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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집고금불도논형(續集古今佛道論衡)
석지승(釋智昇) 지음
박건주 번역
1. 『후한서(後漢書)』 「열전(列傳)」 제78권에서 나옴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58~75)에 황제가 밤중에 꿈 속에서 장륙(丈六)의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특이한 빛에 비할 바 없는 모습[色相]이었다. 명제(明帝)가 깨어나 불안해 하다가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크게 모이게 한 후 해몽해 보도록 하였다. 통인(通人) 부의(傅毅)가 답하여 올렸다.
‘신이 듣건대 서역(西域)에 신(神)이 있는데, 불(佛)이라 칭한다고 하옵니다. 폐하께서 꿈에 본 분은 분명히 그 분일 것입니다.’
국자박사(國子博士) 왕준(王遵)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신이 『주서이기(周書異記)』를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기를 ≺주(周)의 소왕(昭王) 때 성인이 서방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태사(太史) 소유(蘇由)가 대답하였다.
‘기록에 1천 년 전에 성교(聲敎)가 이 땅에 미쳤다고 하였으니, 폐하께서 꿈에 보신 분은 분명히 바로 그 분일 것입니다.’
명제가 그런 것으로 믿고, 곧바로 중랑(中郞) 채음(蔡愔)과 중랑장(中郞將) 진경(秦景), 박사 왕준(王遵) 등 열여덟 명을 보내어 불법(佛法)을 심방(尋訪)하도록 하였다.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러 사문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진경(秦景) 등이 이에 이 분들을 중국에 청하였다.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분은 불법을 홍포할 뜻을 세워 고난을 무릅쓰고 곧바로 진경 등과 함께 사막을 건너서 낙양(洛陽)에 이르게 되었다. 명제가 크게 기뻐하며 이 분들을 매우 존중하였다. 곧바로 낙양의 서편에 정사(精舍)를 세웠으니 곧 지금의 백마사(白馬寺)이다. 본래 백마(白馬)가 경전을 등에 싣고 온 까닭에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두 분이 이미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게 되었으니, 두 분은 한지(漢地)에서 승려와 시초가 되었고, 이 때 번역된 경전은 한지에서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
석가모니의 상(像)은 우전왕(憂塡王)의 상(像)을 만든 사제(師弟) 네 사람이 조성하였다. 명제가 곧바로 이 상을 모사(模寫)하여 그리게 하고 법답게 공양하였으나, 바로 이것이 한지에서 불(佛)의 시초이다.
영평(永平) 12년(69) 12월 11일, 명제가 백마사에서 재(齋)를 설(設)하고 행도(行道)하였다. 황제가 법사 가섭마등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어 세상을 교화하시고, 멸도하신 일월(日月:연도)을 알 수 있습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계축년(癸丑年) 7월 15일 저녁에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몸에 의탁하시어 갑인년(甲寅年) 4월 8일 가비라위(迦毘羅衛)의 람비니(藍毘尼) 동산에서 모친의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탄생하셨습니다.’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 말하였다.
‘주(周)의 소왕(昭王) 즉위 24년(B.C. 1029) 갑인년 4월 8일 강하(江河) 천지(泉池)가 홀연히 넘실대어 오르고, 정수(井水)가 모두 함께 넘치며,궁전과 가옥, 산천대지가 모두 다 진동하였고, 그날 밤 오색 빛이 태미성(太微星) 쪽으로 뚫고 들어가며 사방에 두루 퍼지고 청홍색으로 화하였습니다.’
주(周)의 소왕(昭王)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었다.
‘이것이 어떠한 상서로움인가?’
소유가 대답하였다.
‘성인께서 서방에서 탄생하신 까닭에 이러한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소왕이 말하였다.
‘천하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소유가 말하였다.
‘다름 아닌 바로 이 때입니다. 1천 년 후에 전해진다는 성교(聲敎)가 이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왕이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돌에 기록하여 남교(南郊)의 천사(天嗣) 앞에 묻어 두게 하였다. 바로 이 때에 부처님께서 왕궁에서 탄생하셨고, 임신년(壬申年) 19세에 출가하셨다.
『한통사(漢統師)』에서는 ‘부처님께서는 19세에 출가하셨으니, 주나라 소왕(昭王) 42년(B.C. 1011) 임신년에 해당하고, 30세에 성도하셨다’고 하였다. 『한통사』에서 말한 부처님께서 30세에 성도하신 해는 주목왕(周穆王) 2년(B.C. 1000) 계미년(癸未年)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을 교화한 기간이 49년간이었다. 『한통사』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49년간 교화하셨다’고 하였다.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목왕 즉위 32년(B.C. 970)에 서방에서 빛이 퍼지는 것을 보고 먼저 소유(蘇由)에게 물어 보니, ≺기록에 의하면 서방에 성인이 계시는데 지금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목왕은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도(周道)에 적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상국(相國) 여후(呂侯)로 하여금 서쪽으로 들어가서 제후들을 도산(塗山)에 모이게 해서 빛을 변화시켜 물리치도록 하였다.’
이 때 불법은 이미 오랫동안 세간에 유포되어 있었다. 임신년 2월 15일에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셨다고 한다.
『한통사(漢統師)』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는 주목왕(周穆王) 52년(B.C. 950) 임신년이다’라고 한다.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목왕(周穆王) 즉위 52년 임신년 2월 15일 새벽녘에 폭풍이 홀연히 일어나 가옥을 부수고 수목을 부러뜨리니, 산천대지가 모두 진동하였다. 오후에는 하늘이 까맣게 어두워지고, 서방에 하얀 무지개가 생겨서 12도(道)와 남북으로 길게 뻗으며 저녁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목왕이 태사(太史) 호다(扈多)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호다가 대답하였다.
≺서방에 계시는 성인께서 멸도(滅度)하시는 쇠상(衰相)입니다.≻
목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짐이 항상 그를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멸도한다 하니 짐에게 무슨 걱정이 되랴.≻
이 때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으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을 계산해 보면 합하여 1022년이 된다.’
명제(明帝)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제자의 이 나라 기록인 『주서이기(周書異記)』와 법사(가섭마등)의 말씀이 분명히 일치하군요.’
황제가 다시 법사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왕(大慈王)이시며, 당시에 세간에 나오시어 교화하셨는데 왜 이 땅에는 그 교화가 미치지 못한 것입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가비라위국은 삼천대천세계 백억 일월의 중앙이어서 삼세제불(三世諸佛)께서 모두 그곳에서 출생하셨으며, 아울러 천ㆍ용ㆍ귀신과 원력행(願力行)을 한 이가 모두 그곳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바른 정법을 전수받고 모두 도를 깨닫게 됩니다. 다른 곳에 사는 중생은 부처님의 감화를 받을 인연이 없어서 부처님께서 가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당시에 부처님께서 가시지 않은 곳에도 부처님의 광명은 어디에나 빠짐없이 미치며, 광명이 미치는 곳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백 년 혹은 1천 년 이후에 모두 성인이 부처님의 성교(聲敎)를 전하여 교화하게 됩니다.’
명제가 말하였다.
‘법사께서 말하는 1천 년 이후에 성교가 전해진다는 것도 또한 『주서이기』와 같군요.’
제(齊)나라의 대통(大統)법사 달마울다라(達摩鬱多羅)가 고려국(高黎國)의 여러 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여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주(周) 소왕(昭王) 24년(B.C. 1029) 4월 8일에 탄생하시어 주효왕(孝王) 5년(B.C. 905) 2월 15일에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습니다.’
『제왕세기(帝王世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나라 소왕은 즉위 51년에 붕어[崩]하였고, 주 목왕은 즉위 55년에 붕어하였으며, 주 공왕(恭王)은 즉위 12년에 붕어하였고, 의왕(懿王)은 25년에 붕어하였다.’
