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5인실 / 김기택
아까부터 참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한평생이 가고 있다.
삐끗하면 어딘가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일으키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침대에서 다 일어난다면 그동안 없었던 발이 나와
떨리는 슬리퍼를 신을 것이다.
하면 된다는 일념이
링거 거치대를 밀며 코앞의 머나먼 화장실로 갈 것이다.
누군가 먼저 들어가 있는 화장실에서는
오줌소리는 들리징 않고 끙끙거리는 소리만 끈질기다.
건너편 침대에서는 요도에 관을 넣어
피 섞인 오줌을 빼내는 투명 플라스틱 통이 있다.
벌건 오줌이 반쯤 차 있다.
그 옆에는 일생일대의 힘을 쥐어짜 숨 쉬는 침대.
또 그 옆에는 기계로 목구멍 찰거머리 가래를 빼는 침대.
모터 소리에 맞추어 내지르는 지루한 비명.
그 소음 속에서도
깰 힘이 없어 할 수 없이 잠들어 있는 침대.
갑자기 유리창이 흔들리고 커튼이 펄럭이더니
병실 밖 어디선가 고성과 욕설과 악다구니가 들려온다.
아까운 건강이 함부로 낭비되는 그 소리를
번쩍 눈을 뜬 열 개의 귀가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링거 맞듯이 엿듣고 있다.
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낫이라는 칼』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시집 《소》(2005)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