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0
6월23일[연중 제1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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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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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dzd2NMLTGA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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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좋은 동반자는 좋은 동반을 받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돈보스코의 영적 동반자이자,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의 공동 창립자인 성 요셉 카파소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돈보스코는 1841년 6월 15일 26세의 나이로 사제가 됩니다. 당시 토리노 교구는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습니다. 인사 적체 현상이 심각해서, 많은 사제들일 사목터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보스코는 젊은 시절부터 다방면에 걸쳐 탁월했던 관계로 여러 곳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명문가 가정 교사, 본당 전속 사제 등.
그때 돈보스코가 취한 태도를 보면 특별합니다. 자신의 영적 동반자 요셉 카파소 신부님을 찾아갑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지금 교도소 재소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카파소 신부는 돈보스코에게 지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좀 더 공부를 하자고 초대합니다. 당시 신학교 커리큘럼이 꽤 빈약했기 때문에, 사제학교가 따로 있었는데, 거기서 3년간 좀 더 배우도록 안내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카파소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소년원으로, 교도소로 안내를 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거기서 대도시 토리노 뒷골목의 실상을 낯낯이 보게 되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중대한 결정을 하기 전에 항상 자신의 영적 동반자 카파소 신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노인이 된 돈보스코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있습니다.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한 것이 있다면 모두 카파소 신부님의 동반 덕분입니다.”
카파소 신부님의 시복시성 조사 자료에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카파소 신부는 돈보스코가 설립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의 공동 창립자요 아버지, 최초 협력자였다.”
다음은 카파소 신부의 유언입니다. “나는 요한 보스코에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지와 건물, 그리고 5천 리라를 유증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게 되면 그가 내게 지고 있는 모든 빚을 탕감한다.”
기록에 따르면 돈보스코는 수많은 아이들을 동반하느라 항상 경제난에 시달렸습니다것 내일 아침 아이들에게 먹일 빵도 걱정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돈보스코는 카파소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저명인사였던 카파소 신부는 경제 상황이 좋았었는데, 틈만 나면 뭉텅이 돈을 돈보스코에게 쥐어주곤 했습니다. 갚지는 않고, 계속 빚을 진 것입니다. 이렇게 카파소 신부님은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 돈보스코를 영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인 도움까지 지원하면서 동반한 결과 위대한 여정을 걸어가도록 적극 후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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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눈은 언제 반짝이는가?>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김연아는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있다.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지라도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된다. 이런 가운데 그녀의 좌우명 또한 화제다. 말인즉 “이 또한 지나가리라!”
본래 이 말은 유대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의 ‘다윗왕의 반지’에서 나왔다. 다윗왕이 어느 날 궁중의 세공인을 불러 명했다.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
이에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때 왕자가 일러준 글귀인즉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승리에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다윗왕이 자신의 반지에 새겨 넣고 몸에 지녔다는 이 말을 좌우명 삼아 김연아는 그 모진 훈련을 견뎌내고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 세계 정상에 올랐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받은 그 모든 황홀한 찬사도 순간 덧없이 지나가리라는 것을 지혜로운 그녀는 알아야만 한다.
결국 권력도 명예도 부도 사랑도, 실패와 치욕과 가난과 증오도 모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실 이것은 비단 김연아만의 좌우명이 아니다.
골프여제 박세리도, 메이저리거 박찬호도 이 말을 되뇌며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아갔다. 하지만 이 말이 운동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삶의 신맛, 짠맛, 쓴맛, 단맛을 다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깨닫고 가슴과 뇌리에 이렇게 새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상한 것은 그렇게 한 분야에서 대단한 성적을 거둔 이들이 또한 그것에서 오는 영광과 절망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는 하찮은 것을 위해 왜 그렇게 고생을 할까요? 그만큼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그만큼 중요하다면 왜 이 또한 지나가는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여길까요? 그들은 어쩌면 이 또한 지나갈 허무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눈의 동공은 빛의 변화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합니다. 그런데 동공은 망막에 닿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 외에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라고 하는 것처럼 동공은 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즉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동공을 팽창시킵니다.