그러하니 소왕 24년에서 효왕 5년까지를 계산하면 124년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때로부터 열반에 드신 해까지를 계산하면 모두 79년이 되는데, 여기에서 효왕 5년에 입적하셨다고 한 것은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대통법사께서 어느 전적(典籍)에 근거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전기(世傳記)』에서는, ‘정법(正法) 5백 년, 상법(像法) 1천 년, 말법(末法) 1만 년’이라 말하였다. 경에서는, ‘몸의 용(用)이 멈추게 된 것을 멸(滅)이라 하는 것이지, 사멸(死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느경에서는 상법(像法)은 말하지 않고, 정법과 말법의 두 법만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때로부터 계산하면 한 명제 영평(永平) 10년(B.C. 67)까지는 무릇 1020년이 된다. 한 명제 영평 10년에서부터 계산하여 대업(大業) 10년(614) 갑술년까지는 무릇 548년이 되어 합하면 1568년이 된다. 그리고 대업(大業) 10년에서 정관(貞觀) 10년(636) 세차(歲次) 병신(丙申)까지는 22년을 더하게 되어(636~614) 1590년이 된다.
2. 『한법본내전』 제3권
도사도탈품(道士度脫品)
명제(明帝) 영평(永平) 14년(71) 정월 1일, 오악(五嶽) 제산(諸山) 도관(道觀)의 도사들이 정월에 황제에게 신년하례 하는 모임을 전후로 잇달아 경사(京師)에 왔다.
얼마 전에 서역의 천축국으로부터 부처님의 말씀인 수다라(脩多羅:경전)를 얻어 왔었고, 다시 호인(胡人)의 스님인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사람을 청하여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경전 한 가지를 한어(漢語)로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백마사와 흥성사(興聖寺)의 두 절을 세웠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왕공자녀(王公子女)를 사문이 되게 하고, 호인(胡人)의 스승을 모시고 따르면서 그 법을 지키고 행하도록 하였다. 경사의 귀천(貴賤)으로 불법을 받들고 존숭하는 이들이 많게 되었다.
여러 도사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서로 번갈아가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하였다.
“지존(至尊)께서 우리들의 도법(道法)을 버리시고, 멀리 오랑캐의 가르침을 구하고 계시니, 우리가 오늘 황제께 신년하례를 드리는 자리에 각기 태상천촌(太上天尊)이 제정하신 경서(經書)를 각자 모두 다 챙겨서 가져 오고, 능한 분야를 함께 황제께 표로 올려 호인(胡人)의 사(師)와 비교하여 주실 것을 청하도록 하여 자존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이 때 남악(南嶽)도사 저선신(渚善信) 등 70인이 『영보진문(靈寶眞文)』 1부, 『태상영보옥결(太常靈寶玉訣)』 1부, 『공통영장(空洞靈章)』 1부, 『중현보허장(中玄步虛章)』 1부, 『태상좌선공청문(太上左仙公請問)』 1부, 『자연오칭(自然五稱)』 1부, 『제천내음(諸天內音)』 1부 합하여 103권을 가져 왔다.
화악(華嶽)도사 유정념(劉正念) 등 70인이 『지혜정지(智慧定志) 1부, 『지혜상품계(智惠上品戒) 1부, 『선인청문본행인연(仙人請問本行因緣)』 1부, 『명진과(明眞科)』 1부 합하여 62권을 가져 왔다.
항악(恒嶽)도사 환문탁(桓文度) 등 70인이 『본업상품(本業上品)』 1부, 『법과죄복(法科罪福)』 1부, 『명진과재의(明眞科齋儀)』 1부, 『태상설통현진문(太上說洞玄眞文)』 1부 합하여 80권을 가져 왔다.
대악(岱嶽)도사 초덕심(焦德心) 등 70인이 『제천영서도명(諸天靈書度命)』 1부, 『태상설태극태허자연(太上說太極太虛自然)』 1부, 『멸도오련생시(滅度五練生屍)』 1부, 『도자연처의(度自然處儀)』 1부 합하여 85권을 가져 왔다.
숭악(崇嶽)도사 여혜통(呂惠通) 등 140인이 『태상안지상품(太上安志上品)』 1부, 『삼원계품(三元誡品)』 1부, 『태극좌공신선본기내전(太極左公神仙本起內傳)』 1부, 『복어오아입성(服御五牙立成)』 1부, 『조석조의(朝夕朝儀)』 1부 합하여 95권을 가져 왔다.
곽산(霍山)ㆍ천목산(天目山)ㆍ오일운산(五日雲山)ㆍ백록산(白鹿山)ㆍ궁산(宮山) 등 합하여 8산 도관(道觀)의 도사 기문신(祁文信) 등 270인이 『태극진인부령보문(太極眞人敷靈寶文)』 1부, 『보허문(步虛文)』 1부, 『신선약법(神仙藥法)』 1부, 『시해품(尸解品)』 1부, 『상천부록칙금(上天符錄勅禁)』 1부 합하여 84권을 아울러 『병모성자(幷茅成子)』 1부, 『헝성자(許成子)』 1부, 『열성자(列成子)』 1부, 『혜자(惠子)』 1부를 합하여 27가(家)의 제자경서(諸子經書) 총계 245권을 가져 왔다.
“5월 9일 양주계(楊州界) 예장군(豫章郡) 오구현(吳丘縣))의 남악도사인 저선신(褚善信)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나이다. 오악 18산 도관의 태상삼통(太上三洞) 제자 도사 저선신 등 690인은 사죄(死罪)를 무릅쓰고 상언(上言)하옵니다. 신이 듣건대 태상(太上)은 무형(無形)ㆍ무명(無名)ㆍ무극(無極)ㆍ무상(無上)ㆍ무허(無虛)이며, 자연대도(自然大道)는 시원(始元)에서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도교는 처음부터 무위(無爲)를 존숭하였으니 자연의 부(父)입니다. 상고시대 이래 모두 함께 이를 존숭하여 왔고, 백왕(百王)이 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의 도(道)는 복희와 황제를 넘어섰으며, 덕은 요순(堯舜)을 넘어서 있고, 그 은혜의 빛으로 사해(四海)와 팔표(八表)가 어짊에 귀의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근본을 버리고 지말(支末)을 추구하시어 서역에서 가르침을 구하고 계십니다. 신이 보건대, 서역에서 섬기는 것은 이미 호인(胡人)의 스님들이 설하고 있는 바와 같이 화하(華夏)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랑캐 도인을 청하시고 그들의 말을 번역하게 하여 한(漢)의 말인 듯 설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비록 그들의 말을 번역하게 하셨으나 대도(大道)가 아닐까 염려됩니다. 만약 저희들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폐하께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저들과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라나이다. 신 등 오악(五岳)ㆍ제산(諸山)의 도사들은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경전에 두루 통달하였습니다. 원황(元皇:前漢, (B.C. 48~33) 이래 『태상경(太上經)』을 완전히 수행하여 태허(太虛)ㆍ부주(符呪)에 능히 통달하였습니다. 아울러 모두 명달(明達)하여서 혹은 탄기(呑氣:服氣)ㆍ부록(符籙)ㆍ벽곡(辟穀)이나 혹은 귀신을 부리는 일, 혹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술법, 혹은 물 위를 걸어도 빠지지 않는 것, 혹은 한낮에 승천(昇天)하는 것, 혹은 땅 속에 몸을 감추는 술법, 그리고 방약(方藥)에 이르기까지 법술에 능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신 등이 저들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주시면, 첫째는 성상(聖上)의 마음이 평안해지시고, 둘째는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셋째는 대도(大道)가 본 자리로 돌아가게 되며, 넷째는 중국의 풍속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됩니다. 만약 저들과 대결해 보아서 저희들의 뜻대로 되지 못하면 폐하의 무거운 처벌에 따르겠습니다. 만약 신 등이 대결에서 이긴다면 저 헛되고 삿된 것들을 제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황공하옵니다. 사죄(死罪)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명제(明帝)는 또한 사문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사람의 설법을 듣고 법상(法相)을 잘 알게 되었으며 큰 믿음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도사가 올린 글을 읽고 상서령(尙書令) 송상(宋庠)을 보내어 여러 도사들을 장락궁(長樂宮)에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 황제가 도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대덕들은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마시오. 대덕이 말한 태상(太上)은 무형(無形)ㆍ무상(無上)의 존(尊)이고 자연의 부(父)라고 하지만, 근래 서역에서 가져 온 것이 수다라교(修多羅敎:경전)인데 이 가르침은 만나기 어려운 것으로 이제 처음 동쪽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대덕들은 서역에서 온 학자들에 비해 진법(眞法)이 아닌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덕들은 지금 이미 진법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따르니, 어찌 고인(古人) 섭공(葉公)이 겉으로만 용(龍)을 좋아하였지 실제로는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는 고사와 다르겠습니까?”
