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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청년운동을 이끄는 소가 되어 / 이상번
나의 삶 나의 불교
내 불교 태동의 청송
나는 경상북도에서도 오지인 첩첩산중 청송(파천면 지경리 전의 이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모두 철저하게 유교를 지켜왔다. 외가 쪽 또한 전통 유가 집안인 할머니와 어머니가 안동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천전리)과 임하 태생으로 두 분 모두 의성김씨이다. 유교 집안이긴 해도 탁발 스님이 마당에서 염불하면 바랑에다 쌀을 바가지로 넣어 드렸다. 어릴 때 절이라곤 초등학교 소풍과 수학여행 때 보광사라는 절과 주왕산 대전사, 의성 고운사를 가 본 것이 전부다. 초등학교 이전에 불교와 인연이라면 여섯 살 무렵 칠석날 할머니 손에 이끌려 재 넘어 이웃 마을 보살이 방에다 모셔둔 부처님 비슷한 큰 돌 주변에 시주 쌀 주머니를 둘레에 모아 놓고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청송 읍내의 중학교에 갔는데, 삼 년 내내 이십 리가 넘는 길을 재를 몇 개씩 넘으며 걸어 다녔다.
불교인의 첫걸음 대구 서봉사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는데 시내에는 절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자리에 앉은 분이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어느 학교 다닌다고 하니,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 아들이 내가 다니는 학교 같은 학년이라고 했다. 그 후 주인 집 아들 편으로 쪽지를 보내와 놀러 오라고 하곤 했다.
이분이 바로 대구불교 청소년 포교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회운 거사(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지부장)였다. 김 거사는 K-2 공군기지에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불교 청소년 운동을 했다. 대구 시내 절마다 불교학생회를 만들어 법사가 없는 곳에는 법사로 나가기도 했다. 나는 김 거사의 권유로 1971년부터 남학생만 입회가 가능한 등각불교학생회가 있는 서봉사로 나가게 됐다. 처음 절에 갔더니 합장하는 법과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특히 처음 합장할 때 아주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불교 청년 운동의 시작
이를 계기로 불교에 입문한 나는 군대에 갔다 제대한 후, 김회운 거사를 도우면서 본격적인 불교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내가 나가던 서봉사에는 청년회가 없었다. 1978년경 청년회가 있는 동화사 포교당인 보현사에 전화했더니 주지 스님이 토요일 7시에 법회를 한다고 했다. 보현사는 시내 중심가 반월당에 자리했고 절 주변에는 불교용품점이 즐비한 대구불교의 중심지였다. 초중고 불교학생회가 있고 거사림회까지 있었다.
청년회 입회 후 불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동안 학생회에 다니며 얻어들었던 어렴풋한 교리를 제대로 공부했다. 동국대학교에서 펴낸 《불교학 개론》부터 부처님 일대기 등과 경전을 탐독했고, 불교 강연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관심을 많이 가졌다. 덕분에 입회 이듬해부터 신입회원 기초교리 강좌를 담당하게 되었고, 청년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했다.
보현사 청년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나는 법우들에게 등을 떠밀려 청년회장이 되었다. 회장이 된 다음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주보와 《보현청》이라는 월회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회보에는 회원들의 동정과 회원들의 글과 함께 만해 선사의 시를 한 편씩 실었다.
당시 대구에는 불교합창단이 한 군데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석주 큰스님이 주석하는 칠보사를 찾아갔다. 칠보사는 칠보어린이합창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스님에게 대구에도 합창단을 만들 수 있도록 대구 공연을 요청했다. 스님은 쾌히 승낙해 주었다. 칠보어린이합창단은 대구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세 차례 공연을 열었다. 우리는 경비 조달을 위해 청도 운문사를 비롯, 사찰과 암자마다 찾아다니며 입장권을 팔았다. 공연은 반쯤 성공이었다. 첫 공연은 2천 명 가까이 수용하는 대강당이 가득 찼다. 두 번째는 반쯤, 세 번째 공연은 취소했다. 경험이 부족해서 욕심이 과했던 탓이었다.
