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9. 큐티
마가복음 15:16 ~ 22
희롱당하시고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에 이르다
관찰 :
1) 희롱당하시는 예수님
- 16절.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 “브라이도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서 유래한 헬라어로, ‘장군의 본부(거주지)’를 말한다. 이 단어는 원래, 로마의 야전 사령관이 있는 사령부나 막사를 가리켰으나 후에 지방 관리의 관사나 저택, 별장, 총독의 관저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총독 빌라도의 관저를 가리킨다. 성전 뜰의 북편 안토니아 탑이 있던 곳에 위치했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다. 한편 가이사랴에도 총독의 관저가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헤롯 대왕이 자신을 위해 세운 궁전이었으나 헤롯 대왕 사후 로마 총독의 관저와 로마 군의 병영으로 이용되었다. 사도 바울이 이곳의 감옥에 감금되었고 이 관저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라이프성경사전에서 인용].
– 십자가 형이 확정되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으로 가서 온 군인들을 다 모았다. 대략 2 ~ 300여명의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조직적으로 괴롭힐 의도를 가지고 모든 부대원들을 다 소집한 것이다.
- 17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 군인들은 허락이 되었기에 마음껏 자신들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시로 면류관을 짜서 예수님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가시로 된 면류관은 그 가시들이 밖으로만 뻗친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도 뻗어있다. 그것이 머리 속으로 집어 넣어짐으로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 고통이 배가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때부터 머리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게 되셨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왕이 사용하는 색깔인 자색 옷을 입혀서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었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군병들의 이러한 조롱에 대해서 분명히 항의했어야 옳은 상황이었다.
- 18절.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 로마 군병들은 잔인하고, 또 교활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예수님을 손으로 때리고 있다. 심지어는 수염을 뜯어내기도 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롱의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 수난을 당하고만 계셨다. 얼마든지 그 모든 상황을 확 뒤집으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이 모든 수난 속에서 그 고난을 감당하기로 하셨고, 그 인내할 힘을 공급받으셨던 것이다.
- 19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 이들은 마땅히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게 조롱하며 경배했으나 그들이 조롱하는 바로 그분을 이들이 온 맘과 힘과 정성을 다해 경배해야 하는 그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완전히 조롱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
- 20절.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 예수님은 이미 채찍질과 가시면류관으로 온 몸이 피칠을 한 상황이셨다. 그러한 예수님을 이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과 같은 취급을 하면서 괴롭히고 있다. 죄인들이 최고의 의인을 이렇듯 벌거벗기우고 폭력을 행사하고 자시들 마음대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기진하여 자신이 매달려야 하는 나무를 끌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갈 기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2)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에 오르다
-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고 가는 이 사람을 자세히 설명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레네는 현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왜 이렇게 자식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장황하게 자세히 설명했을까? 또 마가 뿐만이 아니라 누가 역시 놓치지 않고 이 기록을 왜 남겼을까? 그가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고 그 이후에 잊혀진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렉산더와 루포는 이후에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라게 된다.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루포의 어머니는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였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루포는 속사도로서 교회의 교부로 자라게 된 다. 만일 그 아비 시몬이 본 예수가 죄수에 불과한 인물이었다면 그렇게 자녀들을 키웠을리가 만무하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가 대신 져 준 십자가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메시야이심을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오늘 본문의 이 모든 사정을 보았고 알았던 사람이다. 그가 십자가 상에서 강도들과 더불어 참혹하게 죽어간 예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인으로서, 그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옮긴 산 증인으로서 예수를 믿고 그 자식들을 주님의 종으로 키웠다는 것이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할 것이다. 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알렉산더와 루포를 주님의 사람으로 키워낸 것이다.
-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 예수님을 빌라도의 손에서 넘겨받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곳인 골고다 처형장으로 곧바로 데리고 갔다. 이것은 지나치게 빠른 처리였다. 조그만 변론의 가능성도 주지 않고, 즉결 재판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가르침 :
1)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조롱한다. 군병들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희롱한다. 이들의 목적은 모욕을 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분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헤롯을 분봉왕으로 인정하는 정도로 예수님을 인정하여야 할 분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요 모든 민족의 왕으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하는 분이셨다. 조롱과 희롱의 목적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었던 상황. 이 어긋나는 상황을 통하여 주님은 스스로를 자증하신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조롱할지라도 예수님이 왕되심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폄하한다고 해서 그 진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편협하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참 진리성을 증명하는 진리의 유일성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대인의 왕이요 모든 민족의 왕이신 분이시다.
2) 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동참했다는 이유로 매우 큰 영적 유익을 누리게 되었다. 시몬은 사형수를 도와주었다. 그저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사형집행을 도와주게 된 사람을 살펴보았고, 그가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짊어진 나무에 매달려 그렇게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이 사흘 뒤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 소식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천청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사형집행을 도와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 것을 분명히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구레네 사람 시몬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안드레와 베드로의 선교 여행에 동참하여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그의 아내와 두 자녀가 초대교회를 위한 귀하고 귀한 종이 된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를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어진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에게도 주님은 그 은혜를 부으신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를 주님은 만홀히 여기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적용 :
1)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거림을 오히려 증거로 만들어 버리시는 역설을 이루시는 주님의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내 삶이 부족하고 어려워도 주님을 따름으로 비난과 조롱이 오히려 역설이 됨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주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될 때 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 피곤하고 힘든 것일지라도 주님의 은혜의 통로이며,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십자가의 길, 그 고난의 길, 그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 복이 있는 것이다. 내가 죽고자 하는 그 길을 걷는 것이 내게 진정한 은혜이고 기쁨임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죽어야 골고다고 나아가는 것이고, 내가 죽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진정한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3) 복음은 공짜로 받는 것이지만, 복음을 소유한 존재로 사는 것은 댓가를 치러야 한다. 목사가 되었다고, 선교사가 되었다고 그 댓가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합당한 댓가를 치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구레네 사람 시몬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 역시 짊어 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