔어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가 없어진 거죠. 朴대통령이 안 죽었으면 내가 釜馬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이리저리 얽혀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당했을 거예요』 영국에서 한국이 제대로 보였다 孫지사는 1980년 4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때였다. 주위에서 『우리가 기를 펴고 살 세상이 왔는데 어디를 나가느냐』고 말렸다고 한다. 서울을 떠난 직후 「서울의 봄」에 서리를 내린 5·17 사태가 발생했다. ―서울의 봄이 와서 외국으로 도망갔던 인사들도 들어오려는 판에 왜 외국으로 나갔습니까. 『내가 1970년대를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金芝河의 담시 「五賊(오적)」이 제 세계관이었었어요. 기성 정치인, 관료, 기업인, 기자들을 다 경멸했죠. 하지만 「당장의 현실에 매몰돼서는 길게 이 사회를 이끌고 갈 비전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절박했어요. 사회변혁, 사회변혁 외쳤는데 내가 제대로 이 사회를 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한 1년쯤 머리를 정리하고 오자는 생각이었어요』 ―왜 하필 영국입니까. 『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제대로 공부하려고 영국에 갔어요. 장학금은 영국의 크리스천 에이드에서 지원받았습니다』 ―反체제 운동의 선봉에 섰는데 출국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신원조회 통과가 안 돼요. 1979년 중반에 서류를 냈는데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1980년 4월쯤 중앙정보부 종교 팀에서 「다 됐는데 대공수사국에서 막는다」고 통보를 했어요. 친구가 보안사령부의 검찰관으로 있었는데, 이 친구가 힘을 써주고 해서 겨우 신원조회가 나왔어요. 서울의 봄이니까 가능했던 일이죠』 ―영국을 갔다 온 후 孫지사는 1970년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영국에서 충격과 혼돈에 빠졌습니다. 나는 성장의 그늘 속에서 한국을 봤어요.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부정의 대상이었어요. 「외형적인 경제 성장이 조금 있더라도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 소외됐다」, 「북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얘기는 모두 거짓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洗腦(세뇌)했어요. 한국에서 「북한이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영국의 더 타임스에 金日成을 우상화하는 전면 광고를 싣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그동안 朴正熙 정권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는데 영국의 더 타임스에 그런 광고가 난 걸 직접 보니 기가 막혀요. 그런 데다 내가 理想국가로 생각했던 중국의 유학생들이 다가와서 「한국이 엄청난 발전을 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을 거는 겁니다』 「사회발전을 수반하는 正義만 正義다」 ―코페르니쿠스的인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그렇게 확 변한 건 아니고, 슬슬 변했어요. 처음에는 내 생각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유학생들과 많이 싸웠어요. 영국·미국 학생들과 「市場(시장)은 불평등만 초래한다. 국가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며 엄청나게 논쟁을 했어요. 저쪽이 맞다고 생각되는데도 억지를 쓰고. 나는 正義를 분배와 산술적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추구했어요. 공부하면서 「正義는 사회발전을 수반할 때만 正義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했어요』 ―1970년대의 反정부 투쟁을 반성한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내가 갈 길은 다르다고 방향을 잡은 거죠. 평등에 대한 욕구가 한국 사회 발전의 큰 동력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在野의 거센 도전이 있었으니까 朴正熙 대통령이 일방적인 통치를 못하고, 사회 불만세력을 달래는 정책을 폈던 겁니다. 노동조합을 어용으로 순치시킬지언정 근로기준법을 만들고, 의료보험을 도입했어요』 ―孫지사는 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장(1986년 2월~1987년 4월)으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후 잠시 영국에 돌아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 在野 운동권에 합류하지 않은 것도 세계관의 변화 때문인가요. 『한국에 들어왔을 때 金槿泰 의원이 내게 민청련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지금까지의 운동방식과 노선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7~8년 영국생활을 하면서 옛 운동의 노선을 유지하고, 더 깊이 들어가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現場에서 본 英國病 ―1980년대 후반에 진행된 현실 사회주의 붕괴도 영향이 있었겠죠. 『그 훨씬 이전에 내 마음속에 世界化(세계화) 마인드랄까 그런 게 생겼어요 . 1980년代에 영국 사회가 「영국병」을 앓았습니다. 사회주의의 병폐, 복지정책의 끝을 본 거죠. 동료 학생 하나가 박사 과정으로 진급할 예정이었는데 「장학금을 안 줘서 공부 안 한다」고 해요. 놀면서 실업수당을 받겠다는 거예요. 그게 1980년대의 영국 사회였어요. 사회주의 방식의 제도나 사고를 가지고 우리 사회가 왔다면 지금의 수준의 발전이 있었겠나, 생각이 들더군요. 1980년대 말의 한국 운동권은 서구 사회의 잘못된 전철을, 악을 쓰면서 踏襲(답습)하겠다고 목청을 높였어요. 