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족의 혼혈 백인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 캐머런 디아즈, 케빈 코스트너, 쿠엔틴 타란티노, 척 노리스, 밥 로스, 버트 레이놀즈 등 대단한 수의 사람들이 백인 사회에 진출하여 맹활약을 하고 있다.
체로키족은 오늘날 미국에 남아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민족 중 가장 큰 민족이다. 인구수 총 32만 명. 미국 중남부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체로키어를 사용한다.
테네시 동부지역과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서 살았다. 원래 오대호 주변에 살았으나 델라웨어족과 이로쿼이족에게 패한 후 남쪽으로 이주했다. 1650년에는 약 22,500 명의 인구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10만 ㎢에 이르는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추장도 전쟁추장, 평화추장으로 따로 뽑았다.
18세기에는 영국과의 교류와 교역, 군사 협력으로 번성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영국 편을 들기도 했다.
당시 원주민 부족들 가운데 플로리다의 세미놀 족과 함께 가장 서구인들 눈에 '문명화'된 부족이었으며 기술 문물의 도입과 발전된 농경기술, 삼권분립 된 정부체계, 그리고 고유의 문자 체계 등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심지어 신문과 흑인 노예제도도 갖추고 있었다. 무려 100명 이상의 노예를 갖춘 집안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3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체로키족은 사법 대상이 아니다.“
라면서 미시시피 강 동쪽으로 확장하려는 조지아 주에 부정적인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 의해서 파괴 작업이 강행되었다.
결국 오클라호마 주로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모든 근거지를 잃고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극소수로 체로키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던 백인이 바로 《즐거운 나의 집》 작사자로 유명한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이 있는데 미 의회에 잭슨에 대한 탄핵안까지 청원하며 잭슨을 비난하고 강제 이주를 막으려고 했으나 끝내 막지 못했다.
조국에 대하여 실망한 페인은 미국을 떠나 살아 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죽기 직전에 시체나마 나중에라도 조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겨 30년 넘게 지나서야 시신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뒤인 1866년 미국 중앙정부와 체로키족이 맺은 협약에 따라 체로키의 흑인 노예가 해방됐다.
해방 흑인 외에 당시 체로키족과 결혼해서 살던 자유 흑인도 있었다. 모두 합해 대략 1천 명쯤 됐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대부분 준자치정부인 체로키민국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오늘날에도 체로키 자치정부가 존재하며 미 연방 정부도 체로키 정부의 주권, 자치권을 존중하고 있고 제대로 된 정부가 있는 만큼 가장 제도나 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미국의 원주민 부족들 중에서는 가장 잘 살고 있다.
2011년 체로키 부족정부는 주민투표에서 76%의 찬성으로 흑인들의 부족원 자격을 박탈했는데 2010년 체로키 부족연방재판소가 흑인들의 부족원 자격을 인정한 것을 다수의 힘으로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