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실도 R&D센터로 옮겨 … 선박엔진 냉각기 세계 1위
| |
김강희 회장(맨 오른쪽)이 직원들과 함께 신제품 개발에 관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 동화엔텍의 다음 목표는 육·해·공을 아우르는 글로벌 열교환기 전문업체로 도약하는 것이다. [송봉근 기자] | |
관련핫이슈 | |
동화엔텍 김강희(80)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그때’란 동화정기란 이름으로 부산 영도에 직원 3명의 회사를 세웠던, 1980년을 말한다. 당시 김 회장은 별도로 ‘종합해사’라는 작은 선박 수리회사를 동업으로 꾸려 가고 있었다.
열교환기 수출을 위해 국내에 드나들던 일본 기업인에게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게 시작이었다. 열교환기는 선박 엔진의 열을 차갑게 식혀 주는 장치다. 배가 운항하는 데 꼭 필요한 부품이지만 기술이 없어 국내에서는 만들지 못했다. 조선사는 100% 일본 제품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당시만 해도 몹시 가능성이 작았던 이 분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엔지니어를 3개월 동안 일본에 연수 보냈다. 지금의 홍성희 동화엔텍 사장과 다른 직원이 가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설계 같은 핵심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돌아온 엔지니어들이 종합해사 옆 허름한 창고에서 열교환기를 만들었다. 당연히 성공할 리 없었다. 1년여 동안 수없이 실패를 반복했다.
“도저히 안 되는 건가 낙담도 많이 했죠. 하지만 한길을 파니 결국 성공하더라고요.”
운도 따랐다. 마침 82년 6월 쌍용중공업이 국산 선박 엔진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국산 열교환기가 필요했다. 동화엔텍 열교환기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시운전도 성공이었다. 김 회장은 기대에 부풀었다. 바로 당시 국내 1위 조선사 현대중공업의 문을 두드렸다. 시운전도 문제없었으니 이제 수주가 봇물처럼 터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건 퇴짜였다.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한 외국 선주들이 한국 중소기업의 기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주저앉나 싶었다. 지극한 정성은 통하는 법이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퇴짜를 놨던 현대중공업이 다시 동화엔텍을 찾았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우린 배의 껍질만 만들고 알맹이는 다 유럽이나 일본 거다. 내가 책임질 테니 국산 부품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84년 현대중공업 선박에 동화엔텍이 만든 열교환기가 처음 들어갔다. 성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대우·삼성중공업 등 다른 국내 조선사에도 자동으로 길이 열렸다.
“정주영 회장이 모험을 걸었던 거죠. 84~85년이 조선 불황이었는데 현대중공업 덕분에 명맥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동화엔텍은 현재 미쓰비시·미쓰이·히타치 등 주요 일본 조선업체에도 열교환기를 납품한다. 눈칫밥 먹어 가며 기술을 배웠던 기업이 이제는 기술을 가르쳐 준 일본 기업을 압도하고 있다. 창고에서 시작한 회사는 이제 녹산공단에 번듯하게 자리 잡았다.
| |
하지만 회사에는 시련이 더 필요했나 보다. 성장을 위한 시련 말이다. 바로 97년 외환위기의 충격이다. 800원대였던 달러당 원화 값이 폭락하며 회사가 휘청했다. 미리 수주는 받아 놨는데 원자재 값이 배로 뛴 탓이다. 납품 주문을 했던 한라중공업이 부도 처리되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이때 회사를 살리겠다며 나선 게 노조였다. 자진해 월급을 10%씩 반납하기로 결의하고 야간 작업에 나섰다. 다행히 회사는 1년여 만에 정상화됐다. 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월급 반납분만큼 회사 주식을 나눠 줬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을 모른 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화엔텍 지분 16.3%가 직원들에게 돌아간 이유다. 이렇게 차곡차곡 노사 간 신뢰를 쌓아 간 덕분에 동화엔텍에선 한 번도 분규가 없었다.
“88년 처음 노조가 생겼을 땐 무작정 화가 났는데, 생각해 보면 직원들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이젠 ‘가족사랑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노조 덕에 든든하죠.”
동화엔텍은 선박 엔진용 열교환기(공기냉각기)에선 세계 1위(점유율 27%)다. GEA(독일)나 베스타스(덴마크) 같은 유럽의 큰 기업보다 앞선다. 한국 업체가 든든한 후원자가 돼 준 덕도 컸다. 하지만 기술 전파가 워낙 빠른 분야여서 한국 조선업체만 믿고 방심할 순 없다. 김 회장은 “남들이 따라올 수 없도록 끊임없이 페달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 이 페달이 바로 연구개발이다. 2007년 4400㎡ 규모의 독립 연구개발센터를 지었다. 열교환기 성능 실험을 위해 고가의 실험장비를 갖췄고, 석·박사급 연구 전담인력 11명이 일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때부터 집무실을 본사에서 연구개발센터로 아예 옮겼다. 그의 사무실 벽엔 연구개발 스케줄 표가 여러 장 붙어 있다. 당장 돈이 되는 기술은 아니지만 연구소에서 개발이 착착 진행되는 걸 확인하는 게 김 회장의 낙이다. 이 연구개발센터에서 선박용 MGO(마린가스오일) 냉각기 같은 특허 상품들이 탄생했다. 지금은 조선산업의 불황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산업 전체가 불황에 빠졌다. 수주 취소로 동화엔텍도 어려웠다. 한 번도 뒷걸음친 적 없었던 매출이 지난해 12%나 줄었다. 그래도 김 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차다.
“이것도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우리가 너무 조선산업에 치우쳐 있던 게 문제였는데, 이제 다른 쪽을 찾아야죠.”
김 회장은 인재 욕심이 많다. 중소기업이어서 인재를 구하기 어렵기는 동화엔텍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김 회장이 직접 다리품을 팔고 다닌다. 대학 특강도 열심히 한다. 김 회장이 “부산 대학가에서 나 모르면 촌놈”이라고 말할 정도다. 대기업만 보는 대학생들이 동화엔텍 같은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돈 많이 버는 회사보다는 직원들이 나중에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그러려면 작지만 탄탄한 강소기업으로 회사를 키워 내야죠.”
그래서 김 회장 집무실 문에는 ‘회장실’이 아닌 ‘인재 육성의 방’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