「민족해방 노선이다, 계급투쟁 노선이다」하며 논쟁을 하고 있었어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거죠』 ―영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항로 수정없이 더 외골수로 나아갔겠군요. 『내 친구들보다 내가 더 민족 자주·평등이라는 점에서는 과격하게 갔을 거예요』 영국에서의 공부와 체험을 통해 孫지사는 한국의 역사와 화해했다. 朴正熙·全斗煥·盧泰愚 정권에 대한 그의 평가에는 溫氣(온기)가 느껴진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朴正熙 시대 한국의 「지니 계수」(불평등을 측정하는 계수)가 東아시아에서 일본·대만 다음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일방적인 성장 위주, 재벌 특혜의 정책만 한 게 아니라 꾸준히 분배에 노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全斗煥 대통령은 광주학살의 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중화학공업 투자의 후유증을 치유해 지금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전자·조선 등의 기틀을 튼튼히 했어요. 盧泰愚 정부는 그때 이미 개방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시대의 過(과)와 함께 功(공)도 봐야 합니다』 孫지사는 지난 2월16일 존 우드 美 제 2사단장 부부와 미군 장병 300명을 의정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초청했다. 한겨레 신문(2월18일자)은 「논란빚는 孫鶴圭 지사의 행보」라는 칼럼으로 미군 장병들을 위로한 孫지사를 공격했다. 美 2사단 장병 300명 초청 위로 ─미군 초청 행사를 한 이유가 있습니까. 『韓美관계가 계속 악화되고, 주한미군 철수와 재배치 문제가 미국 쪽에서 흘러 나왔어요. 기업하는 분들은 「외국인 투자가 주춤하고, 상담하려던 사람들이 일정을 취소한다」고 얘기를 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마침 후배 김민기가 의정부에서 공연을 하고 있어서, 美 2사단 장병들을 초대했죠』 ―미군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외출도 못하고 있다가, 경기지사의 초청을 받아 공연 구경을 왔으니 기분이 좋았죠. 다들 군복 정장차림으로 왔어요. 공연 마치고 식사를 즐겁게 했고. 장교들은 「주한미군 기지를 한국 경찰이 지켜 주는 상황이 착잡하다」고 했어요. 한국인들이 反美주의로 뭉치고, 미국을 매몰차게 대하고 있다는 데 대해 미국 일반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더군요』 ―한때 투철한 反美주의자였던 孫지사가 反美를 외치는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겠습니다. 『1970년대 사회운동할 때 자주적인 통일국가,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 꿨어요. 反外勢(반외세)·자주·사회주의로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느냐, 안 됩니다. 북한을 보세요. 북한이 말로는 자주를 표방하지만, 외국의 식량원조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거지국가가 됐잖아요. 한국 기업인을 한 사람 끌어들일 때마다 얼마씩 돈을 뜯고 있어요.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우호관계 없이는 한국은 생존을 못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孫지사가 지난 4월1일 직원조회 때 「盧武鉉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 동의안 처리에 방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강한 톤으로 얘기를 해서 듣던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盧武鉉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 결정을 설명하면서, 「명분은 없지만 국익을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어요. 그런 얘기는 국가 지도자로서 할 수 없는 얘기예요. 명분이 없는 일을 국가가 어떻게 합니까.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동맹관계와 국가이익을 모두 고려해서 하는 겁니다. 盧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 양심과 국가의 명분을 혼동하고 있어요. 盧대통령이 國益을 뒤로 제쳐 놓고 인기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국익을 진정으로 추구하려면 결정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지고 감당을 해야 합니다』 ―경기도가 지난 4월21일에 100여 명 규모의 이라크 난민 지원 의료단을 파견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가 국제 지원에 나섰다는 건 좀 생소하게 들립니다. 『정부의 對이라크 민간지원이 파병 문제로 얽혀서 자꾸 늦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경기도라도 민간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자고 생각했어요. 파병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와는 관계없는 일이잖아요. 인도적인 국제의료활동을 해 온 「글로벌 케어(global care)」, 경기도의 의사회와 약사회, 적십자사가 힘을 합쳤습니다』 ―경기도에서는 얼마나 예산을 지원했습니까. 『10억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韓美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冷戰(냉전) 의식에 젖은 사람, 好戰(호전)주의자,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의식 없는 사람」으로 몰리게 됩니다. 