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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으로 걸어온 전법 반세기 / 현익채
나의 삶 나의 불교
청소년 시절의 추억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주마등처럼 명멸하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포근하고 아늑한 그리움으로 여울져 온다. 나는 1950년, 어머님의 팔공산 염불암 백일기도 공덕으로 경북 경산시 임당동에서 태어났다. 두 딸만 낳은 뒤 5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기에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세 살 되던 해 아버님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방 한 칸 부엌 하나뿐인 오두막집에는 모진 가난만 남았다. 보릿고개 시절,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수학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다 잠들면, 다음 날 아침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곤 했다. 마을 근처에는 목욕탕조차 없어 몸을 자주 씻지 못했고, 속옷에는 이가 들끓어 밤마다 이를 잡는 것이 일과였다.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던 뒷동산은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번성했던 신라 초기의 소국 압독국(押督國)의 유적지이다. 이곳에는 친구 이제열의 사과밭이 있었는데 1980년대 발굴을 통해 널무덤, 금동관, 은제 허리띠 등 다양한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뒷날 사적 300호 임당동 고분군으로 지정된 이곳에 올해(2025년) 5월 22일 임당유적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이렇듯 내 고향 경산은 찬란한 압독국의 유산과 원효대사, 설총, 일연 스님 등 우리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 분 성현이 탄생한 문화의 고장이다.
1962년 임당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임당동에서 경산중학교까지 십 리 남짓한 먼 길을 걸어서 등교했는데, 겨울철 한들 신작로를 걸을 때면 매서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하굣길 거리에서 파는 풀빵은 언제나 먹음직스러웠지만, 명절 외에는 용돈 한 푼 없던 시절이라 그저 군침만 삼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골의 상부상조 전통은 참으로 아름다워 이웃집에서 별미를 만들거나 제사를 지내면 여러 이웃과 나누어 먹는 미풍양속이 있어 훈훈한 정이 넘쳐흘렀다.
경산중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대구 시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나는 부산에 계신 두 누님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야 할 처지라,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98년 동래부학교로 개교한 동래고등학교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학교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구국운동의 산실이 되어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하여 자부심이 높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69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했다.
대불련과의 인연, 56년 전법의 길을 열다
당시 부산대학교에는 교내 서클로 부산대 불교학생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나는 매주 금강사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대불련 부산지부) 법회에도 4년간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며 불심을 키웠다. 대불련 법회는 1969년 9월 대각사에서 반야사로, 1970년 6월에는 초량 소림사로 장소를 옮겨가며 정진했다. 소림사 주지이셨던 비구니 정일 스님께서 언제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학생들을 보듬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1969년 7월 범어사에서 열린 제2차 부산지부 수련대회를 시작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여 차례가 넘는 수련회에 참석하거나 직접 주최했다. 그중에서도 1970년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해인사에서 열린 대불련 부산지부 제4차 수련대회는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부산지부 총무였던 내가 해인사에 수련대회 협조 공문을 보내자, 훗날 동국대학교 총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주지 지관 스님께서 공문만 보낸 우리 대학생 불자들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답장을 주셨다. 수련 기간에는 고암 종정 스님의 법어를 듣고 수계를 했다. 특히 성철 방장 스님을 친견하며 들었던 ‘일체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법문, 그리고 일타, 지월, 홍교, 수산 스님의 사자후는 학생들에게 한없는 법열을 안겨주었다. 3학년이던 1971년 6월 나는 대불련 부산지부장에 선출되었다. 지부장을 하는 동안에는 체육대회, 수련대회, 지부 창립 6주년 기념행사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덕분에 학과 성적은 높은 학점을 받지 못했지만, 부처님을 만난 기쁨으로 지금까지 전법의 길을 걷는 굳건한 터전을 닦을 수 있었다.