어쨌거나 이를 계기로 대구에도 합창단 창단이 추진되었다. 남녀 혼성 60명 4부 합창단을 목표로 단원 모집을 시작하자, 많은 회원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경비였다. 단복 맞춤에서부터 지휘자 반주자 수고비, 연습 후 간식비 등이 만만치 않았다. 다시 석주 큰스님을 찾아가서 붓글씨를 100점만 써달라고 했다. 스님은 쾌히 승낙해 주셨다. 우리는 큰스님 글씨 외에도 대구지역 예술인들의 서화, 도자기 등을 모아 대웅전에서 한 달간 전시를 했다. 그렇게 마련한 비용으로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석주 큰스님을 친견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한때 만해를 시봉했던 석주 스님에 따르면 만해 스님이 대구 보현사에 며칠씩 머물렀다고 했다. 사연인즉 만해 스님이 독립선언 민족 대표로 유교의 면우 곽종석이란 분의 승낙을 받으러 거창으로 가는 길에 대구역에 내렸더니, 일본 밀정들이 따라붙었다. 이를 따돌리려고 보현사에 머물면서 밀정들의 눈을 피한 뒤 거창으로 갔다는 것이다. 곽종석은 알아주는 거유(巨儒)여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법우들에게 신나게 전하고 다녔던 추억이 떠오른다.
청년회에서는 전통차 보급을 위해 다도반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다도 교육도 했다. 스님을 모셔서 다도 법회도 했는데 처음으로 법문한 분이 지금 전계대화상인 석성우 스님이다. 이 밖에도 대구청년회는 다양한 법회를 진행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시인, 소설가, 예술인, 저명한 학자 등을 특별 초청해 법회를 열었다. 법회 의식에는 반드시 차 공양 순서를 넣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불교 변혁 운동에 눈뜨다
1980년 전후 나는 직장인으로서, 갓 결혼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넉넉하지 않은 대가족 5남매의 장남으로서 여러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어느 해 나는 경봉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가는 보살님들 틈에 끼어 통도사 극락암을 찾았다. 그때 노스님께서 “너는 누구인고?” 하고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물었다. 보현사 청년회장이라고 하자 시자 명정 스님을 시켜 6권이나 되는 만해 전집을 한 질 선물로 주셨다. 나는 몇몇 관심 있는 대목을 찾아 읽었으나 다 읽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민주화 투쟁으로 해직되었던 염무웅 선생이 영남대 교수로 와서 《창작과 비평》에 쓴 〈만해론〉을 읽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만해 공부를 시작했다.
이 무렵 대구지역 청년불교연합회 선거가 있었다. 여러 곳의 도움을 받아 연합회장이 되어 서울 중앙회와도 자주 교류했다. 그러다 보니 뜻이 맞아 조계사청년회(당시 회장 지정수)와 광주 원각사청년회(당시 회장 임동호)와 자매결연을 하고 해인사에서 합동 수련대회도 했다. 특히 광주 원각사 청년들과는 창립기념일 등에 많은 회원이 오가고 했다. 광주의 법우들이 적극적이고 다정다감하며 소탈해서 오래도록 교류하였다. 엄혹한 시절이던 이때 광주에 가면 망월동 묘역도 참배했다.