저선신이 황제에게 물었다.
“만약 불도(佛道)가 진법(眞法)이라면 마땅히 형색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그 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입니까? 이로 보건대 이는 분명히 허(虛)가 아니고 자연의 종(從)도 아닙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가섭마등법사께서는 일찍이 짐에게 설법하기를, ‘부처님께는 네 가지 법신(法身)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입니다. 첫째, 법신은 무위(無爲)ㆍ무상(無相)ㆍ무주(無主)ㆍ무종(無宗)하고 탕적(蕩寂)ㆍ공무(空無)하고 자연 담박(澹泊)합니다. 둘째, 보신은 독립하여 상대가 없으며, 밝고 무상(無上)의 광명이고, 세계에 은현(隱現)을 자재로 합니다. 셋째, 응신은 모든 형색(形色)과 언행을 펼쳐서 삼승을 이끌어 창생을 이롭게 하고,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깨우칩니다. 여러 대덕들은 반드시 부처님께는 네 가지 법신이 있어 출몰(出沒)이 자재하고 불가사의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용(用)에 처하면 만상(萬像)이 모두 응하고, 그침[息]에 처하면 유현(幽玄)에 의탁하여 들어갑니다. 이것이 지혜의 큰 산이며, 열반(涅槃)의 큰 바다입니다. 반드시 존숭하며 믿으면 그 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저선신이 물었다.
“황제께서 설하신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열반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열반ㆍ무위ㆍ담박ㆍ자연의 네 가지는 일미(一味)로서 이를테면 안(眼)과 목(目)이 유사하지만 다르게 이름하는 것입니다.”
저선신이 물었다.
“열반의 뜻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가섭마등법사가 일찍이 점에게 설법하시기를, 열반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성위(星位)에 든 분들에게는 열반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분(隨分)열반이고, 둘째는 유여(有餘)열반이고, 셋째는 각멸(覺滅)열반이고, 넷째는 방편(方便)열반이고, 다섯째는 구경(究竟)열반입니다.”
저선신이 물었다.
“이 다섯 가지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첫째, 소승 초과(初果)인 수다원과(須陁洹果)로부터 사다함과(斯陀含果)ㆍ아나함과(阿那含果)에서 각기 인천(人天)의 과보를 다 받은 후 초선(初禪) 혹은 이선(二禪), 혹은 삼선(三禪)에 생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수분열반이라 합니다. 둘째, 소승의 극과(極果)인 아라한과(阿羅漢果)에서 육근(六根)을 잘 막고 제칠식(第七識)의 공지(空智)를 증득하여 사선(四禪)에 생하거나, 혹은 공처(空處:무색계의 空無邊處)에 생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유여열반이라 합니다. 셋째, 중승(中乘)의 식처(識處:識無邊處) 내지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생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각멸열반이라고 합니다. 넷째, 대승의 초지(初地)에 생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각멸열반이라고 합니다. 넷째, 대승의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은 육도(六道)에 머물러 생사(生死)에 출입하며 중생을 버리지 않고 여러 생류에 응하여 몸을 받아 교화하면서 청정을 잃지 않고 불퇴(不退)의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발원하는 행을 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방편열반이라 합니다. 다섯째, 보살이 한량없는 겁 동안 항상 생사의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수많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수행을 거쳐 만행(萬行)을 잘 성취하여 무상(無上)의 정진(正眞)ㆍ정도(正道)를 증득함을 이름하여 구경열반이라 합니다.”
저선신이 받들어 대답하였다.
“만약 부처님께서 구경열반 하셨다면 한 번 시험토록 해주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경(卿)이 시합해 보겠거든 해보시오”
저선신이 대답하였다.
“신이 태상천존(太上天尊)께서 설하신 경전을 단(壇)을 설치하여 단 위에 경전을 놓고 불로 태워 보겠습니다. 그 법이 만약 진실이라면 불이 태우지 못하길 바라오며, 그 법이 만약 허망한 것이라면 불에 타버리길 바랍니다. 서역에서 온 가르침도 신과 똑같이 하게 해주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경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짐은 그대들이 반딧불의 빛을 일월의 빛과 무리하게 같게 보고, 한 덩어리의 흙을 슬쩍 수(隋)나라의 보배구슬로 계산하는 것 같아 염려됩니다. 실은 그렇게 같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합을 해 보겠거든 경은 이미 믿지 못하고 있으니 이 달 15일 이른 아침에 모두 백마사에 모여서 경과 시합해 보도록 하겠소.”
도사가 바로 황제의 허락을 받고는 기뻐하며 돌아갔다. 경사에 있던 여러 도사들은 함께 모여 낙수(洛水)의 물 위를 걸으면서 빠지지 않았고, 혹은 정원에서 장작을 쌓아 놓고 위에 올라가 불을 질러도 몸에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혹은 경사의 시가지에서 갖가지 주문으로 귀신을 불러 부리니, 경사의 구경꾼들이 모두 대성(大聖)이라 하였다.
정월 11일 황제가 백마사에 와서 불전(佛殿) 앞에 향을 사르고 예배한 후 두 법사를 방문하여 고개 숙여 예를 취하고, 여러 산의 도사들이 행한 공능과 이들이 법사님과 비교를 하고자 한다고 전하였다.
“제자가 그만 저도 모르게 입으로 법사의 시합을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달 15일 백마사에서 크게 모임을 갖는데, 법사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법약(法藥)을 펼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가섭마등법사가 대답하였다.
“여래께서 멸도(滅度)하신 지 1천여 년이 되어 정교(正敎)가 이제 동쪽으로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법이 헛되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사들이 저희와 비교하고자 한다니, 지금이 바로 좋은 때입니다. 빈도(貧道)가 비록 치복(緇服:僧服)을 입고 있으나 계행(戒行)이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법과 제불(諸佛)의 위력에 의지하여 그들을 깨닫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환희하였다. 마등법사가 다시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전생에 복업을 닦으시어 천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제 또 정법을 만나게 되셨으니, 더욱 신심으로 불법을 받들어 존숭하시고 바야흐로 군생(群生)을 인도하여 본처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터전을 닦는 공덕으로 그 은덕은 만 가지로 뻗치는 보살의 행이오니,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가 바로 몸을 가다듬고 마등법사의 발에 예를 드리고 법사께 말하였다.
“제자가 이전에 법사님의 빛나는 은혜를 입사와 가슴이 기쁨으로 충만 되었습니다. 또한 법사께서 법을 펴시어 제자를 교화하여 주시니 일생에 재차 위없는 자비은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법사가 크게 기뻐하며 황제에게 다시 자리에 앉으시도록 하였다. 황제가 축법란법사께 물었다.