金大中 정부가 이런 분위기를 조장했고, 盧武鉉 정부가 그걸 이어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元老들이 『방송들이 앞장서서 反美 분위기를 선동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분위기가 돌이키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시대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통해 역사가 발전하기도 하죠. 그러나 아직 精製(정제)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사고와 감성을 시대의 중심적인 흐름이라고 부추기고, 거기에 올라타려는 움직임이 문제예요. 現 정권의 포퓰리즘이 너무 강합니다』 DJ는 세계화의 큰 길에서 샛길로 빠졌다 孫지사는 취임 후 경기도의 道政(도정) 목표를 「세계 속의 경기도」로 정했다. 「세계화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도지사를 맡으면서 더욱 확실해졌다고 한다. 경기도는 2002년 말 현재 수출액이 319억 달러로 서울(258억 달러)보다 많았다. 인구는 지난해 말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경기도에는 전국 중소기업의 28%에 해당하는 2만7000여 개가 몰려 있고, 반도체 등 첨단산업과 지식기반 제조업체의 34%, 종사자의 38%가 있다. 『지난 연말 중국 遼寧省(요녕성)과 廣東省(광동성)을 방문했습니다. 무서워요.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블랙 홀처럼 세계의 자본과 기술을 마구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역대 정부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그의 평가 『金泳三 정부는 세계화를 표방했지만, 「세계화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 아니라, 세계화(segyehwa)」라고 정신 없는 소리를 했어요. IMF 외환위기로 세계화가 「글로벌 스탠더드」, 「아메리칸 스탠더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IMF의 요구대로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정치적인 욕심이 너무 커서, 세계화의 큰 길에서 샛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現代가 뒷구멍으로 5억 달러 이상 뭉터기 돈을 북한에 주면서 살아남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닙니까』 ―盧武鉉 정부의 세계화 마인드는 어떤 것 같습니까. 『盧武鉉 대통령은 도무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감이 없는 것 같아요. 세계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대한민국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예요. 그런데 이 정권 핵심들은 세계화와 맞서는 언행을 보이고 있어요. 혼자 살 수 있다는 환상과 망상 때문에 북한이 망했어요. 세계질서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 있고, 그걸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없이 자주와 민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관념적인 善(선), 관념적인 도덕만 가지고는 번영은커녕 생존을 할 수가 없어요』 ―盧武鉉 대통령은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大選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걸 국정과제의 최우선 순위로 내세웠지 않습니까. 『지난 2월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통령직 인수委가 주관하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을 위한 국정보고대회」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盧武鉉 당시 당선자가 「우리는 여태까지 변방에서 살았다. 이제 세계의 중심을 이뤄야 한다」는 요지로 얘기를 했어요. 「아 이 양반이 뭘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의 중심국가, 얼마나 좋은 얘기예요. 하지만 그건 詩人(시인)이 쓸 용어예요. 결국 중국이 눈치를 주니까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표현을 못 쓰고, 「동북아 경제중심」으로 용어를 바꿨잖아요. 말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核을 평화적으로만 해결하겠다는 건 손발을 스스로 묶는 것 ―金大中 정부는 경의선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연결해 한국을 동북아의 물류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지난 5년 내내 경의선 복원만 얘기하다, 결국 아무 성과없이 끝났습니다. 이번에 盧武鉉 정부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 라인을 북한으로 관통시켜 북한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건설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북한 核문제가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이런 프로젝트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장기적인 비전으로는 얘기할 수 있는 일들이죠. 金大中 정부나 盧武鉉 정부나 북한 核문제에 대해 「오직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평화적으로만 하겠다고 떠드는 건 북한 核을 다룰 수 있는 국제적인 역량을 스스로 제한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손발을 스스로 묶는 거예요. 「힘의 균형」, 「힘에 의한 평화」라는 오래 된 분석틀이 북한 核문제를 풀 때도 작동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공장 총량제는 철폐해야 한다』 ―孫지사와 LG 필립스 LCD 사이에 지난 2월4일 「파주에 50만 평 규모의 생산라인을 건설한다」는 양해각서가 체결됐습니다. 2004년 말까지 산업단지를 조성해 주기로 했는데 부지 확보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LG 필립스가 100억 달러(12조원)를 투입하는 대규모 투자입니다. 