당시의 불교계도 어수선했다. 이교도들의 불교 비방 집회가 잦아 우리 청년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영천, 구미, 경산 등지의 교회에 비방 저지 출행도 여러 번 했다. 영천에서 내가 경찰에게 이끌려 갈 때 내 다리를 잡고 늘어진 여 법우가 떠오른다. 1984년 신흥사 사태 관련 전국청년불교도대회가 부산 범어사에서 봉행되었다. 성문 스님 등 젊은 스님들과 함께 청년회중앙회(회장 배조웅), 대학생불교연합회(회장 김영국)가 행사를 주도했는데, 내가 불교도에게 보내는 메시지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연설 내용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대중 모두가 눈물을 훔쳤다. 특히 젊은 수좌들과 앳된 비구니 스님들의 슬피 우는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대한불교청년회 18대 회장 취임
1994년은 매우 어수선하던 때다. 당시 총무원장은 의현 스님이었는데 3선 출마 문제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조계종은 의현 스님을 물러나게 하고 개혁종단을 출범시켰다. 한편 대한불교청년회도 17대 회장이 임기가 만료되어 18대 회장 선거가 있는 해였다. 대한불교청년회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초대 회장을 지낸 불교단체이다. 나는 지역 출신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18대 회장에 출마하여 조계사 출신 법우와 경쟁하게 되었다. 전국 대의원들이 조계사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선거가 과열되어 총회가 장시간 지연되다가 뒤늦게 수습되어 투표가 진행되었다. 투표 자격은 지회대의원 지구대의원 중앙집행부 대의원 등에게 주어졌는데 결과는 나의 당선이었다.
이로써 나는 제18대 회장으로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전국의 불교 청년들을 이끌게 되었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대구에서 올라오던 대의원들이 탄 버스가 대전 어귀에서 고장이 나 전부 개별적으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간신히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중앙회장에 출마한다고 하자 당시 동화사 주지였던 무공 스님과 보현사 주지였던 벽봉 스님 등 많은 분이 적극적으로 성원을 보내준 것도 고마우신 일이었다.
회장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무실 문제 해결이었다. 당시 대불청은 총무원 청사 안의 작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조계사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청진동에 40평 규모의 사무실을 전세로 마련했다. 전세금은 회장의 3년 치 분담금을 선납한 돈과 서울불교청년회 기금을 합하여 충당했다. 우리는 이 공간에 만해시민대학을 세워 교양강좌를 여는 한편, 시민단체에 기자회견이나 세미나장으로 대여도 했다. 상근자도 몇 명 늘렸다. 그때까지 겨우 2명이 있었는데 반(半)상근자를 포함해서 7명으로 늘렸다. 보수도 다른 시민단체에 빠지지 않게 결정하고 예우를 충분히 했다. 심지어 퇴직 충당금까지 준비하고 당시 상근자들의 나이에 걸맞은 보수를 상향해서 지급했다.
그러자 청년회 분위기가 확 달라지고 주변에 신뢰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회비로 예산을 충당할 수 없어 항시 권선으로 해결했는데, 운 좋게 내가 재임하는 중에는 권선이 잘되어서 예산이 부족하여 급여를 못 주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신행단체에 지원하는 일이 거의 없는 데다 절 돈이라면 십 원 한 장도 아껴서 별칭이 ‘고래 심줄’로 불리던 당시 조계사 주지 현근 스님도 대불청에 무려 3백만 원을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이는 당시 조계사 주변 신행 단체에서는 큰 사건으로 회자될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현근 스님은 그렇게 아끼고 아껴 조계사 주변의 많은 건물을 매입해서 오늘날 조계사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회장 취임 후의 행사 중에 잊히지 않는 것은 매년 3월 1일 동국대학교에서 열리는 전국만해백일장이다. 여기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적극적인 권선 덕분에 행사를 치르고도 비용이 남을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만해백일장을 전국 최고 권위의 백일장으로 만들기 위해 운영위원회를 상설하고 다음 해부터는 시와 산문 분야로까지 행사 규모를 확대했다.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살리기 운동
이 무렵, 나로서는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군위 인각사 살리기 운동이 그것이다. 시기적으로는 18대 회장 선거에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직 몇 달 남아 있던 1994년 연말이었다. 17대 배영진 회장이 임기를 마감하는 모임이 수안보에서 열렸다. 후임 회장인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갔는데, 상인 스님이란 분이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다가 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전화가 와서 인사를 나누었더니 군위(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됨) 인각사에 새로 주지로 취임한 상인 스님이었다. 인각사는 은해사 말사로 일연 스님이 이 절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열반에 든 유서 깊은 절이었다. 당시 은해사 주지는 법타스님이었는데 말사인 인각사는 역사에 비해 사세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능력 있는 분을 수소문해 주지로 앉힌 분이 상인 스님이었다. 상인 스님은 우선 대구 출신으로 중앙회장에 당선된 나를 찾아와 이 일을 상의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은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스님을 뵈러 인각사로 갔다.
