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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경기지사]
지난 10월 4일 오후 경기도 굿모닝하우스에서 남경필(51) 경기지사를 만났다. 굿모닝하우스는 옛 지사공관이다. 남경필 지사에게 “개선하고 싶은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오렌지요?”라고 되물었다. 남 지사는 이렇게 말하곤 다시 되받았다. “오렌지보다는 한라봉에 가깝지 않나요?”
“오렌지요? 한라봉은 어떻습니까!”
1998년 그는 부친인 남평우 의원의 별세로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사업가 집안의 아들로 자란 그는 연세대 졸업 후 잠시 아버지가 사주로 있던 경인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예일대에서 MBA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1990년대 초반 부모의 경제적 지원 아래 유학을 다녀와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던 일단의 젊은이들을 가리켜 언론에서 ‘오렌지족(族)’이라 불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부친의 후광으로 금배지를 단 그도 ‘오렌지’ 정치인으로 불렸다. 남 지사의 말이 이어졌다.
“일반 시민들이 저를 ‘금수저’로 지목한다면,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함께 살아본 사람은 나를 오렌지로 여기지 않았다. 내 아들은 아버지가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고 느껴서인지, 한라봉 정도면 아버지에 대한 비유가 적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공부와 일은 하지 않고 무작정 부모 재산에 기대 살지는 않았다.”
1998년 그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지사, 정병국·김부겸·김영춘 의원 등과 함께 미래연대라는 국회의원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20년가량 지난 지금 미래연대 멤버들은 여야의 대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남 지사는 1998년 이후 내리 5선을 했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당선됐다. 그러나 2014년은 시련의 시기이기도 했다.
― 경기지사 당선 직후(2014년 8월), 부인 이 모씨와 합의이혼했다.
“아내가 요구했고 내가 수용했다. 이혼 전 아내는 내게 ‘25년간 부모 밑에서 살았고 25년 동안 정치인 남경필의 아내로 살았는데, 남은 25년은 내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공감했다.”
― 이혼 문제는 그전부터 진행해오던 건가.
“2008년 이명박 정권 때 아내가 정치인 부인으로 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아내는 당시 정치 사찰의 대상이 돼 ‘지라시’에 오르내렸다. 스트레스로 체중이 급격히 줄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촉구한 게 화근이 된 것 같다.”
― 지금 두 사람은 모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두 사람은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이혼을 결정한 날 서로에게 감사의 큰절을 했다. 요즘도 그녀를 자주 만난다. 카톡방에서 아들 둘과 함께 매일 근황을 전한다. 늘 것 같지 않던 그녀의 체중이 다시 원상회복되고 있다.”
― 혼자 사는 생활은 어떤가.
“토요일은 온전히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빨래나 청소도 한다.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인 ‘요기요’나 ‘배달의민족’을 이용해 음식을 주문해 먹는다.”
남 지사는 주중에는 오전 9시에 경기도 청사로 출근하고 6시에 ‘칼퇴근’한다. 도지사로 인해 직원들이 새벽에 출근하거나 야근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또 주말의 경우 공식 일정을 거의 잡지 않는다. 일요일은 교회에 나갔다가 대선 정책 구상을 위해 만나야 할 전문가들과 식사를 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개인사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
― 재혼을 생각하고 있나.
“정치인으로서 느끼는 무게감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이혼할 때 누구든 먼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소개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걸 실천할 생각이다.”
남 지사는 정치인이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혼사를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 이혼하던 해에 큰아들은 군(軍) 내 폭행 및 성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아들은 결국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버지로서 가슴이 아팠다. 정치인 아버지로 인해 아들이 더 많은 비난을 받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정작 아들은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받을 걸 염려하고 있었다. 아들에게서 오히려 위안을 받았다. 큰애는 그동안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을 돌며 봉사활동과 여행을 했고 최근 한국에 돌아왔다. 아들이 복무하던 부대의 부대원 전원이 당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가족사가 인터뷰 주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생활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눈 건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인 남경필에게 가족사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 지사가 대선주자 중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내년 대선에서 다루어야 할 대한민국의 담론을 정치권에 던지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권이 풀어야 할 숙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평받고 있다. 그가 주제를 던지면 여야 차기 대권주자들이 화답하듯 또 다른 대안을 내놓고 있다. 남 지사는 차기 대선주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0위권에 머물지만 차기 대선의 논제(論題)를 선점했다는 측면에서는 다른 주자를 앞서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바로 모병제(募兵制)다.
