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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명원(陳明遠)
16-17세기, 서구각국은 르네상스, 신대륙발견, 계몽운동, 종교개혁, 산업혁명, 민주공화등의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겪으며, 현대문명을 계속 새롭게 만들어갈 때, 동방에는 3개의 "석양의 노을이 아름다운(夕陽無限好)" 늙은 대제국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대청제국(1616-1911), 남아시아의 무굴제국(1526-1858), 서아시아/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친 오스만제국(1453-1922).
무력정복,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통해 건립된 이 세개의 대제국은 여전히 그들의 거대한 몸집을 가누고 있었다. 셋은 모두 천만평방킬로미터가량의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고, 모두 수천만 내지 억이상의 많은 인구를 통치하고 있어 당시 세계의 3대 "지대물박(地大物博, 영토도 넓고, 물산도 풍부하다)"의 인구대국이었다; 그들의 영토와 인구는 각자가 모두 유럽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유럽은 전체 합쳐 인구가 1억이 되지 않았고, 프랑스와 영국은 1천만명도 되지 않았다)
3대제국은 모두 이민족이 고대로부터의 전통있는 문명지구를 침입하여 건립한 것이었다.
그들은 각자 지역문화권내에서 중심적이고 지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이슬람문화권의 대표였고, 무굴제국은 인도문화권의 대표이며, 대청제국은 한자(유가)문화권의 대표였다. 정치체제에 있어서, 3대제국은 모두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적 전제군주국가였고, 방대한 행정관료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황제는 "유아독존"의 정통권위이며, 정치경제권리의 분배와 행사는 모두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3개제국은 모두 농업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공업이 부수적이었다. 서방은 현대화된 산업사회에 돌입하였는데, 이 3대제국은 여전히 중세고대시대의 '자급자족'적 자연경제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내부는 갈수록 엄중해지는 '흰개미'식의 부패가 발생하였고, 중앙통치의 권위는 점차 경직되고 쇠락하였으며, 관료체계의 효율이 점차 저하되고, 매관매직, 탐관오리가 이미 보편화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일찌기 용맹을 떨쳤던 군사역량도 현저히 기울어졌다. "한때는 유럽에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던 오스만 군대는 그들 자신의 군주와 백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랑제브황제이후의 무굴제국의 군대도 형편없어졌고, 대청제국의 만몽한팔기와 녹영병은 이미 아편에 찌들어 전투력이랄 것도 없었다.
3대제국의 기술과 생산력수준은 점차 서방에 뒤지기 시작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그들은 낙오하면서도 여전히 혼자서 희희낙락하고, 자기만 잘난 줄 알았던 병폐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발명이랄 것도 새로 한 것이 없지만, 심지어 서방의 새로운 발명에 대하여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방인들이 스스로 자부하는 "현대문명의 정수"를 세 나라의 군주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군주들은 모두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기기음교(奇技淫巧)'로 폄하되거나, '알라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배척했다. 그 결과, 3대제국의 생산력과 경제상황은 갈수록 경직되고 쇠락하며 썩어들어갔다. "자존에서 자비로' 전락하는 파락호가 되어갔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운명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이 건립한 군사봉건제국이다. 오토만제국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창시자인 오스만(Osman) 1세의 선조는 우구스 투르크(Uyghus Turk)사람이다. 소아시아서북부는 오스만제국의 발상지이다. 1299년, 오스만은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한다. 무하마드2세(1451-1481년재위)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1453년), 동로마(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다. 콘스탄티노플(나중에 이스탄불로 개칭)은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다. 이때, 오스만제국은 이미 동유럽발칸지구 및 다뉴브강유역을 직접 지배했다.
무하마드2세는 법전을 제정하고, 제국의 행정관리제도를 완비한다. 방대한 봉건군대와 선진적인 군사장비로 승승장구했다. 셀림(Selim) 1세(1512-1520년재위)는 이란을 공격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했다. 이리하여 아랍세계(이란 제외)를 지배한다. 영토는 1배이상 증가된다. 오스만 술탄은 무슬림세계의 우두머리 즉 칼리프가 된다.