스님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인각사를 살리려면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행사를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일치했다. 나는 인각사를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도와드리기로 약속했다. 그 유명한 〈보각국사비문〉이 훼손된 채로 비각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비석의 원본을 탁본으로라도 확보해 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매년 저명 교수를 초청해 《삼국유사》와 일연 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시인들이 직접 시 낭송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첫해는 고은 시인이 참여했고 이듬해는 염무웅 교수와 신경림 시인, 유안진 시인을 모셔서 행사의 품격을 높였다. 고은 선생에게는 일연 스님에 대한 찬가를 써달라고 부탁해서 노래도 만들고 절 마당에 시비도 세웠다. 상인 스님은 군위군과 협의를 거쳐 수많은 문화 행사를 벌였다. 그동안 아무도 찾지 않던 인각사를 세인의 관심 중심에 올려놓고, 드디어 보각국사 비를 탄신 800주년을 맞아 건립했다. 상인 스님은 부임 이후 많은 일을 했지만, 은해사 문중이 아니기 때문인지 주변에서 시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8년 만에 소임을 내려놓았다. 재임 기간 중 특유의 열정을 발휘해 불사를 추진했던 스님은 물러나는 와중에도 문화재청에 수없이 드나들며 인각사 마스터플랜을 설명하고 예산 2백억 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정작 그 후 인각사에서 이것을 추진하지도 못하여 국가에 환수되고 말았다고 한다. 미력이나마 상인 스님을 성원했던 사람으로서 지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독립기념관 만해 어록비 건립 모연
대불청 회장 재임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은 독립기념관에 만해 선사 어록비를 세운 것이다. 당시 조계사에서 덕왕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있었는데(지금은 역사문화관 불사로 헐리고 없다), 나는 석가래 하나를 시주하면서 발원했다. 이 작은 공덕으로 만해 선사 어록비 건립 불사를 꼭 이루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간절한 발원 때문이었을까, 1995년 12월 어느 날 새벽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아내가 백담사에서 온 전화이니 받아 보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바꿨더니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고 좀 어눌한 투로 뭐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물으니 “오현입니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 독립기념관에 만해 스님 비석을 세운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봤는데 사실이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더니 예의 그 어눌한 말투로 “저- 나도 좀 도우면 안 됩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장난하는 객승 전화인 것 같기도 했지만, 조심스럽게 “되고말고요.” 했더니 “얼마를 도와주면 됩니까?” 하고 되물었다. 나는 정중하게 “성의껏 형편대로 하시면 됩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하니 한참 뜸을 들이다가 “5백만 원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5백만 원이란 거금을 주겠다는데 보통 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공손하게 “형편이 되시면 좀 더 도와주십시오. 청년들이 많이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의외인 듯 한참 말이 없더니 “그러면 1천만 원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기왕 꺼낸 말이라 목소리를 가다듬고 “스님 좀 더 도와주십시오. 불교계에서 삼일절만 되면 만해 스님 팔면서 독립기념관에 만해 스님 어록비 세우는데, 어려운 청년들이 걸뱅이처럼 만 원, 이만 원 구걸하다시피 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왕이면 좀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고 돈을 맡겨 놓은 사람처럼 떼를 썼다.
지금도 내가 왜 그렇게 호기를 부렸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스님께는 참으로 죄송스럽고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떳떳하다고 생각한 일이었기에 부끄러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자 스님은 한참이 지난 후 나에게 “회장님, 2천만 원 내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큰 무례를 범한 것 같아 백담사로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오지 말라고 했다. 그보다는 비석을 언제 세우느냐기에 8월 15일 광복절 행사를 마친 후 오후에 제막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니 계좌번호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과연 2천만 원이 들어왔다. 후원금은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그리고 오현 스님 명의로 각각 5백만 원씩이었다. 생면부지의 젊은 사람을 믿고 뜻있는 불사에 쓰라고 거금을 쾌척하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다.