어떤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구매자가 상품을 구입하고 싶어 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잠재적으로 구매자의 눈동자를 보기도 합니다.
이는 고객들이 무의식적으로 동공을 팽창시켜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수세기 동안 상인들이 얼마나 비싼 값을 고객에게 불러야 할지를 판단할 때, 마술가가 우리가 뽑아든 카드를 알아맞힐 때, 사기꾼이 우리가 속을 것인지 아닌지 알아내려 할 때 그 답을 눈에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볼 때 동공이 더 커지고 불쾌하게 하는 것을 볼 때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중세 이후로 여성들이 아름답게 보이려고 동궁을 억지로 팽창시키는 ‘벨라돈나(belladonna)’란 액을 주입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볼 때 눈이 팽창되어 있으면 남자도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은 것으로 알고 그 여자에 대한 호감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둡다는 하십니다. 그렇다면 눈은 항상 밝고 빛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매 순간이 흥미로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 세상의 것들에 흥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일까요?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버리는 무상한 것들이고 오히려 우리가 집착하게 만들어 고통만 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매일 보는 이 세상의 지푸라기들 때문에 눈이 반짝거릴 수 있을까요? 그 대답도 오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시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보물은 이 세상에서만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선을 한다든지, 멸시를 참아 내서 희생으로 바친다든지,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등을 통해서만 하늘에 재물을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이 영원한 재물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눈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을 얻지 못하면 다시 삶의 흥미를 잃기 때문에 대부분의 순간을 무기력하고 흐리멍덩한 동태의 눈같이 지내게 됩니다.
반대로 영원한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지나가더라도 이 순간이 영원히 남게 됨을 알기에 매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니 항상 눈에 동공이 열려있고 빛이 나며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항상 눈에서 빛이 나기 위해서는 매 순간이 영원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은 또한 기쁨과 절망에 심취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매 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 순간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의 눈은 빛을 냅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이 흥미롭다면 그것이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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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예전에 가톨릭의 강점은 ’질서‘이고,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은 ’자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가톨릭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있어서 같은 가르침과 같은 교리를 세계의 모든 교회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미사의 순서도 모든 교회가 같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미사의 내용도 세계의 모든 교회가 동일합니다. 매일 세계의 모든 교회는 같은 말씀의 식탁에서 성찬의 전례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대의 징표에 따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지역교회의 어려움을 보편교회의 이름으로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두 한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성소의 부족으로 성직자가 부족한 미국과 유럽의 교회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성직자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전례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사제생활을 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신학, 교리, 전례는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시작한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엄격한 교리와 교계제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전례도 거부하였습니다. 인문학의 토대가 되었던 르네상스와 자본주의 토대가 되었던 산업혁명은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만나서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시급한 현안과 지역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기에 다양한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 신학, 아프리카 신학, 민중 신학, 정치 신학, 여성 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목회자의 자질과 능력만으로 단일 교회를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로 성장 시킬 수도 있습니다. ‘여성 사제, 여성 주교, 사제의 결혼’과 같은 제도를 필요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도입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법에 얽매이지 않기에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기에 소신껏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의 강점과 프로테스탄트의 강점이 평행선과 같아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톨릭의 강점도, 프로테스탄트의 강점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유대인의 율법과 계명도 자신의 강점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통 바리사이파라고 자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유대인들에게 받았던 수난과 고통도 자신의 강점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톨릭의 강점도, 프로테스탄트의 강점도 모두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제게도 ‘강점’이 있고, 넘쳐나지만 제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 규칙적인 생활, 미리 준비하는 습관은 사제생활의 강점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 틀에 박힌 생활, 조급한 마음은 저의 약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강점은 드러내고, 저의 약점은 보완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이미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봉헌해야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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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침에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물을 흠뻑 받은 채소들이 활짝 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매님 한분이 길을 가다가 제게 인사하였습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자매님이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이유는 저의 강복을 아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잠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매님과 아들을 위해서 강복을 드렸습니다. 자매님과 대화하면서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집에 있는 하인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에게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게는 부하들이 있습니다. 부하들은 제가 명령하면 잘 따릅니다. 그러니 굳이 저희 집까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저의 종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나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이 곧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백인대장의 하인은 병은 치유되었습니다. 자매님의 간절함에 저의 강복이 더해져서 아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간절함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간절함을 보셨고, 딸의 병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간절함을 보셨고, 병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귀하게 보셨고, 다른 이들의 봉헌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귀하게 보셨고, 하느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아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보면 산이 보이고, 구름을 보면 구름이 보입니다. 꽃을 보면 꽃이 보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보는 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탐욕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탐욕 덩어리입니다. 시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시기 덩어리입니다. 