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님 웨일즈작 김산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은 좌익과 우익이 나뉘어서 진행되었다. 우익은 민족주의자들로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등 한국인이면 알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반면에 좌익세력인 사회주의 계열 인사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이 해방 후에 북한 정권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독립운동가가 아닌 빨갱이가 되어버렸다. 사실 독립운동에 있어서 우익은 외교로서 해결하려 했고 좌익은 무장투쟁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일본과 총 들고 맞서 싸운 자들은 대부분 좌익세력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책을 읽어보니 일본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전쟁에도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이젠 국정교과서를 제정하여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내용을 아예 없애버린다고 하는데 이들이 북한 정권에 일조하고 전범인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지위까지 매도하는 것은 좀 옹졸하다고 생각된다. 노선이 달랐을 뿐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이 책은 김산이라는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님 웨일즈라는 미국인 여기자가 기록한 것이다. 이 들이 만나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님 웨일즈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조사하기 위해 옌안에 들렀을 때 도서관에서 필요한 자료를 대출하려 할 때마다 그 자료를 누군가 한발 앞서서 빌려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알아보니 김산이라는 조선인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김산의 일대기를 남기게 된 것이다.
김산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1살 때 이미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 당시의 일본인들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조선인을 딱히 배척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 이후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인으로 변해버려 학살하고 학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엔 만주로 거쳐 중국 내륙으로 가서 공산주의자가 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읽다보면 역사 교과서를 열심히 봤다면 반가울만한 이름들이 종종 등장한다. 조선의 사회주의를 처음으로 들여온 이동휘 장군, 의열단의 약산 김원봉, 민족주의 계열로는 안창호, 이광수를 굉장히 존경스럽게 써놓았다. 이광수는 변절하기 전까진 민족지도자로서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의 행적은 충격적이었을 것이고 친일파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도 등장하는데 이것이 왜 그렇게 기념비적인 것인지 좀 알 것 같았다. 교과서에선 윤봉길의 의거를 통해 침체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부활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국민당의 지원까지 이끌어 냈다고 한다. 거기에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테러활동을 주로 감행했던 의열단이 많은 인재를 잃는 것에 비해 테러활동의 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노선을 바꾸었던 시기였는데 이 와중에 뜬금없는 개인이 테러를 감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크게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윤봉길 의사는 한인 애국단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었지만 멤버가 김구, 이봉창, 윤봉길 셋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엔 거의 몰랐을 것이다.
이 책에선 독립운동을 교과서에서 보듯이 건조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을 어떻게 해쳐 나왔는지 생생하게 서술해놓았다. 독립운동보단 중국 내에서의 혁명에 어떻게 일조하였는지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 같다.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쓴 사료에 보면 사회주의 계열과 통합논의를 하기위해 화북 지방에 갔을 때 중국 공산당에는 이미 수많은 조선인 간부가 활동하고 있어 놀랐다는 내용이 있는데 김산도 그 조선인 간부 중 하나 였던 것이다. 하여튼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떠오를 정도로 여러 번 죽다 살아났다. 국민당의 토벌 속에서도 가까스로 살아남고 변절자에게 배신당해 체포당하고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자신은 변절을 하지 않았다. 책에는 그의 굳건한 신념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 많은데 공산주의자 여부를 떠나서 존경할만한 인물이라 생각되었다.
교과서에서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내용은 혁명가, 독립운동가의 연애이다. 연애 관련 내용은 어디에 등장하든 상관없이 역시나 재미있다. 김산은 참 매력이 넘쳤나보다. 자신은 어떻게든 여자를 멀리하고 피하지만 계속 여자가 꼬인다. 가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 한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의 외모가 굉장히 출중했다는데 이 책에서도 그 사실이 등장한다. 의열단과 관련된 염문이 참 많았다던데 이들의 인기는 요새 아이돌 같은 느낌이려나. 그 당시 여성들은 목숨 걸고 혁명에 참가하는 남성을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산은 결국 숙청당한다. 당의 윗사람들에 반대하는 의견을 자꾸 내다보니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가 숙청한 것 같다.(트로츠키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러시아의 트로츠키라는 사람의 사상인 것이다.) 김산은 관료주의라고 표현했다. 내 생각엔 쉽게 표현하면 꼰대주의이다. 관료주의로 인해 당의 문제점에 관해 아래에서 옳은 말을 해줘도 지도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아니 꼽게 본다는 것이다. 결국 당이 한번 망했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읽다보니 좀 오래 읽었다. 가독성이 나쁜 것은 아닌데 내가 게을렀다. 문학은 아니지만 문학 읽는 느낌이었다. 멋있는 표현들이 곳곳에 많이 있었다. 영화는 보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데 책은 읽고 싶은 것이 아직 많다.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1984년 동녘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22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읽힌다. 요즘은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도 많이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1989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해금되었지만 경찰에게 '불검'(불심검문)이라도 당하면 파출소로 임의동행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아리랑>은 금서 아닌 금서였다.
