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로 전후
일본 문단을 사로잡은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그녀의 눈에 비친 한국인, 한국문화, 한국어 이야기!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이 흔치 않던 시절. 시인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던’한국어 배우기에 나서고, 윤동주 시인과 무용가 최승희 , 까치 , 무궁화 , 장독대 등 한국 문화를 이루는 갖가지 아이콘들을 섭렵해 가며 한글의 매력과 풍취에 빠져든다. 아직 한국 곳곳에 반일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던 시절. 그녀가 타자로서 보고 느낀 한국의 언어와 문화, 풍속은 어떤 모습일까? ‘반갑지 않은 일본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표정은?
근대와 현대의 풍경이 상존하던 한국의 70년대, 다듬어지지 않은 한국인 특유의 풍취와 멋, 다감한 모습들이 시인의 섬세한 감성으로 그려진다.
“영어도 불어도 아니고 왜, 하필 한글이야?”
잘 나가던 그녀가 한국어에 탐닉하게 된 이유는?
전후 일본 시단을 대표했던 최고의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이바라기 노리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 세대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노래한「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일본의 여성 시인이다. 세계 각국의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된 이 시는 2년 전 국내에서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전후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몇 안 되는 여성 시인으로, 살아생전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남편과 사별 한 뒤, 자기 치유의 일환으로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문학과 민중예술,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95년, 윤동주 시인에 관한 그녀의 에세이(본문 214p)가 일본의 국정 교과서(국어 과목)에 실리게 되고, 이를 소재로 한 <윤동주 특집> 프로그램이 NHK TV를 통해 연이어 방송되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본래는 희곡작가로 문단에 데뷔했던 노리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그녀는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 지배와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등 각종 비인간적 사건들을 몸소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각인하고 지나친 우경화를 경계하는 민주시인으로서 체제 반성적 시들을 치열하게 쏟아냈다. 특히, 63세가 되던 1999년에 출간한 시집『기대지 말고倚りかからず』는 일본 사회의 반민주적인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며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체제 반성적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한국문학의 소개와 번역에도 힘을 쏟아 1970년대부터 김지하와 안우식, 홍윤숙 시인 등 한국 문단의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1995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명시들을 번역 소개했는데, 이 공로로 요리우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한글’을 소재로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그녀의 칼럼을 모은 것으로, 1986년 최초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인 이야기
이 책은 그녀가 한글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시인으로서 감응하게 된 한국문화 전반에 관한 에세이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으로서 느끼게 된 한글의 매력과 그 저변에 깔린 한국인의 정서와 습속, 풍토들을 감수성 넘치는 필체로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언어를 다루는 장인답게‘딸기코’와‘치맛바람’,‘바람둥이’등등 신선한 상상력과 재기가 넘치는 한국의 일상어들을 수집해 가며 그 매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단어의 뜻에 담긴 문화적인 맥락들을 더듬어 보며 일본의 사례와 견주어 보기도 한다(본문 107~119p). 그렇게 한국어에 탐닉하던 시인의 욕심은 어느 순간 취향을 넘어 전문적인 분야에까지 나아간다. 무심코 흘려들었던 일본 사투리에서 한국어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쓰임새를 메모해 고서를 뒤적이기도 한다(본문 90~94p).
언어에 탐닉하던 시인의 욕심은 한국 본토 여행을 통해 한국의 문화 전반으로 보폭을 넓혀 들어간다. 단어를 매만지던 섬세한 시선은 일상 곳곳에까지 스며들어가고, 한국인의 눈에는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풍경도 시인의 눈에는 하나의 문화적 기호로 포착된다. 자기 그릇이 아닌 스테인리스 식기가 유행하는 한국의 식당 풍경에서 외세의 침략에 빈번히 시달렸던 한반도의 역사를 읽어내고(본문 156~157p), 할머니들이 모여 앉은 고즈넉한 농촌 풍경에서 경어체 사용에 관한 사회적 배경과 관습을 읽어내는 식이다(본문 78~81p).
한국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탓일까. 다소 감상적인 느낌도 없지 않지만, 타자의 눈에 비친 한국문화의 일상 풍경을 훑어보는 맛이 쏠쏠하다. 시인이 묘사하는 한국인들은 뜨거움과 호방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정열적인 모습, 이를테면 박력 있으면서도 붙임성 좋은 한국의 사내들을 한껏 추켜세우거나, 노랫소리 그득한 가정집의 저녁 만찬을 묘사하며 그 독특한 호기로움을 예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이 지닌 한국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일본에서 온 이방인을 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매번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저자는 한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이따금 일본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계심과 거부감, 선입견을 맞닥뜨리고 섭섭해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섭섭함을 스스로 희석시켜 가는 과정에서 일본 일방의 역사적 과오를 복기한다. 저자의 이런 반성적 사유는 전후 한국문학의 지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이어지고 이는 곧 한국과 한국문화, 한국인에 대한 통찰력 있는 관찰로 연이어진다. 독자들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된 시인의 한국어 배우기가 역사적인 디테일을 섭렵해 가며 한층 더 공적인 차원으로 그 결을 확대해 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젊어 요절한 시인에게는 특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킨 것 같은 맑고 깨끗함이 후세의 독자까지 매료시켜 항상 수선화와 같은 좋은 향기가 풍긴다. 요절이라고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반 년 전,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처음에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유학, 이윽고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적을 옮겼고,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시모가모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로 보내졌다.
