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 (요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장을 앞에서부터 읽어야 하는데 다 읽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여기 겨자씨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행3:16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로 난 믿음이란 상대적으로 인간에게서 난 믿음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인지 신념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잘못된 믿음을 고쳐주시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두 사건은 하나의 교훈을 위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즉 죽은 믿음이 아니라 생동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으로 고침을 받아야 할까요?
1. 아는 믿음보다 믿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21-22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마르다의 고백 중 잘못한 말이 있는데 ‘아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아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귀신들도 알고 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당시 서기관들도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께 달려가지 않았고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고 행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2. 나중 믿음보다 현재의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23절 보면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대답했습니다. 조금 전에 ‘이제라도’라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시니까 그 순간 ‘이제라도’라는 고백은 어디로 가고 ‘마지막 날 부활에는’이라고 바꿔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하신 말씀 다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고 미래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나중에 믿겠다는 것은 안 믿겠다는 말과 같고, 현재 없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차차 마귀가 가장 교활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잘해야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계1:4에 하나님을 소개할 때도 “이제도 계시고”라는 말씀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잘하십시다. 그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3. 교리적인 믿음보다 진실한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질문에 마르다는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대답합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베드로보다 더 일찍 신앙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부활을 믿느냐?” 하신 질문에 “예!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라고 교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교리도 중요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요약하고 총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가 잘못되면 이단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교리에 머물러 있다면 죽은 것입니다.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과 성령으로 죄에서 벗어나 변화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구원과 함께 온갖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지신 예수를 믿어 영접하고 사랑하고 교제하고 순종하고 경배함으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간단한 원리를 모르고 방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4. 환경적인 믿음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마르다와 대화를 그만 두시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왜 돌문을 옮기라 하셨을까요? 인간의 작은 믿음이라도 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무덤 열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나니 안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은 보지 않고 형편만 보았습니다. 안 됩니다. 못합니다. 이것만큼 답답한 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믿음을 고쳐주시기 위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책망하셨습니다.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 없을 때 누군가 이렇게 책망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책망은 은혜입니다. 그러자 누군가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믿는다면 최소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해야 믿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큰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어떤 분이 신앙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신앙은 가뭄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기도회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지 않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의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바람이 없어서 상륙하지 못하자 선장이 테일러에게 바람 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테일러가 “선장님! 돛을 세우면 바람 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난처한 듯 “선교사님! 남들이 조롱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겠습니다.” 이런 불신의 생각은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은 지 나흘 된 시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에 죄악과 부패로 가득하다면 역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구원도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르다의 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복된 삶을 살아가는 가장 귀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