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토요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정성으로 오염된 마음을
십자가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진리를 보고 기뻐 춤추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본문 주해)
1~6절 : 에베소를 떠난 바울 일행은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여정은 고스-로도-바다라-베니게-두로로 이어진다.
두로가 배의 하역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서둘러가야 했던 바울 일행이 두로에서 7일 간이나 머문 이유는 짐을 풀고 다시 싣는 이 배의 일정을 따라야 했고, 마침 그 동안 순항하여 왔기에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두로에서 시간을 얻게 된 바울 사도는 그곳의 제자들을 찾았다.
이는 두로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데반의 순교 때에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런데 행복한 만남을 가진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반대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하는 바울의 뜻이 확고함을 말해 준다.
그리고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 기도한 후 작별한다.
7~9절 : 바울 일행의 여정은 두로-돌레마이-가이사랴로 이어진다.
가이사랴에는 ‘일곱 집사 중 하나’, ‘전도자’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 빌립 집사가 살고 있었다.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8:5~40). 그런데 그 빌립이 가이사랴에서 20여 년 동안 정착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빌립의 딸들은 예언의 은사로 아버지가 개척한 교회를 도운 것으로 여겨진다.
10~12절 : 이때 예루살렘에서 온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고난 받을 것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그러니 가이사랴 형제들뿐만 아니라, 함께 동행해 왔던 일행들-누가와 디모데 등-까지도 바울을 만류한다.
13~14절 :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새번역)
울면서 만류하는 그들을 바울이 제지한다.
이들은 모두 바울을 너무도 사랑하여 만류한 것이고, 바울 역시 마음이 아프지만 성령께 매인 바 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자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 사람들은 바울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나의 묵상)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말리는 이들과 그래도 꼭 가야겠다는 바울의 의지가 팽팽히 맞선다.
그런데 4절과 11절을 보면 가지 않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바울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이다.
형제들은 고난을 피하라는 사인(sign)으로 성령의 뜻을 해석하였고, 바울 사도는 오히려 그러한 길로 들어가라는 사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주님의 뜻일까?
같은 성령의 뜻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만류하는 형제들에게 성령께서 나타내신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지, ‘그곳에 가면 안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성령의 뜻)’을 항상 우리가 잘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즉 ‘고난’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형통’만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이 형제들과 일행들 역시 ‘고난’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바울을 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미 자신은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고 밝혔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2~23)
이제 형제들은 자신들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울에 대해 마음이 무지 애탔겠지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 만류를 그친다.
믿는 자들에게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다들 잘 알고 있다.(물론 실제로 어려움을 당하면 당황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주님의 뜻은 형통’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고난은 주의 뜻이 아닐거야’ 라는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진정한 주님의 뜻(성령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고난의 길이든, 순적한 길이든 가리지 않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자꾸 묻는 이유는, 순종하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묻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꼭 그랬기 때문이다.
고난이 예상되면 쉽게 ‘아, 주님의 뜻이 아니구나~’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 본문 끝 14절에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하는 구절이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주의 뜻은 고난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주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고난이 예상되면 쉽게 ‘주님의 뜻이 아닐거야.’ 했던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이것을 깨닫는 이 순간에도
‘고난이 없는 주의 뜻은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자입니다.
현재 저의 상태가 이토록 한심하여도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질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주의 뜻과 저의 뜻이 일치하리라 기대했던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은 현실적 답답함 가운데서
진정한 주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이것도 필요한 고난이라면 기꺼이 수용하며 나아갑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만사형통을 성령의 지시로 오판하는 시대,
고난도 주의 뜻임을 알고 기꺼이 순종하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