“서역에 도사가 있습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서역의 범지(梵志:바라문)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도사와 같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도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무엇을 종(宗)으로 합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도에는 아흔다섯 종류가 있는데 모두 나름대로의 정법을 종(宗)으로 하며, 그 행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들 만한 것이 여덟 종류의 범행(梵行)입니다. 첫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외전(外典)에 널리 통달하고, 마혜수라천왕(摩醯首羅天王:대자재천, 색계 정상의 천신)에 태어남을 구합니다. 둘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외전에 널리 통달하고, 대범천왕(大梵天王)을 천존으로 섬기며, 초선(初禪)ㆍ이선(二禪)ㆍ삼선ㆍ사선에 태어남을 구합니다. 셋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널리 외전에 통달하고, 천존을 섬기며, 염마천(閻魔天)ㆍ도솔천(兜率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남을 구합니다. 넷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널리 외전에 통달하고 논변을 주로 하고, 육사(六師)의 제자 등을 사존(師尊)으로 섬기며 공멸(空滅)에 의지하여 유무(有無)를 단절한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뜻은 선학(仙學)에 두고 금주(禁呪)를 잘하고, 아사타선(阿私陁仙)을 선존(仙尊)으로 섬기며, 오신단(五神丹)을 복용하는 것을 구합니다. 만약 구하여 복용하게 되면 선도(仙道)가 이루어져 바람과 새의 힘을 빌려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여섯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뜻은 의학(醫學)에 두고, 부술(符術)을 잘하며, 아사타선(阿私陁仙)을 존(尊)으로 섬기고, 오지초(五芝草)를 복용하는 것을 구합니다. 만약 이를 구하여 복용하면 선도(仙道)를 이루고 술법을 빌리어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파두대선(波頭大仙)을 선존(仙尊)으로 섬기고, 불덩이 속에 들어가도 몸에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을 구합니다. 여덟째는 항상 범행을 닦으며, 이제숙라수선(夷制叔羅水仙)을 선존으로 섬기고,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 것을 구합니다. 이들 여덟 종류의 도는 범행력(梵行力)으로 천상에 태어날 수 있으나, 올바른 믿음으로 회향하는 마음을 내지 않은 까닭에 천상의 수명이 다하면 다시 삼악도(三惡道) 가운데 떨어지게 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들 여덟 종류의 도는 항상 범행을 닦고 외전에 널리 통하였으니, 바로 세간에서 지혜가 높은 이들인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뵈었으면 마땅히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거늘 왜 여러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된 것입니까?”
축법란법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은 만나기 어려운지라 백일(百一) 소겁(小劫)에 한 분의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십니다. 부처님께서 아직 출현하시기 이전의 천지조화의 시초에는 대력제천(大力諸天)이나, 혹은 자재(自在)하는 성인께서 세간에 훈도(訓導)함이 없을까 염려하여 이 세간에 탄생하여 혹은 제왕이 되기도 하고, 혹은 사유(師儒)가 되기도 하여 각기 하나의 가르침을 세우기도 하며, 혹은 범행을 가르치기도 하고, 혹은 예경행(禮敬行)을 가르치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고, 혹은 일월신을 섬기는 가르침을 펴기도 하고, 혹은 강과 바다의 신을 섬기는 가르침을 펴며, 혹은 수신(水神)과 화신(火神)을 섬기는 가르침을 펴고, 혹은 사직신(社稷神)을 섬기는 가르침을, 혹은 선사신(禪師神)을 섬기는 가르침을 폅니다. 이들 갖가지 신명(神明)을 모두 숭배하며 가르칩니다. 중생은 겁초(劫初) 이래 오랫동안 학습하여 오면서 비록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만나게 되더라도 둔근(鈍根)인 자는 모두 ‘우리들이 지금 숭배하는 것은 원황(元皇:천지조화의 시초) 이래로부터 존앙(尊仰)해온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록 신이(神異)하다 하나, 그 가르침은 비근(卑近)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하니 어찌 본래의 신앙을 버리고 지금의 진리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견해에 집착하여 그 도에 머무는 것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불교 가운데도 또한 선(仙)이라 부르는 것이 있습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선(仙)이란 모두 범행과 여러 기술(技術)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세간의 윗자리에 처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成道)하셨을 때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앉아 계셨는데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광명이 뻗치니 모두 ‘마하대선(摩訶大仙)이 출현하셨으니 일찍이 없던 일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리불(舍利佛)과 목련(木連) 등은 공중에서 앉거나 눕고 신통 변화가 자재하였는데, 서로 ‘이는 대제자천선(大弟子天仙)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나투시니 불호(佛號)도 그렇게 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제자는 법사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에 분명치 못하였던 것을 훤히 알게 되었습니다. 법사께서는 어떠한 법을 마련하시어 도사를 조복(調伏)하시렵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용이 소리를 내며 구름 사이로 오르는 것은 지렁이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호랑이가 바람과 같이 내닫는 것은 절룩거리는 나귀가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뇌성(雷聲)이 울리지 않아도 번갯불이 비추는데 어찌 반딧불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상대편의 행동에 대하여 즉시 응대하면 될 것인데 가려울 것을 기대하고 미리 긁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제자는 법사께서 이법(理法)을 증달(證達)하셔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빈도는 일반인을 넘는 법을 아직 얻지 못하였으며, 또한 감히 증상만(增上慢)을 내지도 못합니다. 비유하건대 제자의 작위를 왕으로 봉하고, 황제께서 명하여 지방을 순찰하여 풍속을 변혁하라고 하면 그 왕이 이르는 곳마다 군현의 관리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사자(使者)가 짐의 자(子)이고, 또한 짐의 명에 따라 주군현(州郡縣)에 순행하는데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법사가 또 물었다.
“왕이 순찰하는 중에 군현의 수령들이 감히 왕 앞에서 멋대로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위명(威命)에 따라 각 지방 소재의 관인들에 대해 엄숙히 징계하니 법을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멋대로 굴겠습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진실로 황제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빈도는 출가인이며 또한 법왕자(法王子)라고 하오니, 간직한 정법 또한 법왕의 금구(金口)의 설이며, 또한 교화하는 데에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또한 법이 행해지는 곳이라면 일체 제천의 마귀도 공경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도사는 지혜가 적은 이들인데 왜 굴복시키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황제가 법사의 일언(一言)을 듣고 생각이 더 굳세어져서 바로 법사를 떠나 도성에 들어왔다. 조직을 내려 관리로 하여금 재(齋)를 설치하는 준비를 하라 하고, 아울러 5품 이상의 문무 내외관인을 15일 이른 새벽까지 모두 백마사에 모이도록 하였다. 13일에 도사들은 백마사 남문 밖의 길 동편의 안쪽에 동서로 세 개의 단과 스물네 개의 문을 설치하였으며, 서쪽 단에는 『태상영보천존경(太上靈寶天尊經)』 등 합하여 369권을 두고, 가운데 단에는 『제자황로(제자황로(諸子黃老)』 등 27가의 책 합하여 235권을 두었으며, 동쪽 단에는 음식과 존사(尊祀) 백령(百靈)의 신위를 모셨다. 14일에 황제는 칠보로 임시의 전각을 설치하고, 백마사 남문의 길 서편에 부처님의 사리(舍利)와 불경과 불상을 모셨다. 15일 이른 새벽에 대중이 모두 모이고 재(齋)를 마쳤다. 황제가 도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대덕께서 시합하고자 하거든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먼저 그대들이 능숙하게 잘하는 것을 대중에게 펼쳐 보이도록 하시오.”
도사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곧바로 장작과 전단(栴檀)ㆍ침수(沈水) 등과 향목을 서쪽 단의 경전 위에 빙 둘러 쌓고, 다시 곡(哭)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태상존천(太上尊天)께서 경전과 조화를 모두 베푸시니, 이전의 철인들과 지금의 현인들이 이를 행하여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서역의 다른 가르침이 들어와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신 등 오악(五嶽)과 제산(諸山)의 도관(道觀) 저선신 등 합계 690인이 감히 경전을 단 위에 모시고, 불을 붙여 보는 시험으로 중생에게 명확히 보여 줌으로써 진위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태상(太上)의 자비가 베풀어지고 신효(神效) 발휘되어지이다.”
