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와 인간 자유에 대한 단상
필레 7-20; 루카 17,20-25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2024.11.14.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윤석열과 김건희라는 두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그 부인이라는 지위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주어진 지위에 허용된 자유를 남용하는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정치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생각해 보면, 역대 어느 대통령도, 어느 영부인도 이토록 천박하고 방자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전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외교와 안보, 경제와 무역, 민생과 복지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낮은 성과를 올리고 있으며, 국가 재정도 파탄 지경에 이른 이러한 무능하고 무도하며 무책임한 정권에 대하여 국민들이 바라보는 국정수행 평가도 20%를 밑도는 지지도를 각종 여론조사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정농단을 일삼다가 국민들에게 탄핵되어 쫓겨난 박근혜 정권의 말년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이제 막 임기 중반을 넘기고 있는 윤 정권의 말로를 걱정스럽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시대의 징표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주권재민의 시대에 왕정시대의 임금처럼 처신하고 있는 현 대통령은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가, 또 대통령은 그렇다 치고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의 지위를 가지며 책임을 지고 있는 백만 공직자의 처신은 또 왜 저렇게 어눌한가, 더 근본적으로 이렇게 큰 국가적 위기에서 이들 공직자들을 떠받치고 있는 국민과 인간의 자유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흔히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의 내세에서 기대하고 있는 통념과는 반대로, 천국의 현재적이면서도 현장적인 성격에 대해 환기시키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친구가 된 오네시모를 노예로 소유하고 있는 필레몬에게 쓴 짧은 편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천국의 현재적이면서도 현장적인 의미에 비추어 노예제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예제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재산이나 가축처럼 취급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류 역사상 대표적인 사회악입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타인의 소유가 되는 자입니다. 인류가 집단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집단 간 분쟁과 전쟁이 잦아졌고, 패배한 집단의 생존자들이 승리한 집단의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곤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노예제도는 유사 이래 세계 어디에서도 생겨났던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서양의 고대 로마 시대에는 물론 우리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근대 유럽에서는 천부인권 사상에 따라서 유럽 각국의 국민들에 대해서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나 타인종에 대한 노예무역은 한동안 광범하게 행해졌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소유와 매매는 국제조약과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으나,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성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인신매매가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조선 시대에도 문반과 무반으로 나뉘어 사회의 통치를 담당하는 양반과, 통역이나 의술 또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인, 농업이나 어업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상민 그리고 도축업, 무속 등에 종사하는 천민 등으로 신분을 나누는 신분 질서가 엄존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온 천주교는 처음부터 만민평등과 남녀동등 사상을 천명하였으므로 신분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 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끔찍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조선 시대에 천주교 신자가 된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이에 감화된 노비들 중에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조선 왕조가 신분 질서를 철폐한 것이 1894년 동학전쟁 이후이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백 년 정도 앞서서 인권의 존중과 양심의 자유를 실현한 셈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된 유다교는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들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이후 자유와 해방의 정신은 유다교의 근본 이념이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로마 제국의 노예제도를 비롯하여 비인간적인 신분 질서를 타파하려는 노력은 제도 교회 바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1789년, 미국의 흑인노예 해방령이 1861년이요, 세계인권선언이 국제연합에서 채택된 때가 1948년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노예의 신분이나 노예의 상태에 얽매여 있지 아니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이건 금지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히브리인들
사도 바오로 역시 그의 신앙과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미루어 보아 당연히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강고한 로마 제국을 상대로 무모하게 투쟁하기보다는 노예였던 오네시모의 주인인 필레몬을 설득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노예들에게 이 사회악에 대항하라고 하기보다는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되 주인의 마음을 감복시켜 사실상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를 해소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에페 6,5) 그는 사회악으로서의 노예제도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보다는 술과 쾌락 등으로 죄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권유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인 자유보다 더 근본적인 정신적 자유를 중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종 개념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기도 했고(로마 2,2) 교우들에게도 ‘죄의 종’으로 살아가지 말고 ‘의로움의 종’ 또는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라고 권고하기도 했습니다.(로마 6,18.22 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시는 가운데 ‘종’이라는 소재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회악으로서의 노예제도를 비판하거나 폐지하기 위해 노력하시기보다는 당신이 하느님의 종이며 인간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종처럼 처신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편으로 예수님께서 노예제도를 옹호하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도 교회 바깥에서이기는 했지만 역사상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폐지하려고 투쟁했던 사람들은 개별 그리스도인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적 신념을 공유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라 보더라도, 노예제도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배치되는 사회악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투쟁하고 노력하여 공동선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는 사회악에 저항해야 마땅하고 힘을 합쳐 개선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렇듯 사회악 근절을 위한 사회적 증거가 행동으로 실천될 때라야 교회가 선포하는 종교적 진리도 설득력을 얻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사회악 근절과 공동선 실현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의 노력에 지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중심 메시지는 사람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이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는 사회적 신분 차별 금지에 따라 철폐되었다고 하지만, 재산과 학력의 차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현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회악을 근절하고 공동선을 증진하자면 경제적 불평등 현실을 개선하거나 타파하려는 노력을 제도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주거, 보육 및 교육, 고용 및 의료 복지 등에서 남아 있는 경제적 불평등 현실을 국민의 기본적인 사회권으로 보장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정치적 노예로 삼고 군림하는 자들의 정치적 무도함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주인의식을 지니고 정치적 자유를 자각하고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