술레이만1세(1520-1566년재위)는 동서로 정벌하여 6번 헝가리에 출정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포위공격하며(1529년), 여러번 이란을 원정하여 바그다드를 탈취한다. 셀림2세(1566-1574년 재위)의 재위기간동안,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스페인, 베니스와 교회의 연합함대를 격파한다. 해군은 지중해동부를 장악했고, 강역은 중유럽 헝가리 및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에 이른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때, 영토는 북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경내에 이르고, 서로는 아프리가의 모로코에 이르고, 동으로는 아시아 코카서스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아프리카내륙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지금으로 따지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근 40개국가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683년에 영토는 합계 1,195만평방킬로미터로 현재의 중국이나 인도의 영토보다 넓었다.
16세기초, 오스만제국의 통치기구는 완비된다. 종교법과 민법이 병행실시된다. 경내의 비이슬람민족은 밀레트제도에 의하여 종교자치권을 누렸다. 16세기중엽이후, 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술탄은 친정을 하지 않고 후궁에 빠지게 되며, 대권은 "수상(다비치)"의 손에 떨어진다. 근위군이 정치에 간섭하고, 술탄을 통제한다. 공상업은 몰락하고 사회는 불안해진다. 1683년-1792년간에 여러번의 대외전쟁에서 실패를 겪는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투르크전쟁(1828-1829), 두번의 투르크-이집트전쟁(1831-1833, 1839-1841)에서 연이어 실패한다. 1839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5개국이 연합하여 투르크-이집트전쟁에 간여한다. 이집트는 이미 사실상의 독립을 취득했고, 그리스, 세르비아도 모두 자치권을 획득했다. 제국은 겨우 아나톨리아, 이라크 및 루미리아의 일부지역을 지배했다. 압둘메치디1세(1839-1861년재위)와 압둘아지즈(1861-1876년재위)의 통치기간동안, 일련의 개혁령을 반포한다. 칙령에서 기독교도들이 일부 기본권리를 향유하도록 허용하였으나, 이 약속은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개혁의 중점은 여전히 군대와 행정의 개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교육과 법률을 개혁했다. 이어서 해군, 육군, 공정, 의학, 군사과학등의 학교를 만들고, 외교, 행정학원도 만들었다. 1846년 첫번째 국민교육계획을 만들고, 대학, 중학, 소학교의 완비된 체계를 확립한다. 1869년부터 소학교교육을 보급하기 시작한다. 개혁중, 유럽식의 민법, 형법, 해사법, 상법을 제정하는데, 이는 외국의 영사재판권을 취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오스만제국의 재력이 바닥나고, 국내인민의 봉기와 속지민족의 독립운동이 이어지고 열강의 침입을 받아 제국의 개혁은 효과를 보기도 전에 위기가 심화되게 된다.
186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신오스만인들의 군주입헌운동이 일어난다. 1877-1878년의 러시아-투르크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군대는 대패하고,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세인트 스테파노조약을 체결한다. 베를린회의(1878년)에서 루마니아, 세르비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불가리아의 자치를 인정하며, 카스르와 바툼을 러시아에 할양한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이 유럽영토는 겨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와 트라키아만 남게 된다.