― 왜 이 시기에 모병제를 꺼냈나.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군대 가는 게 신성한 의무라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앞으로는 소용없다. 이대로는 병력을 유지할 수 없다. 군대를 가면 과도할 정도로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제대하면 100%로 취업이 되고 3년 복무 후에는 7500만원을 모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또 군인뿐 아니라 경찰, 소방 공무원 등의 직군은 아예 군에서 교육해 배출하도록 하면 어떨까. 다음 대통령은 여성과 장애인을 제외하고 군필자만 장·차관에 기용하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새누리당도 군필자만 공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정치권에 던진 신선한 담론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이와 관련, 모병제와 징병제를 절충하는 ‘전문군인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유승민 의원은 현행 징병제하에서 부사관을 확대하는 방안을 거론하며 모병제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야당 차기 대선 후보인 더민주 손학규 전 대표는 “모병제 실시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평가했다. 다른 대선주자들도 이슈를 따라가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측은 주요 참모들이 모병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 지사의 대선 이슈 제기로, 대선 시계도 한층 빨라졌다.
남 지사는 수도권 팽창을 막고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수도이전을 위한 개헌’ 카드도 제시했다. 이밖에도 전시작전권 환수와 핵무장론 등 폭발성이 강한 이슈를 계속해서 던지고 있다.
― 전작권 환수나 핵무장 준비론은 그동안 미국 눈치를 보며 논의를 꺼렸던 주제다.
“최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민의 인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는다 해도, 미국인 상당수는 제2, 제3의 트럼프를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이 흐름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다음 대선에서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만약 트럼프 같은 인물이 미군 철수와 동시에 북·미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땐 우리에게 상황 변화를 파악할 시간조차 없다.”
― 대선 이슈를 던지기에는 조금 이른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헛된 공약을 많이 보아 왔다. 수도이전 같은 문제를 쉽게 던지고 뒤처리는 다음 정부가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상대가 군대를 갔느니, 안 갔느니를 따지며 흠집내기에 바빴다. 누구의 장인이 빨갱이였다거나, 누구 조상이 친일파였다는 식의 내거티브는 이제 그만하자.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호를 위해 우리는 국가의 미래를 놓고 논의의 장을 펼쳐야 한다. 내가 지금 어젠다를 던지는 건, 대선에 나올 후보들이 각자 정책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을 갖자는 의미다. 그걸 갖고 경쟁하면 국민은 과거에 비해 준비된 후보, 미래를 책임질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
― 누구와 상의해 이 같은 논제를 정하는지 궁금하다.
“주변분들과 주제를 정리한 다음, 최종적으로 원로나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발표한다. 윤여준 전 장관 같은 분들이 계신다. 나머지 전문가 그룹을 공개하는 건 먼저 그분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남경필 지사는 도정을 이끌며 중앙 정치에 영향을 줄 만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대표적 사례가 ‘연정’이다. 경기도는 새누리당 도지사가 이끌고 있지만 부지사는 야당 인사가 맡는다. 이를 통해 여야가 협치하고 정책 결정에 책임을 지는 도정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다. 지난 10월 4일 경기도청에서는 2기 연정도지사에 선임된 더민주 소속의 강득구 전 경기도의회 의장의 취임식이 열리기도 했다.
― 왜 연정인가.
“정치에 있어 시대정신은 권력을 나누고 공유함으로써 협치하라는 것이다. 대통령제 개헌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선출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제를 하되, 청와대와 국회가 충돌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야당도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을 임명하면 어떨까. 경기도가 펼치는 정치 시스템을 중앙정부로 확대하면 된다.”