분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분노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희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믿음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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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9-23: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 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재물은 좋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재물의 주인이 되어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에 마음을 쓰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게 되면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 하느님보다 그 재물이 우선하고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 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하늘은 주님의 하늘”(시편 115,16)에 나오는 하늘이다.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물로 삼아야 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영적인 하늘이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노바즈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두 흩어 버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았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다.”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이 일시적으로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우리가 관리하는 것임을 알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재능이나 사상 관념까지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나에게 허락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떠날 때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고 간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 라고 하신다. 눈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킨다. 눈이 어두워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우리의 삶은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하듯이 늘 건전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분별력이 무너지면 모든 행위가 뒤죽박죽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 하신다.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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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강조하는 ‘허무함’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세속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처럼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만 추구하는 인생도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라는 말씀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는 생명의 ‘영원함’과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는 말씀은, 무엇을 희망하고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영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도 있고,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보물’에 관한 말씀을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신 것과 같은 비유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 속의 부자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모아 둔 재물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또 먹고 마시며 즐기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은 ‘하느님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하느님을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는’ 도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부자가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자기가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시간 동안 회개하지는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만 한다면, 그는 그냥 허무하게 끝나게 될 것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 16,19-24)
부자가 라자로의 고통을 외면하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아 둔 일입니다. 그랬다가 저승에서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가 된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그 부자가 자기의 재물로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던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주신 ‘기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버렸습니다. 따라서 부자가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은 ‘마음’으로, ‘몸’은 전 인격, 또는 인생으로, ‘등불’은 가치관, 또는 인생관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앞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는 말씀에 연결하면, 이 말씀도 무엇을 희망하고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는 말씀은,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즉 ‘허무한 것’과 ‘영원한 것’을 혼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바라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과 하느님 나라에서 얻는 생명의 영원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만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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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지금껏 사도직을 수행하며 겪어야 하였던 온갖 고초와 시련의 역사를 낱낱이 나열합니다. 그는 옥살이도 많이 하였고, 서른아홉 대의 매를 유다인들에게 무려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채찍질은 물론 스테파노처럼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파선을 당하여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고, 광야의 맹수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동족과 이민족의 시기와 질투 속에 늘 위태롭게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늘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에게 선교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좋을 것도 부러울 것도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수고로운 사업에 바오로 사도가 그토록 열성적이었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하여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영속성이 없는 불안한 재물이지만,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누가 망가뜨리지도 못하고 훔쳐 갈 수도 없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 곧 선행과 희생, 그리고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과 노력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영속성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하늘에 보물을 쌓은 대표 인물입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을 향하였기에, 땅에서 겪어야 하였던 온갖 고초와 위험도 참아 내고 기뻐할 줄 알았으며, 구원 소식을 전하는 험난한 길에 늘 앞장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고, 우리의 보물 쌓기는 어디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불안한 재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노력보다는, 영원히 축나지 않는 진정한 재물을 하늘에 쌓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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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고 일반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십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사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본성에 속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얻고, 얻은 재산을 지키고 늘리려고 마음을 쓰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좀과 녹이 값비싼 옷과 가구들을 못 쓰게 만들 수도 있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서 아끼던 것을 훔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온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의 봉헌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올바르게 쓰는 재물이며, 또 하느님께 직접 