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밑에 서서
김진경
1
아침 숲이 이슬에 젖고, 오디 열매 까맣게 눈뜨는 숲속 길 멧새가 운다. 키가 웃자란 잡초를 헤치며 걷노라면 아침 노동이 시작되는 밤나무 밑에 다다르고, 나는 한낮에 분주한 햇빛의 노동을 생각한다. 벌들은 햇살 하나하나의 정령들처럼 투명한 날개를 빠르게 움직이며 꿀을 빨고, 이 숲의 한낮을 움직이는 심장처럼 밤나무는 온통 벌떼에 싸여 웅웅거린다. 벌들이 빠는 꿀처럼 달콤한 것이 은밀히 숲의 대기 속으로 번져간다. 나는 알고 있다. 수많은 세대가 좀 더 무거운 흙의 혼처럼 햇볕 아래 땀흘리다 한낮 밤나무의 웅웅대는 힘 속으로 돌아갔음을. 그러기에 저 벌들은 가볍고 투명한 햇빛의 정령만은 아니다. 숲길은 밤나무를 지나 뻗어 있고, 누군가 웃자란 풀들의 이슬을 털며 숲의 더 깊이로 들어간 자취가 보인다.
2
누가 이 숲의 깊이로 들어갔을까. 도시의 병원 영안실, 우리는 쓰디쓴 숨을 마시며 흔히 이 밤나무를 꿈꾸곤 했다. 이 밤나무의 시간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나와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헛되이 위로를 구하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알맹이를 빼먹고 버리는 포도껍질처럼 죽어가고 거기에 아무런 위안도 없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개종하고, 남은 자들은 어리둥절한 예배를 보리라. 누가 이 숲의 깊이로 들어갔을까. 이슬이 털린 풀잎들이 반짝임을 잃은 채 더 선명하게 푸르고, 멀리 밟혔다 일어서는 풀잎들이 오래 사람들이 가지 않은 이 길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어리둥절한 예배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이것은 분명 유혹이리라, 굽어진 숲길의 끝에서 방금 누가 스치고 간 듯 풀잎이 이슬을 털며 흔들리고 멧새가 나른하게 울고 있을 때.
3
그러나, 이 숲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저 햇살의 끝에서 웅웅대는 벌들마저 투명한 햇빛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흙에 떨어져 벌레에 뜯기며 스러지고 작은 풀잎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서둘지 않아도 오리라. 누가 저 숲길을 걸어갔을까. 더 가까이에서 그대 목말라하고 백골을 누인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밤나무가지 사이로 대답해야 할 질문처럼 아스팔트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가야할 뜨거운 길들 위에서 누군가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듯 깃발처럼 개망초꽃을 흔들어댄다.
정오의 햇빛 끝마다 들러붙은 벌들의 날갯짓으로 밤나무는 숲의 심장처럼 웅웅거리고, 고요한 숲길의 끝에서 멧새가 나른하게 운다. 벌들이 빠는 꿀처럼 달콤한 것이 은밀히 숲을 감싼다. 그러나, 나는 숲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리라.
© ryan_hutton_,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