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문화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토요일 오후 2시 부산역 시계탑으로 오시면 됩니다."
25인승 산복도로 투어버스에 올랐다.
부산역에서 출발해 초량육거리-까꼬막-유치환의 우체통-장기려 더나눔-168계단-김민부 전망대-이바구공작소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여기서 보면 저 밑에 부산항에 배가 들어 오는 거 다 보입니다.
뿌~ 배가 들어왔다 하면 여기서 저 밑에까지 정신없이 달려가는 기라요.
그라믄 선착순 50명. 뽑힌 사람은 온종일 가대기 메고 일하고 일당받아서 쌀 한 봉다리,
연탄 한 장 새끼줄에 묶어가, 그라고 아까 그 육거리 있지요. 거기서 뼈 같은 거 가지고 올라옵니다.
그라믄 하루 힘들어도 마…."
168계단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구수한 해설도 듣고
까꼬막에서 비즈공예체험으로 가방 고리도 하나 만들어 달았다.
유치환의 우체통에서 함께 온 관광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예정된 2시간 30분을 넘겨 우리의 코스는 끝이 났다.
관광코스로 만난 산복도로.
언젠가부터 산복도로는 내 이웃이 사는 그렇고 그런 동네가 아니라,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너무 유명해진, 그래서 가 봐야 하는 강박증으로 다가왔다.
■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동구 망양로 580번길에 있는 '유치환 우체통'.
국제 메트로폴리스 어워드 1위(2014),
대한민국 지역박람회 지역발전대상(2013),
지역공동체 활성화 발표대회 최우수상(2013),
부산시정 1위(2013) 후쿠오카본부 아시아도시경관상 대상(2012),
초량이바구길 대한민국 향토자원베스트 30 선정(2011),
부산 히트 상품 3위(2010),
박근혜 대통령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지역 발전 모범 사례',
초량이바구길 방문객 11만 명, 감천문화마을 방문객 30만 명,
산복도로 방문객 52만 명, 마을 거점시설 70개소,
마을기업, 예비적 사회기업 26개 설립 등등.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이제 부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등극하고 있다.
이러한 수상과 숫자들은 부산의 산동네를 낙후된 달동네의 이미지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예술적인 마을'(미국 CNN), '미로 끝에 있는
예술마을'(프랑스 르 몽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곳으로 바뀌고 있음을 증명한다.
부산시의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은 원도심 산복도로 일원 거주 지역(중·서·동·사하·사상구 54개동 63만4000명 부산 전체의 17. 6%, 2010년 기준)의 역사 문화 경관 등 지역자원을 활용하는 주민 참여형 마을 종합재생 프로젝트로, 부산시가 2011년부터 오는 2020년까지 10년간 1500억 원을 투입하는 역점 사업이다.
'산복도로 공간 재생과 지역 자활을 통한 생태문화소통의 공동체 형성'이 목표다.
특히 종전의 개발사업과 가장 큰 차이로 '개발을 최소화하며, 주민과의 소통'에 역점을 둔 창조도시 프로젝트이다.
■ 복원되는 과거, 소비되는 향수
옛 백제병원을 지나 초량초등학교 담장에 설치된 이바구 갤러리.
산복도로 르네상스의 효과는 수치가 말해주듯,
관광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그동안 가리고 가리면서 에둘러갔던 이곳이
이제는 관광객들을 가장 먼저 데리고 오는 공간이 되었다.
이중섭의 거리를 걸으러 범일동으로, 유치환의 우체통에서
엽서 한 장 부치고 잠시 행복해지다가, 금수현을 만나 세모시 옥색치마
노래 한 소절 뽑고, 황순원을 만나 한국전쟁기에 발표했던 곡예사의 시간을 더듬고, 어린 왕자 포토존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내려와야 산복도로를
제대로 봤다고 스스로 위안으로 삼는다.
일제강점기 도시형성, 해방, 한국전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부산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간 산복도로의 시간은
100년의 세월을 지난다.
수정산 허리를 베어 만든 망양로가 개통된 지 50년.
그 길을 통해 산 아래의 시간과 산 위의 시간이 얼추 맞아들기
시작한 것은 그 도로가 개통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산 위의 시간이 산 아래의 시간을 추월하면서
3, 4년 동안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만도 70여 개를 향해 달린다.
이러한 산복도로의 속도가 말해주는 것은 산복도로가 성과주의에 피로해졌다는 사실.
'피로사회'의 경쟁에 갑자기 떠밀려진 산복도로 사람들의 생체리듬은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에 어리둥절하다.
관광의 시간과 일상 시간의 불협화음. 동일한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아이템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자리가 된다.
아이템은 출발부터 경쟁선에 있고,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거울 앞에서 변신을 꿈꾸어야 하고,
자칫 한 박자 늦었다가는 유행에 뒤떨어진 퇴물이 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간다.
이제 속도전에 돌입한 산복도로는 복원된 과거와 지금 여기의 대화가 채 이루어지기 전에
새로운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선다.
# 거창하게 꾸미는 일 아닌 일상의 기억 현재화하는 작업이 우선
■ 산복도로 재생 첫 번째 목록
초량이바구길의 김민부전망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토는 일상적 공간의 장소성에 대해
'내부로 돌아가는 역사이고, 남들은 읽을 수 없는 과거이며, 펼칠 수
있지만 이야기처럼 보따리 안에 저장된 축적의 시간이며,
육체의 고통과 기쁨 속에 둘러싸인 상징화'라고 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소성은 거창하게 건물을 지어 올려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장소의 주름을 지우고 제멋을 내는 스펙터클은 오히려 장소성을 은폐한다.
장소성은 내 삶이 곰삭아 주름꽃을 피워낸 자리다.
노화된 산복도로의 재생은 보톡스를 맞고, 피부 이식을 하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미녀의 탄생'이 아니라,
주름의 시간을 응시하면서 그 미세한 지문의 결을 거슬러 가는 족적으로 다가올 일이다.
도심 주변부 산동네는 사실, 도시공간을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면서 그 간극을 더욱 키워낸
근대 국민국가가 자인한 통치의 실패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성급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은 진정한 위무도, 대책도 되지 못한다.
다시 찾고 싶은 산동네와 내가 살고 싶은 산동네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찬찬히 따져 묻는 일.
산복도로의 지난한 일상의 기억들을 현재화하는 작업이야말로 산복도로 재생에 올라야 할 첫 번째 목록이다.
지역거점 시설을 만들고, 주민들을 참여시켜 일자리를 늘리거나 소득을 증대시키는 일면이나,
공동체의 움직임이나 지역 알리미로 나선 주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등이 지역에
역동적인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수의 닫힌 대문들을 여는 작업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는 오늘 부산의 더욱 나은 미래를 위해 지속 가능한 발전과 사람 중심의
도시재생을 실천해 나갈 것을 선언한다."(부산시 부산도시재생선언)
산복도로 르네상스가 예고하는 미래가 지난 시간의 실패를 성급하게 가리면서 또 다른 욕망의 사다리를 제시하고 그것을 다시 욕망하게 하는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통치기술과 다르게 가는 길을 제시할 때 '르네상스'의 중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