부산불교홍법회의 원력과 발자취
대불련 활동을 통해 깊어진 불자로서의 원력은 졸업생들의 모임 결성으로 이어졌다. 내가 졸업하던 1973년 4월부터 10여 명의 졸업생이 초량 소림사에서 월례 법회를 가졌고, 이듬해 ‘부산불교홍법회’라는 이름의 대불련 동문 단체를 결성하고 회원 확장에 힘썼다. 1975년 5월, 제3대 홍법회장으로 선출된 나는, 교사 업무 후 시간을 이용한 6개월간의 편집 작업 끝에 《부산시 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와 회지 《홍법》을 발간했다. 이는 훗날 2025년 회향한 《근현대 부산불교》를 포함하여 21권(공저 포함)의 책자를 발간하게 되는 문서 포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부산지역은 청소년 불자 모임이 활발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홍법회는 간부들의 자질 향상을 위하여 제1회 부산불교학생회 간부수련대회를 1976년 3월 범어사에서 개최했다. 대불련 부산지부와 고등학생 불교연합회 간부 100여 명이 참석한 이 수련회는 홍법회 주관으로 3회까지 이어졌다. 이후에도 부산불교 학생지도위원회 주최로 1985년 제9회까지 계속되었다. 홍법회는 어린이 포교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홍법회 부회장이었던 이미애 선생과 함께 1977년 5월, 부산 최초의 불교 어린이회인 ‘법륜 불교어린이회’를 창립했다. 1978년 5월, 나는 부산 최초로 불교 단체 현황을 정리한 책자 《부산불교 안내》를 출판하기도 했다. 1979년 8월, 대불련 출신에게 문호를 더욱 개방하고자 부산불교홍법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불련 부산동문회를 발족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구도 행각의 동반자, 대불련 부산동문회
1979년 8월 30일, 우리는 초량 소림사에서 100여 명의 동문이 모인 가운데 범어사 주지 덕명 스님을 모시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동문회(대불련 부산동문회)를 창립했다. 이양환 선배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나는 총무를 맡아 동문회의 기틀을 다졌다. 1981년 제2대 김대현 회장 재임 시에는 《동문명부》를 발간했으며, 1996년에는 손정현 동문과 함께 1,500여 명의 동문 명단을 수록한 《동문명부》 2호를 편집했다. 하지만 1986년부터 동문들의 참여 열기가 식어, 대불련 부산동문회 활동은 이후 10년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1996년 6월, 대불련 부산동문회를 재창립하여 제4대 회장으로 옥치담 선배를 선출하며 다시금 포교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003년 8월, 법주사에서 대불련 본부 창립 40주년 기념 총동문대회가 열렸다. 이성균 동문이 주도적 역할을 한 이 행사에는 부산 동문들이 160명이나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매년 전국 동문대회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제21회 전국 동문대회가 열려 대불련 전국 동문들의 소통과 화합의 장이 되고 있다.
대불련 부산동문회는 2006년 4월 《대불련 부산지부 40년의 발자취》를 발간했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나는 주영배, 최은희, 김상희 동문과 2년간의 노력 끝에 4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집을 완성했다. 이 밖에도 불교 행사마다 자료를 꼼꼼히 모아 두 가지 자료집을 더 만들었다. 2021년에 송용호 동문과 함께 대불련 부산지부의 발자취를 담은 영상물 〈연꽃 피운 56년〉과 《대불련 부산동문회 사진으로 본 발자취(1974년~2021년)》가 그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산지역 대불련 활동이 다시 침체에 빠졌다. 급격한 탈종교화 현상과 저출산의 여파로 한때는 대불련 부산지부 법회가 중단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대불련 부산동문회, 교수불자회, 화엄승가회, 종단 등에서 대학생 포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으로 대학생 불교동아리가 재창립되며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뜨거운 신심과 원력이 강한 학생 불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다.
60여 사찰의 고등학생 불자회
1973년 나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거제도 해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곳에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75년에는 부산의 종립 금정중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청소년 포교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1975년 6월, 연등불교학생회를 창립하고 지도교사로서 매월 1~2회 법회에 참석하여 청소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동구 좌천동 연등사에서는 부산공고, 부산진여상 학생 40~50여 명이 매주 모여 부처님의 품 안에서 열심히 정진했다. 1994년 위암이 생겨 20년간 지도했던 연등불교학생회 지도교사직을 내려놓았지만, 부산불교교육대학, 부산불교신도회를 비롯한 여러 신행단체를 통한 전법의 길은 멈추지 않았다.
