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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이 26일 밤(현지시간) 특별 대국민연설을 통해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의 군사 반란 기간에 보여준 국민들의 단결과 애국심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이후 국방·내무·방위군·FSB·검찰 등 공권력 집행 기관 수장들을 소집해 향후 러시아 사회의 안정화 대책을 논의했다.
대국민 연설(위)후 공권력 집행 기관 수장들과 회의하는 푸틴 대통령. 쇼이구 국방장관의 모습도 보인다/사진출처:크렘린.ru
타스 통신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인정이라도 하듯, 국민 전 계층에 대한 감사 표시가 주를 이뤘다. 5분 12초간, 509 단어로 된 그의 연설은 '러시아', '사회', '감사', '함께', '국민'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됐다. '군사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 사회의 통합을 위한 국민의 애국심이고, 이 지원 덕분에 가장 어려운 시련을 함께 극복할 수 있었다. 감사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푸틴 대통령은 "국가 체제를 협박하고 내부 불안을 조성하려는 시도가 국민들의 연대에 의해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정당과 종교, 공공 기관 등 러시아 사회 전체가 헌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고 강조했다.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 당시,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를 비롯해 각 지자체, 정당, 사회 각계 지도층 인물들은 모두 '군사 반란'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반란 주모자들이 조국과 국민을 배신했다"고 질타하면서도, "바그너 전사 대다수는 애국자이며 어둠 속에서 이용됐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동시에 바그너 전사들과 사령관들에게 "유혈 사태로 가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멈췄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바그너 전사들은 (특수 군사작전 참여를 위해) 러시아 국방부와 계약을 체결하거나 가족에게 돌아가거나, 벨라루스로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 그룹이 더 이상 이전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분석했다.
그의 대국민 연설은 공교롭게도 프리고진의 텔레그램 음성 메시지 공개 이후 방영됐다. 프리고진의 발언을 듣고 연설 내용과 톤을 조정한 듯한 느낌이다.
앞서 프리고진은 군사 반란 중단 이후 26일 처음으로 11분짜리 음성메시지를 냈는데, 자신의 행동(군사 반란)을 정당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바그너 그룹의 와해를 피하고 특수 군사작전 중 실책을 저지른 이들(러시아 정규군 지휘부)의 책임을 묻고자 행진을 시작했다"며 "우리는 공격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나, 미사일과 헬리콥터의 공격을 받았고, 그게 방아쇠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전복을 위해 행진한 것이 아니었고, 러시아 병사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돌아섰다"고 항변했다.
◇ 용병업체 '바그너 그룹'의 앞날은
바그너 전사들이 푸틴 대통령과 수장 프리고진 중 누구의 말을 더 믿고 따를 것인가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의 약속을 믿고 러시아 국방부와 '자원 병력' 계약을 맺든가, 아니면 무기를 내려놓고 가족에게 돌아가든가, 프리고진을 따라 벨라루스로 갈 수 있다. 선택은 각 개인들의 몫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벨로루시에서는 26일 '바그너 그룹'을 수용할 위해 캠프를 짓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200㎞ 떨어진 '모길료프'(Могилёв) 지역에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캠프 건설이 진행중이라는 것. 비슷한 규모의 캠프가 벨라루스에 여러 개 만들어질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소문은 나중에 벨라루스의 반정부 언론에 의해 부인됐다.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에 주둔할 경우,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국군 장성 출신의 상원의원 리처드 다냇은 25일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바그너 그룹은 여전히 크렘린에 유용하며, 벨라루스에서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로 공격할 수 있다"며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떠났다는 사실은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바그너 그룹이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이 아닌, 북쪽에서 곧바로 키예프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벨로루시와의 국경은 안정적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바그너 그룹의 캠프가 건설되고 있다는 벨라루스의 모길료프(표시). 왼쪽이 수도 민스크, 모길료프에서 남쪽으로 고멜을 지나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바로 고속도로가 이어진다. 오른쪽은 러시아 브랸스크주다./얀덱스 지도 캡처
벨라루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도 '바그너 그룹'의 주둔 가능성에 우려를 표명하고 국경 수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트라나.ua는 "바그너 용병들의 벨라루스 이동에 대한 정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며 "그들의 존재는 우크라이나군이 병력 일부를 동부 전선에서 벨라루스 국경으로 옮기게 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벨라루스에는 이미 러시아군이 벨라루스와의 군사 연합훈련 등을 위해 배치된 바 있다.
바그너 그룹의 벨라루스 주둔이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의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군사 반란을 시도한 바그너 그룹이 푸틴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반역자' 혹은 '배신자'로 찍힌 이상, 벨라루스에서도 프리고진이 과거의 조직으로 부활시키는 게 극히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벨라루스로 떠나지 않고 러시아에 남은 용병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는 러시아 국방부와 계약후, 자체적으로 군사 조직을 운용할 수는 있지만, 과거 조직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전망이다. 또 일부는 무기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막강한 군사 용병 조직으로 존재하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때 점령했던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철수하기 전 바그너 그룹 용병들의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다만, 군장성 출신으로 시리아전 참전 경험을 지닌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바그너 전사들은 명령을 따른 것일 뿐 잘못한 게 없다”고 옹호하면서 "의회에서 바그너 그룹의 법적 지위를 어떻게 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바그너 그룹을 해산하는 것은 나토(NATO)와 우크라이나에만 좋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도 "러시아 국방부가 바그너 그룹의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며 “프리고진이 주도했던 독립적 군사 조직으로서의 바그너 그룹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와는 다른 조짐도 있다. 러시아의 몇몇 도시에서 바그너 그룹 사무실이 다시 문을 열고 용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26일 전해졌다. "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바그너 그룹의 앞날을 점치기에는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 프리고진의 운명은?