총무원장 월주 스님과의 담판
만해 스님 어록비 세우는 일에 오현 스님이 귀한 정재를 보내주셨으니, 씨앗이 뿌려진 셈이었다. 자신이 생긴 우리는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비석 같은 잘생긴 자연석을 구해서 규모도 그 정도 되도록 건립할 구상을 했다. 석재상에 탐문한 결과 귀한 자연석은 수억이 든다고 했다. 고심하다가 새해가 되어 대불청의 당연직 총재인 총무원장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당시 총무원장은 월주 스님이었다. 스님 또한 정재를 아끼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으로 세간에서는 송백만(宋百萬)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일단 부딪쳐 볼 요량으로 신년 인사차 사무총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대동하고 새벽에 구의동 영화사로 찾아갔다. 스님은 새벽마다 108배를 하신다고 하여 그때를 맞추어 갔던 것이다. 우리도 108배를 시작했는데 스님은 108배가 끝난 후 우리의 세배를 받았다. 우리는 스님께 독립기념관에 만해 어록비를 세울 계획을 설명했다.
“독립기념관에 수많은 비석이 있는데 만해 스님처럼 위대한 독립운동가는 우리 손으로 여법한 어록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우리의 설명을 듣더니 굳이 자연석만 아니면 5천만 원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오현 스님에게 받은 2천만 원을 염두에 두고 3천만 원을 요청했더니 스님은 흔쾌하게 총무원 차원에서 3천만 원, 개인으로 5백만 원 지원을 약속했다. 뒷날 소문을 들으니 총무원 간부 스님들이 총무원 재정도 어려운데 불가능하다는 뜻을 건의했다가 야단을 맞았다고 했다. 당시 종단은 종단개혁 문제로 분담금이 제대로 오지 않아 종무원들 급여도 제때 주지 못할 정도였는데 참으로 통큰 결정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어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불교가 이 정도라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드디어 만해 어록비를 세우다
이렇게 어렵게 비용을 마련했으니 이제는 비문을 새기는 일이 남았다. 우리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에게 글씨를 부탁하기로 했다. 나도 서툴지만 서예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최고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을 마음에 두었다. 일중 선생은 탑골공원 만해 스님 비문을 쓴 분이다. 또 대구 보현사 청년회 시절 기금모금을 할 때 선생의 작품인 부모은중경 병풍을 팔아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사무총장이 일중 선생을 찾아갔더니 당신은 이제 팔이 떨리고 풍으로 건강이 여의찮아 쓸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동생인 여초 김응현 선생을 추천해 주었다. 우리나라 서단(書壇)에 일중과 여초라면 대가로 존경받는 분이다. 망우리 만해 스님 묘역의 비문도 여초 선생이 썼다. 그런데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한글인데 김응현 선생은 한글은 거의 안 쓰고 한문만 잘 쓰는 분이었다. 할 수 없이 석주 큰스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리니 스님은 당신 글씨는 비석에 쓰는 글씨체가 아니라서 한사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스님께 써 달라고 떼를 쓰자 다른 분을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독립기념관 내 만해 스님 어록비 글씨는 석주 스님이 추천한 신두영 서예가의 글씨다.
마지막으로 비석 뒤에 누구 이름을 넣을까가 고민이었다. 논의 끝에 주최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주관은 대한불교청년회, 협찬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로 새겼다.
뒷얘기 한 가지 더. 기념비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현재 자리가 본관에서 너무 외진 데다 화장실도 가까이 있고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념관 측에 위치 변경을 요청했으나 안 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장 좋은 위치가 되었다. 앞에는 작은 호수를 파놓아 수생 식물들이 자라고 그 옆에는 차와 간이식을 파는 곳도 있다. 나무도 울창하여 비석을 감싸는 듯해서 독립기념관 비석 위치로는 최고의 명당이 되었다.