봉헌하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결국 그 모든 가르침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재물을 쌓고 늘리는 데 집착해 있으면, 어느 한순간 재물과 함께 마음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재물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에도 자유롭고, 하늘에 쌓아 둔 재물은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눈에 대한 것으로 옮겨 갑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의미도, 눈이 마음의 등불이며, 그 사람의 모든 마음은 눈을 통하여 반영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이 세속적인 재물에만 쏠려 있다면, 우리는 결국 영적인 소경이 되어, 어둠 속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늘에 쌓은 재물을 바라본다면, 우리 마음이 자유롭고 밝을뿐더러, 이 세상 모든 것이 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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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목 생활 중에도, 이집트 종살이 시절에도,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 땅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구약에서 땅은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풍요와 안정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역사와 신앙을 담고 있는 보이는 터전이었던 땅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머무시고 마련하여 주신 자리, 곧 하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땅은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은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하늘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생각은 우리를 구약의 세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으며, 아무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시민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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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주님께 두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보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보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이 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바다에 두면 바다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선한 곳에 두면 선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성한 눈은 맑은 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학부모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가 입시를 준비하면, 성당에 가는 것은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최고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고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최고이십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 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보물이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7-8)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기려 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낮아지는 곳에서는 협력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특별히 열 두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뽑힌 이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멸시 받던 세리 마태오, 혁명당원 시몬,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베풀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능력을 드러냈을 때, 트집을 잡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소신 있게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시작한 일이 선하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모든 멍에와 짐을 예수님께 돌려드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께로,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께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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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칭 미식가라고 말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자주 맛집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와 이야기하는데, 전에 함께 있었던 식복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음식 솜씨가 끝내줬다고 하더군요. 조미료를 쓰지 않는데도 정말 맛있었다면서, 다시 본당신부가 되면 이 자매님을 부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우연히 식복사를 하셨던 자매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식가 신부님께서 홀딱 반할 정도의 음식 만드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 그 비결을 듣는 순간, 저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미료죠. 조미료 쓰지 않고 어떻게 맛있게 음식을 하겠어요? 신부님께서 스스로 미식가라고 하시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신부는 미식가일까요? 사실 미식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식복사 자매님에 대해 좋게 보셨고, 그런 이유로 음식도 아주 맛있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 봐도 맛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가게 곳곳에 손님을 위한 배려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배려가 손님을 끌었던 것이고, 입맛도 좌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맛보다는 배려 가득한 사랑에 우리는 단골이 되곤 합니다. 사랑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중독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을까요? 맞습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주님께 집중하면서 그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의 가정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가난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의 봉헌물이었던 비둘기를 봉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난 속에서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가난이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가정은 행복한 가난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따를까?’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부가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노예가 되고, 마음을 빼앗긴다면 큰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어야 주님께 중독되면서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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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품에 벗을 모시겠어요>
마태오 6,19-23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눈은 몸의 등불)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느님 품에 벗을 모시겠어요>
사랑하는 벗이여
나 그대를
다른 누구의 품도
내 품도 아닌
다만 하느님 품에
모시겠어요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아파하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그대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고마운 벗이여
그댄 나의 보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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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보물, 나의 자랑거리>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보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자랑거리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나의 보물은 무엇이고, 나의 자랑거리는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게 됐습니다.
먼저 보물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니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필요 차원에서 보면 단연 컴퓨터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이것을 저의 보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는 금 십자가와 금목걸이가 있습니다. 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에 주신 것인데 그것을 팔지 않고 간직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저의 보물이라고까지 생각지는 않습니다.
금목걸이는 제가 북한 일 할 때 어떤 자매님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주신 것이긴 하지만, 제게 준 것이 아니라
북한 일 할 때 팔아서 쓰라고 주신 겁니다.