도사들이 곧바로 경전에다 불을 붙이니, 경전들이 불길에 휩싸여 모두 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 도사들이 불에 탄 경전을 보고 크게 경악하였다. 이전에 승천(昇天)하였던 자들은 다시 승천할 수 없었고, 이전에 몸을 감추었던 자들은 다시 감출 수 없었으며, 이전에 불에 들어갔던 이들도 다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전에 금주(禁呪)를 잘하고 귀신을 불러 부리던 이들도 이제는 효험이 없었으며, 이전에 갖가지 공능을 시현하였던 이들도 이제는 한 가지도 보일 수 없었다. 도사들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황제가 도사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습니까? 익주부(益州部)에 종산(鍾山)이 있는데, 망명한 도적들이 산택(山澤)에서 지내면서 멋대로 행동하며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다가, 군대가 토벌하니 형세가 무너졌는데 지금과 같은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저선신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시험한 것이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곧 허망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오, 마땅히 서역의 진법(眞法)으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
저선신이 대답하였다.
“모성자(茅成子)가 ‘태상(太上)이란 바로 영보천존(靈寶天尊)이며, 조화의 시원(始元)을 태소(太素)라 한다’ 하였거늘 어찌 허망하겠습니까?”
장연이 말하였다.
“태소(太素)에는 귀덕(貴德)의 이름은 있으나, 언교(言敎)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이를 언교(言敎)라 하는 것은 곧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제가 전적들을 살펴보니 영보(靈寶)란 것은 멀리 믿을 만한 유래[氏族]를 확인할 수 없으며, 고금에 나오는 영보를 모두 들추어 보아도 또한 도를 이루는 처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영보가 자연이라면 경전이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까? 만약 영보가 세간에 나왔다고 한다면 고제(古帝) 이전의 왕은 누구에게 설법하였겠습니까? 허망하게 태상(太上)이란 이름을 받았다 하고, 망령되게 천존이란 이름을 빌려서 이것이 선각법왕(仙覺法王)이라 설하며, 육도(六道) 중생을 구제하고, 함령(含靈: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합니다. 그대들 또한 진실에 돌아가 허망을 버려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법 배우는 것을 귀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정법을 받들어 존경하지 않으면 헛된 수행이라 할 것이니, 백 년 동안 하더라도 공이 되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만약 자만심으로 정법을 믿지 않는다면 황로(黃老:도교)에라도 전심(專心)하여 공부하십시오. 황로란 비록 법왕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또한 전세(前世) 성인의 가르침을 찬집(撰集)한 것이며, 비록 같은 제자(諸子)의 말이라지만 그 행이 매우 심오하고, 성(性:본성, 근원)에는 무위(無爲)ㆍ도덕의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전한(前漢)의 효경(孝景:景帝)황제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도학이 이로부터 나와서 백가(百家)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불법(佛法)을 모방하여 그 다음이 되었습니다. 『모성자(茅成子)』ㆍ『열자』ㆍ『정자』 등의 책에 모두 자연ㆍ소요(逍遙)ㆍ세속을 벗어남 등에 대한 학문이 있으나 또한 황로의 다음 자리입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오로지 영보(靈寶)만을 원하며 독존(獨尊)하는 것입니까?”
저선신이 대답하였다.
“영보는 하늘에 올라가고 땅에 몸을 숨기는 공능이 있으며, 부록(符籙)과 금주(禁呪)로 귀신을 부리는 힘이 있고, 물과 불 위를 걷는 등 효험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불이 경전을 태워 버려 태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애통하며 큰 치욕입니다.”
장연이 말하였다.
“큰 제도의 틀 아래에서 각자의 작은 분야를 나름대로 해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이를테면 주군(州郡)의 장(長)이 각기 한 지역을 맡아 자유롭게 판결해 버려 제왕과 대치(對峙)된다면 제왕의 위덕(威德)이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경우도 이와 비교하면 또한 그와 같습니다. 오늘 경들이 배워야 할 법은 산에 맹수의 흔적을 없게 하고, 세상에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단절하고자 하건대, 첫째는 진위(眞僞)를 구별하도록 해야 하고, 둘째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선신이 묵연히 답변하지 않고 있다가 남산의 도사 비숙재(費叔才)와 함께 비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 부처님의 사리에서 광명이 오색으로 나오며 곧바로 공중으로 뻗치면서 대중의 위를 덮개로 두루 덮는 듯 선회하니, 일륜(日輪)이 가려졌다. 가섭마등법사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지라 자비의 선근력(善根力)으로 몸을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공중에서 비행하며 신통변화를 자유로이 하고 나서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평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 때 하늘에서 불전 앞과 여러 승려들 위로 보배 꽃이 비오듯 내려왔고, 또한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니 대중들이 미중유의 일이라 하면서 환희하고 찬탄하였다. 이때 법사께서는 바로 대중들에게 게송을 설하였다.
여우는 사자의 유가 아니며,
등불은 일월의 광명이 되지 못하네.
연못은 거대한 바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덕은 숭악(崇嶽)의 가파름 없네.
법운(法雲)이 세계에 펼쳐지니
훌륭한 씨앗이 싹을 발하고
희유(希有)의 법에 훤히 통달케 하며
곳곳에서 군생(群生)을 제도하네.
법사가 게송을 마치고 도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대덕들께서 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말씀하시어 함께 토론하도록 합시다.”
이때에 숭악도사 여혜통(呂惠通)이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법사의 덕력(德力)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번이 비교해 보고자 하였습니다만, 앞에서 본 신광(神光)이 훤하게 비침은 절세(絶世) 난지(難知)의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사(大士)의 신통변화하심이 기특(奇特)하며 비할 데가 없고, 하늘의 음악 소리를 내리시어 저희들의 미로(迷路)를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 꽃은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제 대도(大道)에 귀의해야 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아직 성법(聖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감히 자문(諮問)을 구하는 바이옵니다.”
명제(明帝)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법사의 발아래에 예를 올리고 법사께 말하였다.
“제자는 내내 생사와 애착의 강물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야 올바른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져 처음 시작되는 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법사께서는 대자비를 베푸시어 법문을 열어 밝게 펼쳐 주옵소서.”
마등법사가 청을 받고 묵연히 허락하였다.
황제가 대중에게 명을 내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법사의 자리 앞에 앉도록 하였다. 대중이 수백 겹으로 법사를 둘러싸고 앉아서 모두 조용히 법문을 기다렸다.
이 때 법사는 곧 대범음성(大梵音聲)을 미묘하게 내시어 제일 먼저 부처님 공덕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였다. 또한 대중들에게도 삼보(三寶)를 칭송하며 선법(善法)을 찬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로 대중들에게 인천(人天)ㆍ지옥의 인연법과 혹은 소승의 아비담법(阿毗曇法:아비달마, 論藏), 혹은 대승의 마하연법(摩訶衍法:대승법), 혹은 참회멸죄법, 혹은 출가공덕법을 설하였다. 대중들은 법문을 듣고 나서 각기 희유한 마음이 생겼다.
이 때 사공(司空) 양성후(楊成侯)와 유선준(劉善峻)이 법사께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앞에서 우러러 대덕의 지혜를 보니 바다와 같아서 저희들 범부가 능히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은 대사에 의지하여 출가하고 봉급을 내어 시봉(侍奉)하겠나이다. 원하옵건대 허락해 주십시오.”
법사께서 말하였다.
“여러 대중이 발심하여 출가하는 것은 해탈의 업연(業緣)이 있어야 합니다. 인자(仁者)들은 각기 왕업(王業:政治의 사업)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묶여 있어 제가 허락할 바가 아닙니다.”
황제가 곧 앞으로 나서서 법사에게 말하였다.
“제자는 이제껏 항상 진실과 가짜에 혼란스러워 지혜도 없어 능히 올바로 구별도 못하다가 법경(法鏡) 비추임의 은혜를 입어 귀의해야 할 실상(實相)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모임에 있는 도사ㆍ관리ㆍ서민 및 부녀자가 능히 출가하고자 한다면 제자가 스스로 삭발해 주고 삼의(三衣)와 물병과 발우를 시여하며, 따로 정사(精舍)를 세워 봉양하여 도법을 배우게 하겠습니다.”