― 경기도에 지방장관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하던데.
“경기도의회 의석수에 비례해 지방장관 4명을 임명하겠다고 했더니, 행안부에서 장관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 헌법에 국회의원은 장관 겸직이 되는데, 도의원의 지방장관 겸직은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미국 주정부는 지방장관제를 도입한 지 오래다. 정치는 이제 대립형이 아니라 통합형으로 가야 한다는 취지로 중앙정부를 설득 중이며, 위헌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다.”
― 지방자치 21년이 지났지만 지방의 새로운 시도는 늘 중앙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경기도는 안 된다는 규정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걸 뛰어넘으려 한다. 그동안 중앙정부는 경기도의 우리은행 인수 참여, 카카오뱅크 인수 등을 막았다. 그래도 우리는 경기도만의 스타일로 그 벽을 넘고 있다. 경기도주식회사가 대표적인 예다.”
― 경기도주식회사라면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다.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기도가 시도한 이른바 공유적 시장경제 모델이다. 재벌이나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기업을 운영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중소기업을 살려야 하고 소규모 창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나와야 대한민국이 살아난다. 이걸 위해 경기도는 플랫폼을 만들고 누구나 플랫폼 안에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입점료도 안 받는다. 배우 송중기 같은 CF모델도 지원한다. 심지어 물류회사도 거의 공짜로 이용한다. 중소기업은 최고의 물건만 만들면 된다.”
경기도는 청년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경기도 판교에 스타트업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자금은 경기도가 지원하고 운영은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맡는다. ‘인프라는 공공의 영역이, 운영은 민간이 맡는 창업 시스템’을 남 지사는 이른바 공유적 시장경제라고 소개했다. 경기도는 또 1500억원을 투자해 자율주행자동차를 테스트할 수 있는 공간(50만㎡)을 판교에 만들어 자율주행차에 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선점한다는 계획이다.
정치는 협치, 시장은 질서와 자유
그는 이처럼 정치와 경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문제를 ‘대한민국 리빌딩’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부분에 대한 남 지사의 설명이다.
“정치는 협치, 시장은 질서와 자유, 이걸 한마디로 압축하면 ‘배려 자유주의’다. 여기서 연정과 지방장관제가 나왔고 공유경제 모델도 출발했다. 경기도가 만든 정치와 경제 거버넌스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만드는 게 나의 목표다.” 남 지사는 10월부터 내년 초까지 일본 도쿄대학, 독일 자유베를린대학, 미국 예일대학을 돌며 경기도만의 정치 및 경제 모델을 발표할 예정이다.
― 대선 과정에서도 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더민주 김부겸 의원과 자주 만난다. 김부겸 의원은 사드에 반대하면서도 국익에 부합하는 국민 여론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때 내가 ‘형이 대통령 되면 장관으로 써달라’고 했다. 김 의원은 오히려 내게 ‘나도 (니가 대통령 되면 장관으로) 들어갈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바로 ‘팀 오브 라이벌스(Team of Rivals)’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자신의 경쟁자를 기용함으로써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아름다운 정치를 꿈꾼다.”
‘팀 오브 라이벌스’는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이 책에서 링컨은 대통령 당선 뒤 정치적 경쟁자들을 정부에 적극 기용함으로써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게 된 점이 주로 소개돼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제가 박 대통령에게 배우고 싶은 것은 국민이 그를 ‘지도자다운 인물’로 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내가 박 대통령에게 드리고 싶은 것은 나의 장점 중 하나인 ‘열고 나누면 커진다’는 철학이다.”
남 지사는 취임 직후 경기도지사 공관과 터를 시민에게 돌려줬다. 경기도지사 공관은 1967년 지어진 국내 ‘1호 공관’이다. 굿모닝하우스로 이름 붙여진 이 공간에는 게스트하우스와 세미나 공간이 들어섰고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약 1만㎡(3000여평)의 공관 터에서는 매주 야외 음악회가 열리고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오는 장소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