거의 이십 년 전, 평양에 종합복지관인 <평화 봉사소>를 짓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하려고 표를 판매하였는데 그때 북한이 미사일을 쏴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새벽 묵상을 하고 있는데 눈 뜨자마자 음악회가 생각났고, 어떻게 하면 표를 팔 수 있을까, 누구에게 팔 수 있을까 거기에 골몰하고 있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수도자가 되어서 어찌 기도하지 않고 걱정하는지,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표 사주는 존재로만 보는지 그것이 너무 한심하였고 그래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는 마음을 내려놓았지요.
그런데 그날 오후 어떤 자매님이 자기를 밝히지 않고
당신의 결혼 패물인 금목걸이를 북한 일에 써달라고 하시며 보내오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욕심과 집착과 걱정을 내려놓고 수도자로 돌아가라고, 하느님께서 그 자매를 통해 깨우치시기 위해 보내신 거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매님의 소중한 것을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셈인데 당신의 소중한 것을 팔아 저의 수도 성소를 되찾게 하신 것이기에, 그것을 팔아서 돈 얼마를 북한 사업에 보태기보다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그것을 보면서 제가 올바로 마음을 잡기 위해서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제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나 보물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 새벽에 이런 생각을 하며 그러면 나의 보물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의 보물이어야 할까 생각해보니 순교자 라우렌시오가 생각났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황제가 교황 식스토 2세를 참형하고,
교회의 모든 보물을 바치라고 했을 때 교회의 재산관리를 하던 라우렌시오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황제에게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하였는데 제게도 마찬가지여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저의 자랑거리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은 그 수많은 고난을 열거하며, 그것을 견뎌낸 것을 자랑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약함과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아직 바오로 사도의 이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약함이 바로 저의 자랑거리여야 하고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저의 자랑거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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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눈은 마음의 등불, 부단한 온갖 사랑의 수행”-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얼마전 화기애애했던 만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반들과의 만남이, 특히 시를 좋아하는 분들과의 만남이 그러합니다. 옛 선비들이 시를 나누며 만났던 모임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대화는 물론 진솔한 느낌들을 시로 나눴습니다. 옛 선비들의 만남에 시는 필수였고 모두가 시인이었습니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율곡, 다산이 모두 불후의 시인들입니다. 며칠전 모임에서 모두가 공감했던 제 ‘환대’라는 시입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얼굴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들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이들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23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코스모스뿐 아니라 모든 꽃이 환대의 상징입니다. 무더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지금 주차장은 ‘상쾌한 기분’이라는 꽃말의 샛노란 금계국꽃들이 한창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영성과 쌍을 이루는 환대영성입니다. 환대를 통한 선교, 바로 정주수도회의 기본적 선교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선교라 칭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정주, 사랑의 환대, 사랑의 선교, 모든 수행 앞에는 ‘사랑’이 붙습니다. 바로 부단한 온갖 수행의 사람들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분들을 만나며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섬김의 삶을 사는 이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최고의 영원한 보물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저절로 끊임없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재미로 맛으로 기쁨으로 사니 바로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제 하루도 저는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났고 강복과 더불어 안아드리기도 했습니다. 마침 목요일마다 사랑의 주방봉사차 오는 자매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사는 분입니다. 반갑고 고마워 강복후 안아드린후 사진도 찍었고 덕담의 메시지와 함께 사진도 보내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미스 코리아 나가도 되겠습니다. 너무 멋지고 예쁩니다. 축하드리며 오늘 강론 선물합니다.”