1920년 앙카라에서 대국민의회가 구성되고, 1921년 대국민의회는 근본법을 통과시키고, 국명을 터키(Turky)로 고친다. 1922년 대국민의회는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술탄제를 폐지하기로 한다. 이로써 오스만제국의 역사는 끝이 난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건립되고 케말파사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무굴제국의 운명
무굴제국의 창시자는 바부르(Babur, 1483-1530)이며, 중앙아시아의 봉건군주였다. 1526년 티무르(Timur Lenk)의 후예인 바부르는 인도에 침입한다. 제1차 파니바트전투에서 로디(Lodi)술탄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힌두스탄의 황제에 오른다. 이는 무굴왕조가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무굴통치자는 투르크혈통의 몽골인이다. 스스로 몽골-투르크족의 후예라고 칭했다. 제국의 정치상층부는 무슬림이고, 사회기초는 힌두교였다. 바부르는 무력으로 북인도를 통일한다. 1530년, 후마윤(Humayun)이 제위를 계승한다(1530-1556년재위). 1540년, 후마윤은 곡녀성(Kanauj)전투에서 비하르아프간 군주에게 패배를 당하여 페르시아와 아프간으로 도망간다. 1555년, 후마윤은 다시 인도평원을 공격해서,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고 무굴제국의 인도통치를 회복시킨다. 1556년, 악바르(Akbar, 1542-1605)가 제위를 승계하고, 진보적인 내정개혁을 실행하며,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취한다. 이리하여 무굴왕조의 인도통치의 사회 ,정치적기반을 넓혀간다. 샤자한(Shajehan 1628-1658년재위)시대에 무굴제국은 국세가 흥성한다. 문화예술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이 시기의 예술특징은 민족전통과 중앙아시아 및 페르시아의 예술을 결합시킨 것으로, 유명한 타지마할릉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무굴왕조는 악바르의 내정개혁을 통하여 군주전제의 중앙집권적 군사관료정치체제를 확립한다.
행정제도는 군사화된다. 악바르부터, 모든 문무관리는 38급으로 나뉘는데, 군사방식으로 편제되고, 급여는 등급의 고저에 따라 부여받는 자기르(Jagirs, 군사봉건영지)를 부여받는다.
무굴사회는 여전히 농업이 위주였고, 농업에서 상품생산이 확대되어, 상품양식과 면화, 생사, 담배, 염료(인디고)등 경제작물의 전문화생산지역이 나타난다. 제품은 멀리 유라시아시장으로 퍼져갔다. 무굴제국초기에 수공업생산기술수준은 당시 유럽의 선진국가를 넘어섰다. 수공업생산의 주요형식은 봉건제경제의 공방과 가내수공업이었다. 대형관영공방의 우수한 품질의 제품은 주로 궁중이나 귀족의 사치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는데 썼고, 그 다음으로 수출했다. 일부 항구도시에는 상인들이 선급금을 주고, 원료를 제공하고 그 제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수공업자의 소형공방에서의 생산을 콘트롤했으나, 아직 선진적인 공장은 출현하지 않았다.
아우랑제브(Auranzeb, 1658-1707)통치시기에 남인도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확장한다. 왕조의 판도는 건체 남아시아대륙을 포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강제적으로 정교일치의 정치체제를 강제하고, 힌두교민에 대한 박해정책을 회복시킨다. 그리하여 라지푸트(Rajput)봉건군주, 시크교도 및 마라트인들의 격렬한 반항에 부닥친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각성의 총독은 속속 독립하여 할거하니, 무굴제국은 분열된다. 1740-1761년의 기간동안, 델리의 무굴황제는 인도에 침입한 페르시아인, 아프간인 및 마라트봉건군주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1764년, 무굴황제인 샤알람 2세(Sha Alam II)는 북사르(Buxar)전투에서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패배하여, 무굴왕조는 영국식민지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명의상으로는 1858년까지 존속한다.
제3대황제인 악바르(1542-1605)부터 제6대황제인 아우랑제브(1658-1707)까지의 통치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기이다. 강역도 가장 넓었고, 경제도 번영했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무굴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3대제국의 유사성
대청제국의 사료를 가지고, 무굴제국, 오스만제국과 비교분석하다보니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다: 3자간에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3대제국은 이민족이 고래의 전통문명지구를 침입하여 건립된 것이다. 대청제국은 화하문명을 접수하였고, 무굴제국은 인도문명을 접수하였고, 오스만제국은 비잔틴(그리스)문명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3대제국은 모두 영토, 인구, 정치, 경제가 동일한 유형에 속한다. 그리고 군사정복, 정권수립, 경제발전, 문화통합의 역사과정에서 공통된 규율이 발견되고, 각자의 특색도 나타난다.