새 정부에서도 협조를 잘 해주고 있습니다. 수도권 공장 총량제로 공장 신설 증설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LG 필립스는 예외적으로 허용된 겁니다. 이런 예외적인 조치도 올 연말이면 끝납니다. 이런 유사한 외국인 투자가 있더라도 이제는 말도 못 꺼내는 거죠』 ―LG 필립스 LCD 공장의 고용효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직원이 4000명쯤 되고, 부품 공급업체까지 감안하면 엄청나죠』 ―수도권 공장 총량제에 대해 경기도 기업인들의 불만이 많죠. 『수도권의 대기업 공장 설립을 막는 근거가 「수도권 정비계획법」과 「공업배치법」입니다. IMF 경제위기 때문에 첨단산업 분야의 외국인 투자에 관해 한시적으로 공장 설립을 허용했고, 이게 금년 연말에 시한이 만료되는 거예요. 기존 공장들은 增築(증축)을 못 합니다. 우리나라 대외 수출의 주력산업인 삼성반도체가 공업배치법 때문에 공장 증설을 못하고 있어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는 마당에 텐트를 쳐놓고 자재를 쌓아 놓고 있습니다. 창고를 지으려고 해도 공장 총량제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수도권에 집중되는 투자를 지방공단 등으로 유치해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게 수도권 정비계획법의 기본 정신 아닙니까. 『수도권에 투자하는 걸 막으면 그 기업들이 지방으로 가느냐, 가지 않아요. 아예 중국으로 가버립니다. 재작년에 조립 장난감 회사인 레고社가 경기도 이천에 2억 달러를 투자하려고 하다가, 수도권 규제 때문에 못 했어요. 결국 레고社는 독일로 가버렸어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孫지사는 수도권 공장 총량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입장입니까. 『경쟁력이 있는 회사는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도록 규제를 풀어 주고, 그 대신 세금을 많이 거둬서 지방을 도와줘야 합니다. 목포의 대불공단이 만들어진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30%밖에 입주가 안 됐습니다. 수도권의 경쟁력 있는 산업체를 인위적으로 누르는 공장 총량제는 철폐해야 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 다른 지역에서 경기도의 지역 이기주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삼성·LG·SK 같은 그룹은 국내 생산능력보다 중국에 설립한 공장의 생산능력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 본부를 설치한 기업도 있고, 본사를 아예 중국으로 옮길 걸 검토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경기도에 들어오는 돈을 막아서 다른 道로 돌려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겠습니까. 세계에서 경쟁의 기본 단위가 大도시권입니다. 중국을 보면, 上海圈(상해권), 北京圈(북경권), 珠江三角洲圈(주강삼각주권), 重慶圈(중경권)으로 나뉘고, 그게 인구로 보면 3000만 명 내지 4000만 명 규모입니다. 上海圈에 全세계 500大 기업 가운데 300개가 들어와 있습니다. 삼성과 LG가 지방으로 안 간다고 공장 증설을 안 해 줘요. 삼성전자가 기흥의 핵심공장을 증설해야 하는데 공장 총량제 때문에 증설을 못 해요. 그렇게 막으면 증설분만 떼다가 다른지방에 짓나요?』 수도권을 못 떠나는 이유 ―수도권 정비계획법 폐지를 위한 대체 입법안을 낼 계획입니까. 『어떻게 정부와 정치권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건가 고민 중이에요. 자꾸 亂開發(난개발)을 얘기하는데 중앙 정부가 서울의 집값 안정이라는 정책목표만 달성하려다 보니, 부작용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정책만 따라가다가 경기도도 망하고, 그것 때문에 수도권의 생활환경이 더 악화됐습니다. 종합적인 계획이 새로 마련돼야 합니다. 공장 총량제 같은 제한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기업들이 왜 그렇게 서울과 수도권을 떠나려고 하질 않는 겁니까. 『한국에서 무얼 하려면 인천공항과의 연결 편이성, 對중국 진출의 용이성이 제일 중요한 요인입니다. 釜山은 환적 물류기지로서 허브 역할을 하고, 光陽이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나 비즈니스가 부산·광양으로 갈 수는 없어요』 ―교육과 문화 환경도 무시 못할 요소겠죠. 『그렇죠. 첨단산업은 고급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고급인력 기술자들이 서울을 떠나려고 하질 않아요. 「팬텍 큐리텔」이라는 휴대폰 회사는 금년 매출목표가 3조 원 규모로 휴대폰 제조분야에서 세계 10위를 예상하는 기업입니다. 사원이 3500명인데 이 가운데 1200명이 연구인력입니다. 공장이 하나는 김포, 하나는 이천에 있어요. 그런데 500명이 일하는 연구소 하나는 여의도에, 700명이 일하는 연구소 하나는 양재동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공장이 있는 이천·김포로 끌고 갈 수가 없어요. 영종도 매립은 옆에 있는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워서 될지 몰라도, 경제발전을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어요. 경쟁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그것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죠』 ―국가경쟁력을 提高하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교육이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문에 봤더니 「孫鶴圭 지사가 판교 신도시에 자립형 사립고를 신설하려는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자립형 사립고 설립에 반대하십니까. 『「판교에 자립형 사립고는 아직 검토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면담하러 온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발표를 해 버렸어요. 자립형 사립고는 말 그대로 사립학교가 하는 건데 지방정부가 어떻게 막습니까. 저는 교육문제도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면 답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선진국은 우수한 학생들을 사회적 자산으로 관리합니다. 평준화의 틀을 손대지 못하더라도 과학고등학교와 외국어 고등학교를 대폭 늘려서 아이들의 秀越性(수월성)을 촉진해야 합니다』