강론쓰며 떠오르는 어제 면담성사를 봤던 분들이 모두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임을 뒤늦게 깨닫고 감동합니다. 어제도 남한산성 부근 자기 농장에서 일을 끝내고 수도원을 찾아 사랑의 물리치료 봉사를 해준 형제님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분임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물리치료 끝낸 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강복 후 안아드렸습니다. 그러니 집무실을 찾아 면담성사를 보는 분들이 저에게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보물같은 분들이라 여전히 나눠드리는 다음 시입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당신을 안는다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선물을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안 듯
당신을 안는다
당신은 이런 분이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이런 분들과의 상호포옹은 서로에게 위로와 구원이 되고 성화가 됩니다. 요즘 한 도반과의 주고 받는 인사는 “성화되십시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은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뜻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인지! 그대로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온갖 부단한 사랑의 수행의 사람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내적부요와 자유, 행복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자선과 선행은 물론이구요. 반면 자기 중심의 이기적 물욕과 탐욕의 사람들은 반대로 땅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이요, 결코 결코 마음의 허기를 채울 수 없으니 내적부요도 자유도, 행복도 요원합니다.
지혜로운 듯 하나 실상은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텅빈충만의 사랑이 아니라 텅빈허무의 무지의 삶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 복음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제가 매일 사랑의 강론을 써서 많은 분들과 나누는 일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아, 온갖 부단한 사랑의 실천을 통한 하늘에 쌓여진 보물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최고의 보물인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이들의 몸은 지상에 있지만 마음은 천상의 하느님을 향해 있고, 이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수행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복음에 이어 나오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복음도 참 적절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음따라 가는 눈이요 몸입니다. 마음이 순수로 맑으면 눈도 몸도 맑고 밝아지고 무지의 어둠도 사라져 심신이 영육이 환하고 건강합니다. 부단히 하늘에 쌓는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깨끗해지는 마음이요, 깨끗해진 마음은 더욱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투신하게 되니 날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참으로 심신이 영육이 맑고 밝은 환한 삶입니다. 꽃같은 사랑의 환대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파란만장한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최고의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예수님과 하나된 삶이기에 지칠줄 모르는 사랑이요, 이런 사랑에서 기인한 온갖 사랑의 고난들은 하늘에 쌓여지는 보물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가 사람처럼 말합니다만,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어지는 고난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면 관계로 인용하지 못하지만 이어지는 2코린 11,23-27절까지 읽어 보세요. 정말 불가사의, 초인적입니다. 어떻게이렇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된 삶이었기에 이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발적 사랑의 고난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사도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교회의 사랑에, 겸손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누가 약해 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려합니다.”
하늘의 참 보물인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그리스도의 일꾼, 바오로 사도였기에 이렇게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감동적 고백이겠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보물인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이 되어 부단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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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음의 눈!
오늘 복음(마태6,19-23)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는 말씀과 '눈의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19,20) 그리고 이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6,22)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쌓아둔다.' '보물을 저장해둔다.'는 것은, 현재보다는 '내일을 위한 행위'입니다. '내일도 걱정 없이 오늘처럼 잘 살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과 재물을 여기저기에 쌓아둡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눈을 들어 너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자선을 통해 하느님의 것,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립니다. 그것도 기쁘게 ㅎㅎ '이것이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오늘 독서(2코린11,18.21ㄷ-30)에서 이방인 지역에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성소의 길을 뚜뻑뚜뻑 걸어가는 모습이 또한 보물을 하늘에 쌓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게 묵상하고 보니, 그 원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눈이 맑아야 하고 눈이 성해야 합니다. 이는 마음의 눈인 영적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이 깨끗하고 맑아야 제대로 볼 수 있고,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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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ogdqhsD9Y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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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 20)
마음 속에
보물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마음이 곧
보물입니다.
마음의 길이
하늘의
길이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마음의 것은
또한 하늘의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드리지
못한 이 마음을
아파합니다.
우리 마음을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서
깨닫게되는
열리는
마음입니다.
가짜 마음을
내려놓고
진짜 마음을
나눕니다.
회개의 마음을
하늘에 쌓습니다.
과분하신
은총과 사랑이
넘쳐납니다.
가치있는 삶이
마음을 나누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가치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마음을
하늘에 쌓는
빛나는
보물같은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늘에
기도와 나눔과
진심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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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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