내가 <아리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도 대학 1학년 때인 것 같다. '김산'이라는 전설적인 혁명가와 그에 대한 글을 쓴 여기자 님 웨일즈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리랑>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인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가 역사의 스펙터클을 배경으로 실명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1989년은 복잡다단한 해였다. 그 해 가을쯤 동구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학교 캠퍼스에서는 여름 내내 통일축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운동장 곳곳에 축전을 위한 댄스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학원자율화가 진행된 강의실에서는 민주강좌라고 부를만한 강의들이 개설되었다. 아마 그 강의 중 하나를 수강하면서 <아리랑>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아리랑>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난 두말없이 내던져버렸다. 책 마디마디에 스며있는 항일구국의 열정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의 밀도는 그때 내 관심권 밖이었다.
그때는 김산도, 항일구국투쟁도, 성을 넘어선 우정도 고등학교 내내 받아온 제도권 교육의 한계 내에서만 흡수된 듯했다(물론 그 이상이며 책은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 신비로운 혁명가의 일대기치고는 박진감도, 낭만성도, 극적 긴장도 없었다. 그냥 다큐멘터리를 찍어 나가듯 차분하게 진술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누군가에게 줘 버린 것 같다. 그리고는 뭔가 찜찜함과 아까움이 남았다.
군대에 다녀온 후 한 친구에게서 뜻밖에 <아리랑>을 얻었다. 그 친구는 적당한 이유를 댔지만 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리랑>을 내게 왜 주었는지 그 심층적인 이유가 궁금했다.그래서 그 이후로도 그런 기억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졸업하고 모 영화사의 잘 나가는 프로듀서가 되었다. 서정성 짙은 연애영화와 한국적 멜로영화를 제작하는데, 학교 다닐 때의 정신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인다.
친구에게서 받은 <아리랑> 사이에는 편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내게 쓴 것은 아니고 잘못 전달된 편지였다. 그 친구에게 어떤 의미의 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하필 내게 다시 돌아온 <아리랑>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연히 끼워져 있던 편지는 돌려주고 <아리랑>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후에 재미없는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아리랑>은 내 책장 제일 깊숙한 곳에 꽂혀있다. 친구와의 소중한 우정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아리랑>이 내게 다시 찾아온 또 다른 의미를 한 번씩 되새기며.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었던 항일혁명가지만 그의 최후는 조금 황망하다. 김산은 일제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하였고, 1983년이 되어서야 복권과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아리랑>과 김산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1990년대는 물론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생각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처참하게 짓이겨진 사람들,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재가 된 사람들을.
"불화살처럼 살다갔다"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아리랑>의 광고 문구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보면서 왜 불꽃이 아니라 불화살이라고 했을까 생각했다. 아마 단어의 뉘앙스 때문에 불꽃 대신 불화살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지도 못했지만 <아리랑>은 내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리랑>이 내 삶에서 인도서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책 한 권이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막연한 동경이 날 사로잡았다. 확 태워버리는 불의 이미지가 많이 남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내게 책을 준 친구는 <아리랑>을 건네주면서 좀 더 용감하게 살기를 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인생에는 암시와 메타포가 풍부한 순간들과 물건들이 있고, <아리랑>을 얻은 여름 저녁과 <아리랑>사이에 낀 편지 한 장이 그때 그 장소의 그 물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하여튼 님 웨일즈와 김산의, 작가와 대상을 넘어선 교류는 내게 지금껏 여러 가지를 환기시켜줬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 권의 책, 한 장의 편지를 둘러싸고 내가 느꼈던 일들은 내 인생을 지금껏 고양시키고 있고, <아리랑>은 내 90년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도 내 책장 귀퉁이에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아리랑>이 있다. 책장 정리한지가 오래된 만큼 먼지 두께도 상당하다. 세월이 그 한 권에 무척 많이 쌓였다. 내 기억의 90년대는 아주 빛났고, <아리랑>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어느 젊은이의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