비석 건립 낙성식은 아주 성대하게 했다. 국립국악원 취타대의 화려한 연주로 시작하여 송월주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한 교계 스님들과 정각회 불자회장인 서석재 의원을 비롯해서 수덕사 주지 법장 스님, 대불청 주요 임원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다 기억은 할 수 없지만 비석 세우는 데 보시를 해 주신 분들이 더 있었다. 석주 큰스님 1백만 원, 수덕사 주지 법장 스님 5백만 원, 서석재 정각회 회장 5백만 원 외 전국청년회 동참자 등이 십시일반으로 보시해 주었다. 도와주셨던 분들 이름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무산오현 스님과의 만해 불사
만해기념비 건립을 인연으로 백담사 오현 스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인연으로 스님과는 입적 전까지 이런저런 심부름을 했다. 백담사에 가면 스님은 당신이 자는 방에서 묵게 해 주었다. 스님은 새벽 3시가 되면 전깃불을 켰다. 어른이 일찍 일어나야 사중 사람들이 게으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도량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보일러실 공양간 창고까지 들춰 보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 스님을 멀리서 가까이서 모시면서 생긴 몇 가지 에피소드. 백담사 법당 앞 요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쓰던 몇 가지 물건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나는 보기 싫으니 치우면 좋겠다고 당돌한 건의를 했다. 그러자 스님은 ‘저것도 역사다. 역사는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다. 감추지 말고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을 짓고 관련 유물을 수집할 때도 스님은 자주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인사동 통문관을 통해 자료수집에 나섰다. 만해 관련 자료들은 남한산성에서 만해기념관을 운영하는 전보삼 선생이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나는 두 분을 연결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번은 만해축전 때 백담사에 갔더니 스님은 여러 사람 앞에서 나를 깡패라고 했다. 제가 왜 깡패냐고 웃으면서 항의했더니 “이상번 회장은 깡패지. 다른 사람은 30만 원만 줘도 고맙다고 삼배하고 두고두고 인사하는데, 이 회장은 5백만 원 준대도 더 내놓으라고 하고 천만 원 준다고 해도 안 받고 큰소리치고 내한테 2천만 원이나 뺏어갔으니, 깡패도 이런 깡패가 어디 있노.” 하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칭찬 중에 최고의 칭찬이 아니었나 싶다.
꼭 이런 칭찬 때문만은 아니지만 나는 스님의 시비를 비슬산 유가사 입구에 세워 드렸다. 언젠가 통문관에 들러 자료를 찾던 중 근현대 불교시인 전집을 발견했다. 목차를 보니 대구지역을 상징하는 〈비슬산 가는 길〉이라는 시가 있었다. 평론가들도 최고의 시조라고 평하고, 읽을수록 그 유장한 가락과 심오함이 묘하게 울림을 주었다. 나는 비슬산 자락에 시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착수했다. 스님은 펄쩍 뛰며 시비를 세우면 포클레인으로 파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시란 발표되면 그때부터 독자의 것이니 파 가시든 뒤엎든 알아서 하시라고 했지만,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잠시 쉬면서 비슬산 관련 공부를 하던 중 일연 스님이 쓴 비슬산 관련 시를 발견했다. 나는 두 분의 시비를 나란히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일을 추진했다. 시비는 2008년 5월 3일에 전국의 문인과 대중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제막했다.