바그너 용병들의 선택이 달려 있다. 휘하의 많은 전사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면 프리고진은 '망명지' 벨라루스에서 재기를 모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관측한다.
세계적인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의 이안 브레머 회장은 25일 프리고진을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 모습)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는 "그가 몇 달 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면 매우 놀랄 것”이라고도 했다. 프리고진이 머물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도 반체제 인사를 가혹하게 탄압해온 인물이다.
로스토프나도누의 군사령부를 장악한 뒤 성명을 발표하는 프리고진/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이 의견에 동의한다. CNN 지국장을 지낸 러시아 전문가 질 도어티는 “푸틴 대통령은 반역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며 “프리고진의 벨라루스행을 허락했더라도, 프리고진은 여전히 반역자”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서방으로 망명한 미하일 카시야노프 전 러시아 총리는 BBC에 “프리고진이 처음에는 벨라루스로 가겠지만,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정글 같은 곳에 있게 될 것”이라며 “푸틴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말리 등 아프리카 곳곳에는 바그너 그룹이 주둔하고 있다. 현지의 정정 불안을 틈타 내전이나 정권의 반대 세력 탄압에 개입하기 위해서다.
스트라나.ua도 이미 지난 11일 비슷한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권력(크렘린)으로부터 '팽(烹)당한' 프리고진에게는 선택지가 3개 남았다며 △국방부와 계약하거나 △아프리카로 근거지 이전 △우크라이나 접경지역 방어 혹은 군사반란을 제시했다. 국방부와 계약을 포기하고 군사 반란을 일으킨 프리고진에게 남은 선택지는 아프리카다.
독일의 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도 "벨라루스로 망명한다고 해서 프리고진의 목숨이 안전하지 않다"며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내에서도 배후에 있는 배신자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푸틴과 엘리트층이 하루 동안 경험한 (체제 붕괴) 공포 때문에 프리고진에 대한 (암살) 명령은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러시아에서는 프리고진에 대한 형사입건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 등은 26일 소식통들을 인용,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프리고진의 무장반란 혐의 관련 수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관련 수사 취소 결정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푸틴 대통령이 26일 공권력 집행기관 수장과의 심야 회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프리고진의 마지막 발언이 자신의 운명을 더욱 앞당길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군사 반란 중단 이후 처음으로 낸 11분짜리 음성메시지에서 군사 반란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의 기미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군사 반란 중에 바그너 그룹이 러시아군이 특수 군사작전(2022년 2월 24일) 개시 이후 우크라이나로 진격한 거리보다 더 멀리까지 이동했다고 자랑하면서 러시아 국방부에 대한 비난을 반복했다.
다만, 그는 "피를 흘리지 않도록 벨로루시로 오라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말했으나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바그너 그룹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벨로루시의 반체제 언론은 26일 프리고진이 이미 민스크로 이사했으며 '그린 시티 호텔'에서 목격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 사진이나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상원 정보위원장 마크 워너 의원은 26일 MSNBC와의 회견에서 "내가 아는 한 프리고진은 이미 민스크에 있다"고 주장했다. 프리고진이 실제로 민스크로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갔고, 바그너 전사들도 기존의 캠프로 귀환했다가 벨로루시로 간다면,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과 그의 세력을 제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전망했다. 특히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에서도 계속 반러시아적 선동을 계속한다면, 그 시기가 빨라질 것으로 봤다. 그걸 묵인한다면 푸틴 체제의 또다른 약점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크라전쟁에 미칠 영향은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6월 초 부대 재정비를 이유로 바흐무트에서 철수했다. 바그너 그룹은 군사 반란 전까지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맞서 방어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26일 자세를 낮춰 사회 각 계층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명한 것도 군내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 북부 국경(벨라루스 접경)에 배치된 우크라이나군 탱크/사진출처:우크라이나 합참
당초 우크라이나는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 소식에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하루 만에 사태가 종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특수 군사작전 내내 (크렘린의 지지를 받는) '바그너 그룹'의 존재로 혼란을 겪었던 러시아군의 '이중 지휘 체계'는 프리고진의 퇴진과 함께 끝날 게 분명하다. 쇼이구 국방장관-게라시모프 총참모장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군 지휘체계가 특수 군사작전 전반을 통제할 것이다. 프리고진이 그같은 일사분란한 지휘 체제를 계속 흔들어주기를 희망해온 키예프(키이우)와 서방의 기대는 이제 물건너갔다고 할 수 있다.
또 군사 반란이 우크라이나 반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없던 일이 됐다. 미 CNN은 프리고진의 반란은 지난 몇 개월간 반격을 준비해온 우크라이나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희망'으로 끝났다. 빌 테일러 전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는 BBC에 "우크라이나군은 바그너 그룹의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드러난 러시아의 전술적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지만, 머쓱해졌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이 군사 반란 와중에 반격에 나서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 방어 진지가 크게 흔들린 조짐은 아직 없다.
주목을 끈 것은 스트라나.ua의 분석이다. 이 매체는 25일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내전과 같은 모습으로 러시아의 국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이는 가능하면 특수 군사작전을 어느 정도 선(예를 들면, 한국전쟁 시나리오)에서 끝내는 것이 맞다고 믿는 러시아측 인사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