부활하는 한국의 체 게바라 '김산'
[탐방]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항일 민족혼을 읽어내다
학창 시절 현대사를 배우면서 일제 36년이라는 시간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나 윤봉길 의거 등이 있었다지만 한일병합 이후 우리 민족의 태도는 너무나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함 속에 살던 이들에게 대학시절 비밀스럽게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한줄기 신선한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등을 선택했지만 중국 혁명의 핵심에 들어가 항일전쟁을 주도했다.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마지막 한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국의 거친 산하에 묻힌 김산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다.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한 김산은 다행히 옌안을 찾은 저널리스트 님웨일즈에게 그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붉은 별’의 작가인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인 님웨일즈는 중국 혁명의 근거지들을 취재하며, 수많은 혁명가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옌안 루쉰도서관에서 영문 책을 주로 빌려간 인물 하나를 주시했다. 그러던 중 어렵게 만난 김산에게 호기심을 갖고 그를 기록한다. 22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기록했고 이는 훗날 김산-님 웨일즈 공저로 '아리랑'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 어렵게 출간된 아리랑
김산(본명 장지락)의 삶은 쿠바와 볼리비아 혁명 등을 위해서 자신을 바쳤던 순수한 영혼 체 게바라를 닮았다. 혁명을 위해 이국에서 몸 바친 것은 물론이고, 누구의 지시에 의해선지도 모르고 희생된 것도 비슷하다. 김산은 옌안에 정착한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에 있다가 상하이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캉셩(康生)의 지시로 극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인으로 중국 공산당 베이징 조직부장은 물론이고, 중국 초기 혁명에서 빼어난 실적을 올린 김산의 존재는 사실 우리 대학생들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였다. 더욱이 한국 역사학자 가운데도 김산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없었다. 오랫동안 김산을 연구한 이회성을 비롯해, 최근에는 한홍구 교수나 홍정선 교수 등이 김산을 연구해 글을 내놓고 있지만, 워낙에 많은 가명 등으로 인해 실체를 접근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기자는 얼마 전 ‘KBS 스페셜’의 취재진과 김산의 행적을 쫓는 긴 취재길(담당 양승동 PD)을 동행했다.
대학 시절의 감동을 기억하며 찾아가는 길은, 대학시절 아리랑의 독서기억보다 나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벅찬 여정이었다. 취재의 여정을 되살리며,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았던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 전사를 되새겨 본다.
광둥, 항일 위해 이념을 뛰어넘어
▲ 하이펑 봉기의 상징적인 인물인 펑빠이의 동상이 있는 홍장
김산은 1905년 3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부터 식민지의 아들이 되어야 했던 그는 11살인 1916년부터 가출을 시작하면서 긴 이방인의 삶에 들어간다. 초반기 무정부주의를 알아가다가, 일본과 중국에서 공부를 한다. 1922년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기도 한 김충창(본명 김성숙)을 만나 공산주의를 알아간다. 불과 18세 남짓한 1923년에는 공산청년연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1925년 가을 김산은 혁명 전야인 광저우에 도착한다.
취재진은 그의 여정 가운데 가장 극적인 광저우와 하이펑(海豊)을 꼼꼼히 돌아봤다. 당시 광저우는 혁명가들의 집산지였다. 김산이 광저우에 도착할 당시에 60여명의 좌우익 전사들이 있었으며, 1927년에는 그 숫자가 800명에 이르렀다. 1927년 4월 15일부터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광주 꼬뮌’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사망했다.
중국 혁명가들도 1927년 12월 10일을 기점으로 반격을 시작한다. 조선인 전사들 역시 대대적으로 이 봉기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광저우를 장악하지만 차츰 한계에 부딪힌다. 특히 장타이레이(張泰雷) 등은 혁명의 진행방안을 혼동한다. 조선인 전사들은 13일 6시경 황화강(黃花崗)에 집결하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최후 격전장이 됐다. 사실 3000여명의 기의 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조선인이 있었고, 황화강에서만 150여명의 조선인 전사들이 희생됐다. 이를 기리기 위해 광주기의열사능원(广州起義烈士陵園)에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 세워졌다.