법사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황제의 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
이 때 대중들은 황제가 출가를 허가하심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였다. 사악(四嶽)과 여러 산의 도관의 도사와 여혜통(呂惠通) 등 620인이 출가하였고, 남악 도관의 도사 저선신과 비숙재가 모임에서 죽었기 때문에 남악 도관의 도사 68인은 장사지내러 가서 법회에 참여하지 못하여 출가할 수 없었다. 오품(五品) 이상의 관리 양성후와 유선준 등 93인이 출가하였다. 이 때 황제의 시위(侍衛)와 9품 이상의 관리 진원(鎭遠)장군 강구아(姜苟兒) 등 175인이 출가하였고, 경도(京都)의 백성과 부녀자 아반(阿潘) 등 121인이 출가하였다.
16일에 황제는 대신들 및 문무관 수백 인과 함께 출가자를 삭발해 주었으며, 날마다 공양을 올렸고, 저녁마다 등을 밝히고,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였다. 정월 30일가지 법복과 물병, 발우가 모두 시여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열 개의 사찰을 성 밖에 일곱 개, 성 안에 세 개를 세우고, 일곱 개 사찰에는 비구를, 세 개 사찰에는 비구니를 안주하게 하였다. 한(漢)의 불법은 이로부터 흥성하게 되었다.
『한법본내전』은 무릇 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 명제구법품(明帝求法品)
제2권, 청법사입사품(請法師立寺品)
제3권, 여제도사비교도탈품(與諸道士比校度脫品)
제4권, 명제대신등칭양품(明帝大臣等稱楊品)
제5권, 광통유포품(廣通流布品)
위와 같이 1부(部) 다섯 권이다.
3. 『전법기(傳法記)』 제1권(안현통(安玄通)이 기록함)
한(漢) 환제(桓帝) 건화(建和) 3년(149) 기축년에 사문 안청(安淸)이 있었는데, 안식국(安息國) 왕의 태자였다.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여러 지역을 돌아 다니며 교화하는 데 뜻을 두고 낙양에 와서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다. 한(漢) 영제(靈帝) 가평(嘉平) 5년(176) 병진년에 사문 지루가참(支樓迦讖)이 출가하였는데 이 분은 월지국(月支國) 사람으로 낙양에 와서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다. 한(漢) 영제(靈帝) 광화(光和) 2년(179) 기미년에는 사문 축불삭(竺佛朔)이 있었는데, 이 분은 월지국의 승상으로 있다가 승상의 자리를 버리고 불도를 널리 홍포하고 중생을 개화(開化)시키고자 발원하여 낙양에 와서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다. 『위서(魏書)』를 보면, 문제(文帝) 황초(黃初) 3년(222) 임인년에 사문 담마가라(曇摩迦羅)가 있었는데, 이 분은 중천축국 사람으로 허도(許都)에 이르러 경전과 계율을 번역하였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 10년(67)에서 위(魏)의 문제 황초 3년까지는 합하여 150년(정확히는 153년임)이다. 『오서(吳書)』를 보면 오주(吳主) 손권(孫權) 적오(赤烏) 4년(241) 신유년에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있었는데, 이 분은 강거국(康居國) 사람으로 대승상의 장자였다. 대도를 홍포하는 데 뜻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교화하다가 처음 오나라 땅에 이르러 띠집[茅]을 세워 불상을 모시고 행도(行道)하였다. 오나라 사람들이 처음 이를 보고 요상하고 이상하게 여겼다. 관청에서 이를 듣고 오주(吳主)에게 보고하여 말하였다.
“한(漢) 명제가 꿈에 신을 보았는데, 그 이름을 불(佛)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그 유풍(遺風)입니다.”
오주(吳主)가 곧바로 강승회를 불러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신험(神驗)이 있습니까?”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밝고 신령한 자취가 세상에 나오신 지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오직 사리(舍利)가 있어 지심(至心)으로 구하면 어디에나 응현합니다.”
오주가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으면 마땅히 탑을 세울 것이나, 허망한 것이라면 나라에서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사리는 자민(慈愍)하여 구하면 영험을 나타내어 내려 줍니다. 만약 영험이 없으면 마땅히 스스로 죽을 것이온데 어찌 왕헌(王憲:국가의 법)을 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에 7일에서 21일간의 시간을 청하여 마침내 사리를 구하였다. 사리의 오색 빛이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오주가 즉시 사리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대력자(大力者)로 하여금 철퇴로 내려쳐 보게 하였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철판과 철퇴는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는데 사리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오주가 다시 사리를 탄화(炭火) 속에 넣으니, 사리의 광명이 불에서 나와 대연화(大蓮花)의 모습을 지으면서 궁전을 훤하게 비추었다. 오주가 강승회를 존경하고 믿게 되었으며, 그 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사리를 모시기 위해 칠보탑을 세웠으며, 그 지역을 불타리(佛陁里)라 이름하였다. 강동(江東)의 불법은 이로부터 흥성하게 되었다. 황초 3년(222)에서 오나라의 적오 4년(241)까지는 무릇 20년이며, 영평 10년(67)에서 오나라 적오 4년까지는 합하여 170년(정확히는 174년)이다. 강승회는 오(吳)나라에서는 최초의 승려였고, 그 가르침은 오나라에서 최초였다.
오주 손권이 상서령(尙書令) 도향후(都鄕侯) 감택(闞澤)에게 말하였다.
“후한 명제가 꿈에 신을 보고 중랑 채음(蔡愔)으로 하여금 서역에 가서 불교를 찾아보라고 한 이래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는가?”
감택이 대답하였다.
“후한 영평 10년(67)에서 적오 4년(241)까지 합하여 170년(정확히는 174년)입니다.”
오주가 말하였다.
“불교가 한(漢)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까닭에 이제 와서야 비로소 강동 땅에 전해지게 되었는가?”
감택이 대답하였다.
“후한 명제 영평 14년(71)에 남악의 도사 저선신이 정월 황제께 신년 하례하러 온 때에 제산(諸山) 도관의 도사와 어울려 저선신이 함께 황제께 글을 올려 서역의 법사 가섭마등과 축법란과 비교해 볼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때 불교가 처음 낙양에 들어왔었는데, 후한의 명제는 청으로 백마사와 흥성사를 건립하였고, 법사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여러 경전을 번역하게 되어 비로소 이로부터 한어(漢語)로 불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사들은 정법에 이르지 못하고 그 깊고 알음을 알지 못해서 황제께 글을 올려 시험해볼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명제가 이를 허락하여 정월 15일 백마사의 문 앞에 남악의 여러 도사들이 단을 설치하고 가져온 『영보경(靈寶經)』이라 하는 도법의 경전들을 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여 보았는데, 당시 정법(正法)의 힘 때문에 도사들의 서적들이 남김없이 모두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갖가지 기술(技術)을 펼쳤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모든 도사들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남악의 저선신과 비숙재 등은 모임에서 스스로 비탄하며 죽었고, 그 밖의 도사들은 명제가 산에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축법란법사가 설법한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남악의 도사들)은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후 불법의 유포에 나선 이는 거의 없다가 나중에 한나라가 쇠약해지고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어 불법이 170년간이나 유통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강승회법사가 와서 교화하게 되어 강동 땅에서 불법이 비로소 흥행하게 된 것입니다.”
오주가 말하였다.
“공자와 노자의 이가(二家)를 불교와 비교해 볼 수 있는가?”
감택이 대답하였다.
