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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날에는 더 이상 참척(慘慽)의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어르신들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느낌이 든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슬픔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 참혹하고 깊은 슬픔을 일컫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으로 낙화한 지 십 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냐?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거냐? 며 투덜거립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돌아다니는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아있는 부모나 가족은 아직도 참척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잠 못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헤아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섣부른 위로의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옆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혹독한 고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발산하며 애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가 막히는 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이를 앞세우는 큰 슬픔에 힘겨워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한줄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그 슬픔 그 고통 위로가 안되니, 어떻게든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위로를 받으시고,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6,35-40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이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 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워진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고,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이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ㅈ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6,35-40: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시다. 본래 죽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께서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참 생명을 주셨다. 그들은 성경도 알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37절)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37절)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명하신다. 당신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고 그 권능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하며 당신을 닮도록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바치셨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응답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유대인들은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 사도들은 정확하게 증언해야 했기에 보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완성될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께로 인도하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다시 살리시며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죽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주신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믿음, 곧 생명으로 넘어감이 첫 번째 부활이며,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음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고, 마지막 날에 참으로 부활하는, 구원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영화 아이언 맨, 셜록 홈즈, 오펜하우어를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 것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때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고 하네요. “나는 마약의 힘으로 창의력을 높이려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와 마약치료센터에 반복적으로 드나들었고, 당연히 결혼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갱생 불가’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는 마약을 완전히 끊었고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끊기 힘들다는 마약을 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그는 버거킹 ‘치즈버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좋아해서 매장에 가서 주문한 버거를 입에 넣는 순간, 버거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버거 맛도 제대로 못 느낄 지경까지 몸이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가지고 있던 마약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면서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버거 중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마약을 선택했다면 순간의 쾌락에만 의존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버거를 선택했기에 건강해질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자주 서게 됩니다.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라는 선택입니다. 세상의 것은 분명 순간의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순간의 만족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선택하라고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을 통해 다시 살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 것에 눈길이 더 많이 가고,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욕심과 이기심만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에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이태백).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6,38)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뜻이 있으셨지만
아버지의 소중한 뜻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뜻을 접으셨다네.
예수님의 뜻은
곧
아버지의 뜻이었고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자
당신의 삶까지
온전히 바치셨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요즘 과자를 사면 내용물은
너무도 작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빼빼로를 먹었는데
직원들 하나씩 주었더니 2개만 남았습니다.
가격과 포장은 그대로인데 내용물이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물가가 오르니 양을 줄였나 봅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떤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겉 포장만 요란하고 속은 텅 비어있는
그런 악세사리 신앙은 아닌지...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의 영적 투쟁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박해를 겪는 경우도 있고
힘겨워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지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믿음은 그런 과정과 경험들을 통해
말씀 안에서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저의 믿음이
바람이 잔뜩 들어간
과자봉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기도안에서 체험했으니
내가 ‘직접’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야 하겠습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 40)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용서와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을 바치십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영원한 믿음을
실천하십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참된 믿음을
보게됩니다.
뜻과 실천
믿음은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의 중심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시 살리려는
생명의 뜻입니다.
생명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믿음으로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끝내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늘도 믿음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영원한
믿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믿음입니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6,40)
영의 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40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 때문이고, 이를 실천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믿는 이들을 이제와 영원히 살리는 것입니다.
세례 예식 때 사제와 예비신자들이 주고받는 첫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인데, 이는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영적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권고1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6-7절)
이번 주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의 말씀(6,1-8,8)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뽑힌 봉사자인 일곱 부제 중에 한 명인 스테파노에 관한 말씀입니다.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과 성령이 충만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뵙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죽지 않고 사는, 마침내는 영원히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복음 말씀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