▲ 김산이 잠시 거쳐했던 펑빠이의 집
불행 중 다행으로 김산 일행은 황화강으로 향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하이펑 방향으로 피신 길에 오른다. 판위(番禺), 화셴(花縣), 총화셴(從花縣)을 거쳐서 하이펑(海豊)으로 향한다. 하이펑은 펑파이(彭湃 1896-1929)의 가족이 초반기부터 공산혁명을 이룬 소비에트가 있던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조선인 동지 환영회’를 여는 등 조선 전사를 환영한다. 김산은 혁명재판소의 7인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는 등 나름대로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국민당의 정규군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김산 역시 고통스런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중국에서도 가장 남부에 속한 광둥의 이 외딴 지방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초반기 혁명 성지 가운데 하나다. 취재진은 홍군의 주기지였던 홍궁(紅宮)과 김산이 한때 머물렀던 펑파이의 옛집 등지를 방문했다. 하이펑 시의 공산당사에도 김산의 가명이 있고, 관계자들 역시 김산에 관해 설명한다. 해방을 위해 찾아와 피를 합친 조선인에 대한 진실한 고마움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이펑에서의 싸움도 역량의 차이로 수세로 몰린다. 김산은 인근 산에서 피신하는 등 시간을 보낸다. 극도의 식량난을 겪으면서 적의 식량을 탈취해 떠나는 최후의 계획을 세우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결국 바닷가로 나와 홍콩으로 탈출한다.
베이징 인근, 초기 혁명 전사로서
김산이 거쳐했던 베이징 징산공원쪽 후통 모습
이후 1928년 홍콩과 상해서 활동하다가 1929년 베이징에 올라온다.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오르기 쉽지 않은 베이징 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한다. 또 중국 아가씨인 유령(劉玲)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후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등 활발한 조직 사업을 벌인다. 2년여를 무사히 활동했지만 더 이상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1930년 11월 20일 그는 베이징 시청(西城)에서 체포된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국민당에게는 단순히 공산당 사상을 연구하는 이로, 일본군에게는 단순 무정부주의자로 보이면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톈진을 거쳐 조선의 신의주로 가서 고문과 심문을 당한다.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내고, 1931년 4월에 석방되어 고향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6월에 베이징에 돌아온다. 조직부장까지 지낸 김산의 귀환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배신의 의심까지 받았지만 김산으로 인해 체포된 인물이 없는 등 결백하다고 인정된다. 하지만 조직에 지친 김산은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바오딩의 사범학교 선생을 지내면서 화북지방의 활동을 주도한다.
중국 혁명의 성지인 옌안 전경
취재진은 바오딩의 사범학교를 거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까오양(高陽)을 찾았다. 화북 농민운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까오양 봉기 당시 김산은 까오양 소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봉기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봉기 기념관에는 당시의 현장을 잘 복원해 있는데, 당시 학교에서 봉기를 지휘하던 자리에는 김산의 이름만이 X로 표시되어 있어 아직도 완전한 복권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오딩의 당사(黨史)에는 김산이 혁명가로 표기되어 있어 화북 초기 운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1933년 4월 김산은 다시 북경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 당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일본에 넘겨져 조선으로 가는데 다행히 이번에도 그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으로 탈출한다. 두 번째 귀환은 그에 대한 의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때 중국 여인 조아평을 만나서 결혼한다. 다행히 그녀는 김산의 아들을 임신하는데, 김산은 아이의 존재도 모른 채 공산당의 정착지인 옌안(延安)으로 향한다.
옌안에서 그는 홍군 전사를 기르던 군정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이곳에서 그는 님 웨일즈를 만나는데 22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인생 여정을 설명한다. 물론 보안의 문제가 있어서 출판시기를 2년 뒤로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님웨일즈는 위대한 전사의 미래를 의심치 않고, 돌아가 저술 작업을 한다.
하지만 김산은 다음해 캉셩(康生)의 지시로 전장으로 떠나는 길에 극비리에 처형된다. 김산의 최후는 중국공산당학교의 교수였던 최용수 선생이 자료실에서 그의 처형을 지시한 문서를 찾아냄으로써 밝혀졌다. 과연 김산은 왜 처형됐을까. 중국 공산당도 1983년 1월 27일에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김산의 흔적을 보고 나서
님웨일즈가 김산의 독서 편력에 관심을 갖게 된던 옌안 루쉰기념관 전경
김산의 부활은 일제하 우울했던 우리 민족혼의 부활과 같다. 지금까지 그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도외시 됐다. 김산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양서봉 장군 등 많은 이들이 김일성과 관계가 있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 잊혀졌다. 때문에 우리는 왜소한 항일 운동의 역사만을 잡고 마음 고생한 셈이다.
이번 KBS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김산의 투쟁은 다시금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울 것이다. 사실 김산은 거대한 샨베이의 고원에서 극비리에 처형되어 무덤조차 없다. 김산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인 샨베이의 한 고원에 섰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어찌 보면 위대한 혁명가를 알아주지 못했던 고국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중원을 가로지르는 황하의 모습
김산이 묻혀 있는 산베이 고원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