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건강할 때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마냥 건강한 줄만 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과욕을 부리며 몸의 기운을 소진하기도 한다. 몸이 아파봐야 비로소 자기 몸이 소중함을 알고 아낀다. 자기 몸의 혹사도 자기를 돌보지 않는 죄라고 한다.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몸에 이상이 왔다. 몇 년 동안 앓지 않던 감기가 찾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나이는 잊고 몸을 혹사했는가 보다. 성인봉 다녀와서 푹 쉬어야 하는데 오후 일정을 다 소화했더니 30,000보를 넘겼다. 또 주말에 순교 성지 순례를 다녀왔으니 무리인 듯 반동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라며 ‘감기’ 신호를 보낸 듯하다.
며칠째 아침 운동을 접고 쉬고 있다. 그 덕분에 무료한 시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고 있다. 나는 김훈의 소설을 좋아한다. <하얼빈>, <공터에서>를 읽었다. 문체가 간결하면서 명료하여 다음 내용이 궁금한지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전에 읽었던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을 소재로 한 <흑산>,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칼의 노래> 등이 생각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움 없이 생활할 때는 그 신앙의 주체를 잊고 산다. 또 평화로울 때는 일이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줄로 안다. 그러나 어려움이나 고통의 시련이 닥치면 그제야 자기 신앙의 주체를 찾으며 도움을 청한다. 마치 神을 자기 삶의 수단인 양 부린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언제 하는가? 평화로울 때보다 어려울 때 도와 달라고 매달린다. 기도는 언제 효험을 발휘할까? 몸이 아파 약을 먹는다고 근방 낫지 않는 것처럼 기도한다고 근방 해결되지 않는다. 신이 보실 때 필요할 때 처방을 내리신다. 건강할 때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신께서 나에게 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루이 에블리는 “기도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평소에 자기 내면의 소리(성령, 양심)에 귀 기울이며 들어야 한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가 하려는 일, 고민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들려오기도 한다. 일상에서 우리의 삶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한 그분께서 하는 것이리라.
고대로부터 인간이 오래 살려고 노력했지만, 신만이 가능하며 인간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철학자 니체는 운명관에서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라고 했다.(아모르 파티) 그러면서 사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함을 대수롭지 않은 고뿔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