1979년 6월에는 부산불교 학생지도위원회가 발족됐다. 영주암 주지 정관 스님과 김태유 선생을 모시고 나는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2~3년 뒤부터는 부산불교 학생연합회 지도위원회 총무간사직을 10년간, 부회장직을 7년간 맡으며 거의 매월 개최되는 연합행사 실무로 하루도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부산불교 고등학생연합회 산하 각 사찰 학생회는 1993년 16개 지부에서 1999년 30여 지부로 늘어났다. 회원은 1,000~1,500여 명에 달했으며, 매주 토요일 정기 법회를 가졌다. 학생연합회는 해마다 4월 신입생 환영 대법회 및 불교 수첩 발간, 5월 부처님오신날 행사, 6월 체육대회, 7월 간부 수련대회, 9~10월 독경대회, 10~11월 찬불가 경연대회, 12월 합동 수료법회, 교리문답 대회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부산에서 부산불교 고등학생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회는 대한불교 청소년교화연합회 부산지부나 개별 불교학생회 몇 곳에 불과할 정도로 부산의 60여 개 사찰에서 각종 고등학교 학생법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전국 최초, 중학생 불교연합회 창립
돌아보면 불교종립학교인 금정중학교와 해동중학교에는 오래전부터 불교반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지만, 부산 시내 다른 중학교들에는 불자 모임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극복한 모임이 1982년 옥련선원과 혜원정사에서 창립된 불교중학생회다. 이를 계기로 나는 1983년 4월 금정중학교를 비롯한 학산여중, 동래여중 학생 50여 명을 모집하여 법륜사에서 ‘법륜불교중학생회’를 창립했다. 이후 김호상, 김미옥 등과 협의하여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 결성을 추진했고, 4개월간의 준비 끝에 1984년 10월 21일 법륜사에서 역사적인 발족식을 가졌다. 이는 전국 최초의 중학생 불자 연합체로서 청소년 포교에 그 의미가 크다.
창립 당시 13개 지부 300여 명의 학생이 동참했으며, 2년 뒤에는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보해선래 스님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호상 씨가 부산불교중학생 지도위원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나는 부회장으로 활동하다 1987년 제2대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때부터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는 ‘중불’, 부산불교고등학생연합회는 ‘고불’로 약칭되었다. 1985년 중불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3월 《불교수첩》(100페이지, 1,000부) 발간, 4월 범어사 신입생 환영 대법회, 5월 부처님오신날 행사, 6월 동래중 체육대회, 7월 범어사 간부 수련대회, 10월 법륜사 합동 법회 및 불교 웅변대회, 12월 법륜사 합동 수료식과 수계식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쳐나갔다. 나는 고불 행사와 겹치는 바람에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1996년 12월에는 사단법인 파라미타청소년협회 부산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부산지역 청소년들은 4년간 중불, 고불, 파라미타로 함께 활동했다. 2001년 3월 6일 파라미타 정기총회에서 파라미타 부산청소년협회(현재 협회장 백명숙)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불과 고불을 파라미타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현재 파라미타 부산청소년협회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부산불교신도회에서의 전법 활동
부산불교신도회는 1967년 5월 1일 중구 신창동 대각사에서 창립된 이래 부산불교 신행단체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1970년 부산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 대회는 마지막 일정으로 10월 15일 범어사에서 세계평화기원 대법회를 가졌다. 이에 앞서 부산불교신도회는 동주여상 대강당에서 ‘세계평화기도 동참 불교대강연회’를 개최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박기찬, 옥치담 선배의 부탁으로, 아직 대불련 학생이었던 나는 강길태, 이규섭 법우 등과 함께 풀통을 들고 부산 거리 곳곳에 대법회 포스터를 붙였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나는 1981년부터 부산불교신도회에서 중고등학생부장, 교무부장, 총무부장, 기획위원, 이사 등 20여 년간 다양한 소임을 맡으며 전법에 매진했다. 1987년부터는 중구 영주동 코모도호텔에서 매년 부산 불교계 인사 신년하례회를 개최했는데, 100페이지 분량의 부산 불교계 인사 회원 명부를 6~7차례 편집하며 연말연시를 분주하게 보냈다. 1985년부터 3년에 걸쳐 부산 시내 54곳의 신행단체 및 사암 신도회를 부산불교신도회에 가입시켜, 명실상부한 연합 단체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부산불교신도회는 직능 불교단체 결성에도 힘을 기울여, 1988년 7월 부산불교운전기사회(훗날 부산개인택시불자회로 개칭)와 1988년 9월 부산중등교원불자회를 창립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부산의 재가 신행단체를 대표하던 부산불교신도회는 2008년 11월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에서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를 새롭게 출범시키면서 재가 연합 단체가 분열되어 위상이 추락한 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 재단법인 불심홍법원 설립
나의 불교 활동 가운데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은 특히 잊을 수 없다. 이 단체는 정관 스님과 하도명화 보살님의 지도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두 분의 뜻을 받들어 12년간 사무국장으로서 실무를 총괄했다. 1988년 7월, 청소년 불자의 체계적인 육성을 목표로 부산불교장학회 발기인대회를 개최했고, 같은 해 11월 부산 영주암에서 ‘불심홍법원’이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열어 정관 스님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하도명화 상임이사는 해운대 소재 토지 378평(시가 30억 원)을 불심홍법원 기본 재산으로 출연하여, 1990년 12월 27일 문화부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이 정식 설립되었다.