“신이 건안(建安, 후한 196~220) 연중에 낙양에 유학하였는데, 법거사(法擧寺)에 들어가서 예배하다가 법사 혜진(惠鎭)이 가르침을 베풀어 대승경전을 강독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은 법문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마침내 법사에 의지하여 사찰에 머무르면서 3년 내내 법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신은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법왕이시며, 모든 성인이 돌아가 의지할 분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그 가르침은 일체의 함령(含靈:중생)과 만상(萬像)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심원함은 거대한 바다와 같으며, 작고 하찮은 것을 구별하지 않고 밝힘은 일월과 같고, 별빛의 자리든 촛불 있는 자리든 꺼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바로 교화하고, 만나는 대로 이 가르침을 전합니다. 천상 인중(人中)과 자연의 대존(大尊)이십니다. 설사 하늘에는 널리 덮는 공이 있고, 땅에는 능히 싣는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모두 부처님께서 건립하시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신이 또한 살펴보건대, 노나라의 공자는 영재(英才)가 크게 뛰어나고, 성덕(聖德)이 불군(不群)이라 세상에서는 그를 소왕(素王)이라 청합니다. 공자가 제작한 경전은 주세(周世)를 훈도(訓導)하였으며, 그 가르침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어져 사유(師儒)의 기풍이 금고(今古)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민(逸民)이 있어, 이를테면 허성자(許成子)ㆍ광성자(廣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열자(列子)ㆍ노자ㆍ장자 등 제자백가의 서(書)가 모두 수신(修身)의 행을 익힌다고 하여 산곡(山谷)에서 방탕(放蕩)하며 자유롭게 마음대로 지내면서 담박(淡泊)함에 돌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한 행은 인륜과 장유(長幼)의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며, 또한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풍교(風敎)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이를 막히고 빠지게 하는 것이라 한 것은 대개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전한(前漢)의 경제(景帝)가 여러 백가의 서(書)를 연구하고, 『황자』ㆍ『노자』의 ‘자(子)’를 경(經)‘으로 고쳐서 도학(道學)이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경제(景帝)는 조칙을 내려 조야(朝野)가 모두 이들 경전을 풍송(諷誦)하도록 훈도하였습니다.
만약 공자와 노자의 이가(二家)를 원방(遠方)의 불법(佛法)과 대비한다면 그 차이나 차원이 멀다면 먼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공자와 노자가 세운 교법은 하늘이 제정한 것을 쓰는 것으로 감히 하늘을 위배할 수 없으나, 제불(諸佛)께서 시설하신 법은 하늘이 이를 봉행하여 감히 부처님은 위배할 수 없습니다. 이로 말하건대 진실로 서로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주가 말하였다.
“선법(仙法)에서 말하는 영보(靈寶)의 법이란 어떠한 것인가?”
감택이 대답하였다.
“영보란 것은, 첫째 의거할 만한 유래가 없으며, 둘째 성도처(成道處)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산곡(山谷)에서 나온 까닭에 알 바가 없습니다. 바로 산에서 나온 남설(濫說)이고, 성인이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주가 이에 칭찬하며 답하였다.
“공의 학문은 넓고 정심하며 여러 전적을 통람하고 있어 모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다. 태자태부(太子太傅)와 영시중(領侍中)을 가관(加官)하고, 상서령은 이전대로 잇는다.”
『후량서(後凉書)』를 보면 전진(前秦)의 주(主) 부견(符堅)이 건원(建元) 19년(383)에 정서(征西)장군 주천공(酒泉公) 여광(呂光)을 보내어 서쪽으로 구자국(龜玆國)을 토벌하고,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을 얻어 왔는데, 이 분은 구자국 대승상의 장자였다. 여광이 돌아오는 길에 양주(凉州)에 이르러서 진주(秦主:符堅)가 요장(姚萇:後秦을 세움)에게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광은 마침내 양주에서 『대화엄경』을 번역하고, 스스로 택하여 후진(後秦)의 주(主) 요장(姚萇)의 아들인 요흥(姚興)에게 왔다. 홍시(弘始:요흥의 治世임) 2년(400) 장안에 이르러 많은 경전을 번역하니, 불법이 이 때에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 해는 북위(北魏)의 천흥(天興) 3년(400)에 해당한다. 북량(北涼) 정권의 저거몽손(沮渠蒙遜) 영화(永和) 2년(434)의 기사를 보면, 이 때 사문 담마참(曇摩讖)이 있었는데, 이 분은 천축국인으로, 양주(凉州)에 이르러서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런데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과 『육바라밀경(六波羅蜜經)』의 계품(戒品)이 번역되지 않은 것을 보고, ‘한인들이 계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몰래 번역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 때 어떤 비구가 경전을 읽다가 본래의 계품(戒品)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수행하며 전심(專心)으로 이를 구하던 중 밤에 꿈속에서 어느 한 도인이 계본(戒本)을 자신에게 주었는데, 비구와 더불어 계를 지송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담마참법사에게 말하였다.
“어제 저녁 꿈속에서 어떤 법사께서 저에게 계품을 주었는데, 잃어버릴까 두려워 법사님과 함께 맞추어 보아야겠습니다.”
담마참법사가 바로 비구에게 외워 보게 하니 본래의 계품과 다름이 없었다. 담마참법사가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한인(漢人)이 계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는 번역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제 대덕께서 이렇게 얻으셨으니, 한인으로서 반드시 지키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계품이 이로부터 유행하게 되었다. 이 때가 동진(東晋)의 융안(隆安) 4년(400)이었다. 이 해 이후로부터 매년 전법하러 오는 서국(西國)의 사문들이 많게 되었는데, 모두 다 기록할 수조차 없다.”
『논영기(論營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원위(元魏:북위) 정광(正光) 원년(520) 경자년 7월에 명제(明帝)가 새로 원복(元服:帽子, 모자)를 쓰고,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23일에 승니(僧尼)와 도사를 청하여 불전(佛殿) 앞에 재(齋)를 설(設)하고 재를 마친 후, 황제가 시중(侍中) 유등선(劉騰宣)에게 말하여 법사들과 도사들을 청하여 함께 논의토록 해서 제자의 의망(疑網)을 풀어 달라고 하였다. 이 때 도관의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의 법사 담모최(曇謀最)가 대론(對論)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부처님과 노자는 같은 시기의 분들입니까?”
강빈이 대답하였다.
“노자가 서쪽으로 들어가 호인(胡人:여기서는 인도인)을 교화하였는데, 불(佛)은 이 때 그 시자로 있었으니 분명히 같은 시기에 계셨습니다.”
법사(담모최)가 말하였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노자개천경(老子開川經)』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노자는 주나라 어느 왕 몇 년에 태어났으며, 주나라 어느 왕 몇 년에 서쪽으로 들어갔습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주나라 정왕(定王) 즉위 3년((B.C. 604) 을묘년에 초나라 진군(陳郡)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에서 9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태어나 주나라 간왕(簡王) 즉위 4년((B.C. 583) 정축년에 주나라에서 수장리(守藏吏)로 봉직하였고, 간왕 즉위 13년((B.C. 574) 병술년에 태사(太史)로 전임하였으며, 경왕(敬王) 즉위 원년((B.C. 519) 경진년에 연세 85세가 되어 주나라의 덕이 쇠하여짐을 보고 마침내 함관령(函關令) 윤희(尹喜)와 더불어 서쪽으로 들어가 호인(胡人)을 교화하였다 하였으니, 이로 보아 분명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B.C. 1029) 갑인년 4월 8일에 탄생하시어 주 소왕 42년 임신년 19세에 출가하셨으며, 주(周) 목왕(穆王) 2년((B.C. 1000) 30세에 성도(成道)하셨고, 몸을 나투시어 세간을 교화하신 지 49년 되던 해인 주나라 목왕 52년((B.C. 948) 임신년 2월 15일에 반열반하셨으니, 계산해 보면 부처님 열반하신 지 345년이 지나서 비로소 주나라 정왕 3년((B.C. 604)이 되어 노자가 태어나고 태어난 지 85세인 경왕 원년((B.C. 519)에 이르러 즉, 무릇 부처님 열반 후 425년이 지나 비로소 윤희와 더불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이 된다. 이에 의거하여 보건대 햇수가 크게 차이나거늘 어리석은 이가 어찌 아무 것도 모르고 부처님께서 노자의 시자(侍者)가 되셨다고 쉽게 말하는가? 높은 언덕을 낮은 골짜기라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강빈이 말하였다.