거기서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기 직전, 모국어로 어떤 말을 큰 소리로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이 무엇인지, 일본인 간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주 씨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절명하셨습니다” 라는 증언은 남았다. 말하자면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통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시인 가까이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도 조금씩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9년째가 되는 1984년에 이취향 씨에 의해 그의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완역되었다.
내 의욕은 꺾였지만, 이취향 씨의 훌륭한 번역과 연구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동요까지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윤동주의 원시를 아는 사람은 예사가 아닌 노작(勞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윤동주의 배경을 알기 위해 철저하게 발로 걷고 조사한 그 정열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그가 유학했던 도쿄, 교토, 후쿠오카 형무소 등 그 족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80대가 된 전직 특별 고등 형사와도 만나는 등 모든 노력을 동원했지만 끝내 옥사의 진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안타깝지만, 전모를 밝히고자 했던 그 실증 정신은 신뢰할 수 있다. 언젠가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 명료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취향 씨가 보았던 곳, 조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일본 검찰의 높은 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죽음은 40여 년 전의 일이다. 왜 그렇게 비밀주의, 은폐주의로 일관하는 것일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진지한 연구자에게는 자료를 더욱 많이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5장. 역사에 깃든 한국문화의 표상들,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 中에서 - 215~217p
고대어가 남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대어 그 자체가 이웃 나라 말과 자매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언제 분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조몬 시대라고도 야요이 시대라고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는 모양이다. 그저 쇼나이 지방뿐 아니라 이즈모, 호쿠리쿠, 에치고, 데와, 아키타, 쓰가루 등 동해 부근의 지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이웃 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지만, 의외로 보수적인 측면도 있다. 특히 방언에서 그 보수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도호쿠의 쇼나이 사투리를 벗어나, 다른 지방과 대비한 부분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한글 일본 방언 일본어 의미 사용 지역
-줘 얏테, 쵸 해줘 나고야
벌다 보루, 봇타나 (돈을) 벌다 각지
달리다 타리이, 후다루이 기력이 없다, 따분하다 나가노, 기후, 아이치
마려워 시코마루, 시코마리따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 아이치, 시즈오카, 나가사키, 이와테
안기다 안키다 마음이 편하다 미카와
총각 총가아 젊은 독신남 머리 모양인 ‘총각(?角)’의 음. 방언이 아닌 공통어인지도 모른다.
바보 아호 바보 각지
언어학의 엄밀한 음운 법칙에 비춰 보면, 일본어와 이웃 나라 말이 대응되는 경우는 거의 200개 정도밖에 없다고 해서, 그 적은 수에 놀라게 되지만, 일본 각지의 방언을 포함한 대비라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규슈 사투리나 간사이 사투리에서도 많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귀에 익숙한 말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 안테나에는 걸리지 않고, 내가 자란 미카와 지방, 어머니 쪽 고향인 도호쿠 사투리만이 삐, 삐, 삐 하고 반응해 왔다. 상당수가 우연의 일치,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같은 뿌리라고 짐작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초보의 방담을 겁도 없이 적는 것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불고기가 워낙 유명한 탓에 한국 요리는 고기 요리가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상 메뉴는 채소 요리가 중심이고, 요리 방법도 다양하다.
김치는 절임 음식인데, 마늘, 고춧가루, 새우젓, 멸치젓, 생굴, 배, 채 썬 무, 밤, 대추 등을 함께 버무려 배춧잎 사이에 이 양념을 채워 만든다. 자연의 발효 작용을 이용해 각종 비타민과 유산균이 합성되는 구조이다. 소금이나 된장에 살짝 절인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한 맛의 하모니를 이룬다.
가정마다 김치를 담그는 방법이 제각각이고 그만큼 맛도 천차만별인 모양인데, 고춧가루의 강력한 펀치에 정신을 빼앗겨 버리는 까닭일까, 먹어보고 그 특징이나 차이를 판별하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김치 맛에 까다로운 사람들도 많아서 제 어머니가 담가야 진짜 김치, 다른 건 가짜 김치라고 호언하는 남성도 많았다. 어머니의 손맛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잡곡의 활약도 눈부시다. 밤, 수수, 피, 보리, 대두, 팥 등은 밥이나 죽, 떡, 과자 등에 풍부하게 쓰인다. 대용식의 하나로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맛을 조화롭게 활용해 밥을 짓는다. 오곡밥이 그 예로, 쌀로만 밥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오곡을 골고루 집어넣어 영양과 풍미를 배가시킨 게 특징이다.
서울에는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이라는 큰 시장이 있고, 이곳의 활기는 압도적이어서 눈이 핑핑 돌 정도다. 오곡을 비롯해 어패류, 건어물류, 육류, 돼지머리, 채소류, 의류, 생활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다. 말하는 가격대로 사는 건 바보인 듯, 가격 흥정은 필수이다. “깎아주세요” 하고 에누리를 시도하면 대개는 값을 깎아준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그렇게 비싸면 사지 않겠어요” 하는 표정으로 손님이 떠나려 하면 가게 주인이 먼저 에누리를 제안하는 경우도 많다.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은 꽤 볼 만한데, 쌍방이 서로 이 과정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럭비처럼 서로 부딪치고 에누리를 하는 동안 시장에는 활기가 넘쳐흐르고 사람 냄새 자욱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 4장. 여행길에 마주친 풍경, 「마늘과 잡채, 김치의 비밀 」中에서 - 159~16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