1991년부터 매년 홍법바라밀재를 개최했으며, 1992년에는 해운대 야외법회장 낙성 및 관음상 봉안법회를 봉행했다. 1997년 10월 하도명화 보살이 제2대 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불심홍법원은 1999년부터는 매년 6월 6일 두구동 신창농원의 넓은 잔디마당에 400~500명의 불자가 모여 ‘허공마지 홍법바라밀재’라는 이름으로 호국영령 천도법회, 고승 초청 법문, 홍법대상 표창, 청소년 불교 단체 지원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했다. 불심홍법원은 2002년 홍법사 창건 이전까지 총 3억 원을 경비로 지출하며 포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문서 포교의 일환으로 《인생을 묻는 이에게》 《부산불교총람》 《불자 생활 가례의범》 《청소년법회 길잡이》 《부산불교계 인명록》 《불자신행의 길잡이》 등 9종의 책자 34,500부를 발간하여 법보시했다. 이 중 《부산불교총람》과 《부산불교계 인명록》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엮은 책이다. 나는 2000년 12월 불심홍법원 사무국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불심홍법원은 2004년 법인 기본 재산 일체를 부산불교신도회에 기증하여 부산불교신도회관 건립의 토대를 제공했다.
부산불교교육대학과 부산교육경영직 불자회
대한불교문화예술원 부설 불교교양대학 활동도 기억에 남는다. 이 단체는 1982년 설립돼 수준 높은 불교 강좌를 꾸준히 개설해 왔다. 나는 1989년 박주천 운영위원장의 권유로 부산불교교양대학 운영위원회 부회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9월, KBS 부산홀에서 송해, 송춘희, 한명숙 등 불자 연예인들을 초청하여 합창, 무용, 단소, 범패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제1회 불교문화예술제를 성대히 개최하며 교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91년에는 제6대 학장으로 이하우 법사를 선출하여 조계종 포교사 과정을 개설, 체계적인 불교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름도 부산불교교육대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단체에서 나는 1991년부터 13년간 총무처장으로 일하며 포교론을 강의했다. 매주 2~3일을 저녁에 불교교육대학에 봉사하며 구도열에 불타는 불자들을 만나는 데서 큰 보람을 느꼈다. 포교사 과정 2기부터 200여 명으로 늘어난 수강생을 위해 학사를 화엄회관으로 이전했고, 화엄회관에서는 교리반, 경전반, 수화반까지 개설하여 재학생이 500여 명으로 증가했다. 10년간 학사 운영으로 3억 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2000년 4월에는 부산불교회관으로 학사를 이전했다. 이하우 학장과 나는 2003년 사임했으며, 이후 강선태 학장 재임 시 서면 중심가에 260평 규모의 학사를 매입하여 2006년 여래정사 법당 개원과 함께 학사를 이전하게 되었다. 나는 몇 년간 소임을 쉬다가 2009년 부산불교교육대학 운영위원장, 2013년에는 부학장 소임을 잠시 맡기도 했다.