또한, 대청제국에만 태평성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3대륙에 걸친 오스만제국과 남아시아의 무굴제국도 태평성대가 있었다.
16-17세기, 오스만제국에는 살림1세(1512-1520년재위), 술레이만1세(1520-1566년재위), 살림2세(1566-1574년 재위); 무굴왕조에는 악바르(Akbar, 1542-1605), 자한지르(Jahangir, 1605-1627년 재위), 샤자한(Shajehan, 1628-1658년재위), 아우랑제브(Auranzeb, 1658-1707)
이들의 시대는 중국의 강희(1662-1722), 옹정(1723-1736), 건륭(1736-1796)의 시대와 비교하면 아주 가까운 시기일 뿐아니라,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다.
출처
http://blog.daum.net/shanghaicrab/14689489
http://blog.daum.net/shanghaicrab/14689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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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유럽 찜쩌먹을 정도의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대제국
이라고 하였으나 오토만 제국은 검색해보고 KIN~!
첫댓글 오스만제국은 비잔틴 문명을 접수하였다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요? 영토와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 계열인데... 투르크도 이슬람 문명 쪽에선 반 이방인 계열이니 준 이슬랑 문명이 이슬람문명을 접수했다고 해야할것 같은데.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던 영토의 대부분이 과거 동로마령이었습니다. 이슬람이 초기 발흥했을 때, 지중해-근동의 두 강자였던 동로마와 페르시아 영토를 접수하였고(페르시아는 아예 멸망) 그 이후 동로마령 아시아-아프리카 땅은 주로 투르크령으로, 페르시아 땅은 한때 오스만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사파비조 등 다른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이슬람 세계라 하면 투르크와 이란 양측 모두를 일컫는 말인데(종파, 문명상 차이가 크지만) 투르크가 반쪽만 차지하고 이슬람을 접수했다고 하면 좀 이상하죠. 투르크 인구, 영토 대부분이 동로마 혹은 그 세력권(동유럽)이었습니다. 오스만령 된 후에도 기독교 지킨 경우도 많았구요.
중은우시선생의 영향력이 날로 높아져가는군요...--
이분 블로그를 한번 구경해본적이 있는데 침소붕대가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분 블로그에서 원숭환을 얼토당토않게 까는 글 있던데 다른 사람들이 엄청 악플 달아놓았더군요.
(제가 원숭환 얼마나 좋아하는데ㅠㅠ)
그분은 그저 '번역'만 한 겁니다...^^; 원작자들은 되인(胡人)임...ㅋ
갑부님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거기에 중은우시님께 악플 다는 사람들에게 진정하라고 댓글 달았어요 ㅎㅎ
그런데 프랑스 인구가 16~17세기에 천만명도 되지 않았다고요?; 17세기 말이면 거의 2천만명 가까이 되지 않았나요?;
2천만 정도가 맞는 것 같아요^^
16세기의 프랑스 인구는 분명 2천만명 아니면 그 이상이죠. 원글쓴 사람이 뭔가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듯...
1515년에 1600만 명, 1547년에 1,700만 명의 인구를 가졌던 당시의 프랑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프랑스의 인구는 1700년경에 2천만명 정도였는데, 18세기 말에는 2천 6백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600년 쯤이면 2천만 가까이 되었겠네요.
그래서 중은우시 선생 블로그의 글들이 쪼깨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거져... 이런 오류나 비약이 좀 많거든요...--
무굴이나 청이나 오스만이나..원류는 몽골초원...ㅋ
만주족의 청나라는 몽골초원이랑 별 관계 없습니다. 만주족은 [수렵민족]이기에 유목민인 몽골인과는 다르고, 만주족의 고향인 만주일대는 삼림과 하천이 얽힌 '삼림지대'에요...^^; 때문에 반농반목의 생황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