막내딸의 원망 ―孫지사의 두 딸은 한국에서 공부를 했습니까. 『대학 교수 할 때 서울 방배동에 살았어요. 여자고등학교 학군이 대한민국에서 제일이라는 지역입니다. 큰애는 거기서 대학에 갔고 막내딸은 光明시에서 출마하느라 광명으로 전학시켰습니다. 욕심이야 막내딸을 방배동에 두고 싶었지만, 지역 유권자들이 「광명의 교육여건을 개선시키겠다면서, 당신 딸은 왜 서울 학교에 보내느냐」고 할 것 아닙니까. 막내딸한테 원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영어마을」 조성도 교육의 질과 연관이 있습니까.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 변호사를 영어마을 조성사업의 책임자로 영입하셨더군요. 『한국의 생존전략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 경공업 중심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국민을 먹여 살렸고, 그후 중화학 공업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어요. 이제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기존 산업을 더 高부가가치화하고,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건 기본이에요.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얘기되는 게 물류 허브, 비즈니스 허브의 구축입니다.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네덜란드로 만들자는 겁니다.
중국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를 어떻게 요리할 것이냐? 중국 경제의 발전에서 우리가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느냐?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이에요. 그 핵심은 영어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자유롭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자는 겁니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됐습니까. 『지금은 사이버 영어마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접속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번 여름방학 때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 캠프를 할 계획입니다. 2005년 말까지 500억원을 투자해 영어문화원을 세울 거고, 경기도에 있는 대학들의 기존시설도 활용하려고 합니다. 영어마을은 경기도가 시작했지만, 전국적으로 파급효과가 생기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영어마을을 함께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경기도의 시·군 단위에서는 관내의 原語民(원어민) 영어교사를 네트워크로 엮고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성장전략 ―IMF 사태가 터지기 전에 「너트 크래커(호두까기)」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첨단기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급 기술과 싼 임금을 동력으로 한 중국의 추적 사이에 끼인, 호두까기 속의 호두라는 얘기였습니다. 한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지금까지 많은 흑자를 봤지만, 비교우위를 점하는 분야가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중국 成都(성도)에 가서 싱가포르 자본이 투자한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한 공장에 회사 간판이 두 개예요. 외국 투자기업에게 3년 동안 면세해 주고, 그 다음 2년 동안 50%를 감면해 준다고 합니다. 투자한 지 3년이 지나서 면세 혜택을 받으려고 법인 등록을 새롭게 했다는 거예요. 市에서 그걸 알고도 묵인을 해준다고 합니다. 세금을 못 받더라도 고용을 창출하고, 부대 수익이 있으니까 용인하는 거예요. 중국이 이렇게 투자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에요』 긴 인터뷰를 끝내고, 지사 공관 근처의 한 수원 갈비집에서 孫지사, 車明進 경기도 공보관과 함게 늦은 저녁을 했다. 반주로는 백세주가 나왔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인 孫지사의 부인 李潤英(이윤영·56)씨는 孫지사가 대학교수가 되기 전까지 약국을 운영하며, 수입이 전혀 없는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이 사실을 빗대 車공보관이 『孫지사가 오랫동안 「마등」생활을 했다. 사모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孫지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자, 孫지사는 『마등이 뭐야』라고 물었다. 『마누라 등치기』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박장대소했다. 그는 車공보관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냅킨에 옮겨 적으면서 『가서 이 얘기를 해주면 집사람이 오늘 늦게 들어가는 건 용서해 줄 거야』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반주는 백세주에서 오십세주로, 다시 소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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