첫 시집 출판과 문학 활동
아는 사람은 알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시를 써온 시인이다. 나는 1987년 대구경북민족문학회(현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전신)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1990년 《우리 시대 젊은 시인들》 제4집에 〈망월동 가는 길〉 〈무등산 소낙비〉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시집은 시를 쓴 지 20여 년 만인 2008년에야 첫 시집 《스탑 더 워》를 냈다. 시집을 내자 각계에서 시 정신이 좋다고 찬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유심》 잡지에서 그해 시집 낸 사람들을 조명하는데 혹평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서운했다. 그때부터 시집 내는 일을 포기하고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써놓은 시가 몇 권 분량은 된다. 또 대구경북작가회의와 현대불교문인협회 경북지부에도 얼굴은 내밀고 있다. 앞으로 용기를 내서 세 권 정도는 더 시집을 출판할 꿈을 가지고 있다.
늦은 나이에 하는 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이제부터라도 문학과 서예에 몰두하기로 하고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다. 동화사 주지실이라고 연락이 왔다. 주지 성문 스님이 보자고 해서 갔더니 동화사 신도회장과 대구광역시 신도회 회장을 내정해 놓았는데 그분들을 도와줄 수 없느냐고 했다. 누가 나를 스님께 추천했던 모양이었다. 성문 스님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이 일로 동화사 신도회와 광역시 신도회에서 상임부회장으로 성문 스님을 잘 모시고 4년간 봉사를 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시대가 급변하는데 우리 불교의 대응은 지지부진이다. 그 많던 청년회와 학생회, 어린이 법회가 다 없어져 가고 있다. 종단에서 대학생 포교를 위해 많은 기금을 마련하였다지만 어찌 대학생뿐이겠는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대학교를 나와서 불교 청소년 지도교사가 되도록 사찰에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출가자가 많아도 어려운데 출가자가 줄어드는 현실에서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절에서도 막연한 봉사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찰은 신도들이 편하게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생전에 석주 스님이 대구에 오시면 꼭 찾아가서 쉬는 전통적인 사찰 청수사가 좋은 예다. 이 절에서는 옛 목조 한옥 대웅전을 헐고 신식 건물을 지었는데 대웅전에는 부처님 한 분만 모셔 놓았다. 불단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공간만 두고 모두 의자를 놓아 신도들을 편하게 해 주었다. 지하에는 주차장, 1층에는 카페와 빵을 파는 곳, 그리고 사찰 요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한식 식당이 자리 잡았다. 한편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들어서 있다. 이렇게 설계하여 건축 최고상까지 받았다. 우리 불교가 모두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가 밀집한 도심에 새로운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 시의적절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회향, 나의 인생 나의 불교!
돌아보니 어느새 내 나이 72세가 되었다. 열심히 살긴 했는데 이루어 놓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이라서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스럽다. 사회적인 단체든 신행단체든 직함은 다 내려놓고 예술 분야인 서예와 문학에 마지막 여생을 보낼 작정이다. 그동안 읽지 못한 경전을 탐독하고 그래서 스님들이 절에 쓸 현판 글씨와 불사할 때 연기문 등을 직접 붓글씨로 써 주고 있다. 또 행사할 때 축시도 써 주며 행복한 칠십을 보내고 초서(草書) 간찰의 해독과 연구를 하고 있다.
요즘은 그동안 인연을 맺은 스님들의 재일도 찾아다닌다. 불교 활동을 하면서 어른 스님들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불교 선지식과 선배 어른들이 많이 타계하셨다. 우리 집안도 이제 어머니가 이태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장수하셔서 100세까지 사셨다. 아버지, 어머니도 모두 집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른들께서는 수발을 지극히 해 준 며늘아기 덕에 여한 없이 편안하게 살았다고 아내에게 고마워하셨다. 마지막 소원은 하나뿐인 아들이 귀한 배필을 만나 불자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
이상번 dltkdqjs54@naver.com
1954년 경북 청송 출생. 경운대학교 경영학과, 영남대 경영대학원 졸업. 일찌기 학생불교운동에 투신, 대구불교청년회 회장, 대한불교청년회 중앙회장을 지냈다.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부회장,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공동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 운영위원장, 대구경북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장 등 역임. 시집으로 《스탑 더 워》와 저서로 《이광수론》 《김동인론》 《이상론》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회의, 대구경북 서예가협회 회원이며, 현재 대한불교청년회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