“『노자개천경』의 글에 의거하면, 이주사(李柱史:노자)가 서쪽으로 들어가 호인(胡人)을 교화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시자가 되셨다고 하였으니, 또한 잘못됨이 없거늘, 법사는 이 일에 대해 자주 거부하는데, 사리(事理)가 두려워서 편안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무릇 부처님께서는 법왕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능히 도솔천에서 강령(降靈)하시어 왕궁에 태어나셨고, 만복을 원만히 갖추셨으며,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들었고,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제도하셨으며, 육도(六道) 중생을 고루 제도하셨습니다. 태어나시어 걸음을 옮기니 금화(金花)가 발을 받들었고, 앉으니 백보련대(百寶蓮臺)가 받치었으며, 앞으로 나아가시니 제석(帝釋)이 앞에서 인도하였고, 들어가시니 범왕(梵王)이 뒤에서 시위(侍衛)하였으며, 좌측에서는 밀적(密迹:護法神)이 사위(邪僞)를 단절하는 역할을 하였고, 우측에서는 금강(金剛:호법신)이 사마(邪魔)를 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앙(無央:無盡)의 보살들은 법자(法子)의 자리를 가득 채우고, 무량(無量)의 성문(聲聞)들을 성중(聖衆)으로 하였으며, 세상을 지키는 사왕(四王)은 조석으로 찾아뵙고 보살펴 드리며, 천룡팔부(天龍八部)는 새벽과 밤마다 받들어 접대하니, 하늘의 음악이 공중에서 울려 퍼지고, 하늘 꽃이 비 오듯 떨어졌습니다. 부처님의 사자후(獅子吼) 한 번에 외도들이 진법(眞法)에 귀의하고, 북[鼓]이 스스로 울려 삿된 마군들이 정법을 따르게 되었는데, 어찌 주나라 장리(贓吏:吏官, 老子)의 시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주하사(柱下史)가 법왕자의 경지에 있었다면, 마땅히 주나라 때에 신통을 보였어야 하거늘 왜 세상을 피하여 서쪽으로 와서야 비로소 교화할 수 있었을까요? 주하사(柱下史)가 능히 그 시대에 교화할 수 있었다면,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미한 때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문ㆍ무왕과 성왕(成王)의 태평성대의 기풍을 잇고 주하사가 이미 주나라의 다섯 왕을 거쳤거늘, 어찌 신통변화와 법락(法樂)을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만약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바람이 풀잎에 있어 바로 자유롭게 주나라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몸을 숨겨 서쪽으로 멀리 호속(胡俗)을 교화하러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물며 법왕과 주하사의 시기는 420여 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제 같은 시대의 분이라 하고, 더욱이 법왕을 노자의 시자였다고 하니, 이 또한 잘못이 매우 심합니다. 깊이 슬퍼질 따름입니다. 인자(仁者:상대편에 대한 존칭)께서는 『노사개천경』의 내용을 설하셨지만, 이는 형편없이 어긋나 있고 갈팡질팡한 문장인데, 어찌 믿고 의거할 만한 것이 되겠습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만약 부처님께서 주나라 소왕 때에 탄생하시어 주나라 목왕 때에 입멸하셨다면 그 사실이 어느 글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주서이기(周書異記)』와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에 모두 명문(明文)이 실려 있습니다. 당금의 군자라면 이전에 마땅히 이 글을 열람해 보았을 것입니다. 당신 한 사람을 위해 대중에게 다시 그 내용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강빈이 말하였다.
“공자가 이미 예법을 제정하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기술하였는데 당시에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왜 기록에 남기지 않았을까요?”
법사가 말하였다.
“참으로 인자께서 아시는 것은 대롱으로 세상 보는 것과 같아 두루 넓게 보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번번이 공자가 부처님에 대해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았다고 비방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인자가 믿지 못하겠거든, 공자가 세 가지 것을 갖추어 점복(占卜)해야 한다 하였고,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천지인(天地人) 삼비(三備)를 뛰어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인자께서 스스로 이를 잘 살펴보고 고찰해 보십시오. 충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강빈이 말하였다.
“공자는 성인이라 말이 없어도 스스로 아는데 왜 점복에 의지하는 것입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오직 부처님만이 모든 성인의 왕이요, 사생(四生)의 으뜸이시라 일체 중생들의 과거와 미래 이제(二際)를 멀리 내다보시어 길흉의 시종(始終)을 점복에 의지하지 않고 모두 꿰뚫어 보시는 것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밖의 성인은 비록 자연의 이치가 아닌 것에는 통달해 있으나, 반드시 구복(龜卜:거북점)에 의지하여야 영괘(靈卦)에 통합니다.”
이 때 명제(明帝)가 즉시 중상서(中尙書) 우선(又宣)을 파견하여 도사들에게 강빈의 논변에 종지가 없음을 알리라고 하였다. 또 강빈에게 물었다.
“『노자개천경』을 노자가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노자개천경』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누가 지녀 오던 것입니까?”
강빈이 대답하였다.
“신의 돌아가신 스승, 도사 장상변(張祥邊)이 얻은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경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강빈이 대답하였다.
“도관(道觀)에 있습니다.”
황제가 중서시랑 위수(魏收), 상서랑 조형(祖瑩) 등을 보내어 도관에 가서 그 경전을 가져 오도록 하였다. 황제가 문무관과 상서랑 이상의 관리들을 보내어 이를 보고 토의하도록 하니, 태위(太尉) 공소종(公蕭琮), 태부(太府) 이식(李寔), 위위(衛尉) 허백도(許百桃), 이부상서(吏部尙書) 형만(邢巒),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등 170인이 읽기를 마치고 황제에게 아뢰었다.
“노자는 오천문(五千文)을 지은 데 머무르고 서쪽으로 가서 유사(流沙) 지역에 은둔하고 더 이상의 말이 없었습니다. 이 책은 허망하게 멋대로 말하기를, 노자가 호인(胡人)을 교화하러 가서 12부경(部經)을 설하였다고 합니다. 강빈의 죄는 군중을 미혹하게 한 데 해당합니다.”
황제가 도사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제껏 오로지 이 법을 배워 왔는데, 어떻게 이 책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까?”
여러 도사들이 대답하였다.
“신들은 모두 이 책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오늘에야 강빈이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곧바로 중서랑(中書郞) 형자재(邢子才)와 황문시랑(黃門侍郞) 양관(楊寬) 등을 도관에 보내어 다시 여러 방을 수색해 보도록 하였다. 여기저기 모두 찾아보았으나 이 책은 없었다. 황제가 말하였다.
“강빈 도인의 죄는 극형에 합당하다. 옥에 보내어 참형에 처하도록 하라.”
이 때 정위경(廷尉卿) 원초(元超)가 강빈을 데리고 나가려고 하였다. 그 때 삼장법사 보리류지(菩提流支)가 황제에게 간하였다.
“폐하께서 새로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여 주십시오. 지금은 또한 건재(建齋:황제가 새로 즉위)하는 때이니, 다복(多福)의 길을 열어 보이십시오.
폐하의 칙령으로 논의의 분위기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강빈이 비록 종지(宗旨)가 없었다 하나 모임을 윤택하게 한 바 있습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신 기세로 이를 법으로 처리하여 사람을 죽이고자 하신다면 천의(天意)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제자가 삼가 살피건대 경전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인행시(因行時:佛果에 원인이 되는 보살행)에 국왕으로 계실 때 오백 바라문을 죽였으나 계율을 범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강빈이 말한 『노자개천경』의 설은 요서(妖書)이며, 조정을 미혹케 하고 어지럽히는 것이니, 지금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으면 나중에 잘못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법사가 극력 간(諫)하여 강빈은 죽음을 면하고, 마읍(馬邑)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