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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의 변호사 개업을 막는 대신 연봉의 90%를 지원하면서 법률구조나 봉사활동, 후학 양성 등의 공익활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돼 법조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법조계 최고위직 판관(判官)들의 로펌·사기업체 재취업이나 변호사 개업을 금지해 전관예우 논란을 종식시키고 사법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를 확보하자는 취지이지만, 국민의 세금인 예산으로 퇴직한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물론 이들의 보좌하는 수행비서들의 월급까지 주도록 하는데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동철(60)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15일 '전직 대법원장 등의 공익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법 적용 대상은 전직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이다.
제정안에 따르면 전직 대법관 등은 공직자윤리법이 정한 연간 매출액(외형거래액) 100억원 이상의 로펌 및 사기업체의 취업이 제한된다. 또 공익 목적의 수임을 제외한 변호사 업무도 금지된다. 대신 국가가 현직 대법관 등이 받는 연봉의 90% 상당의 공익활동 지원금을 지급해 공익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공익활동에는 사법 발전을 위한 중요정책의 수립에 관한 자문과 법조인력 양성, 법조인의 공익활동 활성화, 경제적 취약 계층을 위한 법률상담 및 소송대리, 기타 법률사무 등이 포함된다.
대법원장과 헌재소장이 현재 매달 1024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퇴직 후 공익활동 지원금으로 매월 921만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 725만원을 받고 있는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652만원을 받게 된다. 여기에 대법원장과 헌재소장은 5급 비서관 및 9급 비서 각 1명 등 총 2명의 비서를,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9급 비서 1명을 각각 지원받는다. 차량제공 등 교통과 통신 비용, 사무실도 지원한다. 전직 고위 법관 1인당 매년 2억원 안팎의 예산이 필요한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법관 수는 대법원장을 포함해 모두 14명이고, 헌법재판관은 소장을 포함해 9명이다.
공익활동 지원금을 받을 동안에는 다른 법률에 의한 연금이 지급되지 않으며, 전직 대법관이 공직에 다시 취임하면 재임 기간 동안에는 공익활동 지원금 지급이 정지된다.
野의원 법률안 발의… 법조계 안팎서 관심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최소화… 불팔요한 논란도 방지"
"다른 기관과의 형평성 문제 함께 지나친 혜택" 지적도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최소화… 불팔요한 논란도 방지"
"다른 기관과의 형평성 문제 함께 지나친 혜택" 지적도
김 의원은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전직 대통령에게 대통령 보수연액의 95%를 연금으로 지급하도록 규정한 점을 참고했다"며 "최고 법관으로 재직하다 퇴임한 분이 변호사 개업을 해 돈을 버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이 분들이 지식과 경륜을 활용해 공익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지난 2010년 18대 국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법안을 발의해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됐지만 임기만료료 폐기된 바 있다.
제정안에 대해 법조계의 견해는 엇갈리고 있다.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를 최소화하면서 공익활동에 전념케 해 전관예우 등의 불필요한 논란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행정부 등 다른 기관과의 형평성 문제와 함께 과도한 혜택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전직 헌법재판관은 "미국은 법관을 마치면 '시니어 저지(senior judge)'로 임명해 법관에 준하는 보수를 준다"며 "존재조차 불분명한 전관예우 의혹을 들추며 무작정 변호사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직업선택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수 있는데, 제정안처럼 공익활동에 전념케 하면서 비용을 국가가 지원한다면 위헌 소지가 낮은 적절한 절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도 "그동안 전직 고위법관들이 공익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이나 소송대리를 하고 싶어도 퇴직 후 지급되는 연금만으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었다"며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형근(58·사법연수원24기)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국고에서 보수를 지급하게 되면 공익활동 자체가 공무와 다름없게 돼 새로운 공무원 제도를 신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다른 기관 퇴직 고위공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생길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입법"이라고 비판했다. 박찬운(53·16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공익활동은 스스로 하면 되는 것이지 국가로부터 지원받을 필요가 없다"며 "전직 고위 법관에 대한 특혜"라고 지적했다.
전관예우 방지특례법안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운영중인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하창우)의 관계자는 제정안에 대해 "전직 고위법관의 개업을 제한하는 대신 공익 목적의 법률사무를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정한 수준의 보상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연봉의 90%라는 수치가 적정한지는 국민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