부산불교교육대학은 지금까지 42년간 운영되면서 1만 6천여 명의 수강생이 수료했고, 전국 최다 포교사를 배출했다. 그중 70여 명은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2015년에는 불교교육대학 출신 스님들이 친목과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화엄승가회를 창립했는데, 나는 산파역을 맡았다. 현재 화엄승가회는 제2대 회장 대각 스님을 비롯해 30여 명의 회원이 매년 부산 시내 대학생 불교 동아리에 지원금을 전달하고 다양한 사회봉사를 펼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불교 활동을 하면서 나는 10여 개 단체의 창립에 동참했다. 2007년에는 부산교육경영직 불자회 창립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2007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교육경영직 불자연합회 창립 법회에 박병국 교장과 함께 참석하면서 부산에도 교장, 교감, 전문직 교육경영자 불자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부산의 불자 교장 15명과 함께 준비 작업을 거쳐 부산불교회관에서 부산교육경영직 불자회 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3개월 만에 200여 명의 교육경영직 불자 회원을 확보한 뒤, 2007년 9월 11일 안국선원에서 ‘부산교육경영직불자회(부산 푸루나)’를 창립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신심 깊은 불자들이 대부분 퇴직하여 부산 푸루나 활동도 침체되었고,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산의 불교 신행단체에서 활동하던 간부들이 철저한 수행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1978년 1월 27일 김태유 선생 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부산 영주암에서 창립한 ‘부산불교정진회’에도 관여했다. 이 단체는 영주암에서 정관 스님의 지도 아래 매월 정기 법회를 개최하며 30년간 전국 300여 사찰을 참배하고 수련한 기행문과 80여 차례의 야외 법회 일지를 정리한 《정진 30년》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정진회에 참여하던 분들은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되거나 은퇴하여 지난날의 활동은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종립 금정중학교에서 교법사, 교장으로 재직
앞에서 잠깐 말한 대로 나는 1973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거제도 해성고등학교에서 2년간 섬마을 선생님으로 정치, 경제, 지리 등을 가르쳤다. 그러다 범어사에서 설립한 금정중학교와 인연이 닿아 1975년 3월 부임하여 201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봉직했다. 금정중학교는 1906년 범어사가 명정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역사가 깊은 교육기관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과 1943년 원감 김법린의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으로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폐교되는 아픔을 겪으며 항일 애국 운동의 숭고한 자취를 간직한 학교이다.
종립학교의 특성대로 내가 부임한 1975년부터 매년 수계식을 봉행했다. 당시 전교생 1,000여 명 중 절반에 달하는 학생들이 수계자가 되었고, 교직원 또한 대부분 수계자였다. 1986년에는 금정학원 이사장 선래 스님의 원력으로 본관 24개 교실을 증개축하고 본관 현관 옥상에 관음상을 봉안했으며, 1993년에는 법당 반야원을 개원했다. 학생들은 등교할 때마다 교정의 관음상에서 자비로운 미소를 보고 법당을 참배했으며, 매일 교직원 조례 시 삼귀의례로 일과를 시작했다. 나는 손용조, 이종군 법사와 함께 교법사 품수를 받아 건학 이념 구현을 위해 불교 수업과 학생 및 교직원 교화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처님오신날 행사(금정봉축제 등 10가지 이상)를 비롯한 4대 기념일 행사, 명상의 시간, 수련대회, 수계식, 불교 장학금 지급, 교직원 법회, 학부모 법회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지혜롭고 자비로운 불자 양성을 위한 건학 이념 실현에 노력했다,
2006년 9월 금정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나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로 《금정중학교 100년사》를 출판하고 부산 KBS홀에서 한마음 축제 등을 성대하게 열었다. 2007년에는 학교 역사관 소장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이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됐다. 이를 기념하여 배한욱, 김화선 선생과 함께 책자 《백년의 숨결 천년의 향기》를 발간했다. 학교의 숙원 사업이었던 강당 건립에는 국비, 교육청 지원, 자부담 등으로 30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3층 규모의 명정관을 2011년 4월 22일 개관했다. 명정관 1층은 주차장과 명정박물관, 2층은 급식실, 3층은 다목적 강당으로 조성되었다. 박물관 내에는 본교 설립자인 성월 대선사의 외손 조주현 씨가 기증한 유물 60여 점을 비롯해 이윤근 전 교육감, 김법린 전 문교부장관 등이 기증한 귀중한 유물을 전시하여 학교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현재는 저출산 영향으로 학생 수가 5분의 1로 줄어든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서 포교, 《근현대 부산불교》로 회향하다
나는 재주도 변변찮고 경제력도 없지만, 1975년 《부산시 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를 시작으로 1978년 《부산불교 안내 1》 1993년 《부산불교총람》 2000년 《불자신행의 길잡이》 2004년 《부처님 만남은 기쁨이어라》(앞의 두 권은 고우익 법사와 공저) 등 여러 권의 책을 발간했다. 금정중학교 퇴직 후에도 2014년 《부산불교 100년의 발자취》 2016년 《지지 않는 향기, 연꽃 부산》을 펴냈고, 2025년 4월에는 《사진으로 다시 보는 근현대 부산불교》를 발간하여 공저를 포함해 21번째 책을 발행했다.
이런 출간 사업은 생각보다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1993년 《부산불교총람》을 편집할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부산의 사찰 및 신행단체 등에 1,500여 통의 전화 문의로 자료를 조사해야 했다. 학교 일과 중 교무실 공용 전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어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종립인 학교의 배려 덕분에 가능했다. 출판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갔지만 그때마다 쉽게 일이 풀려 출판을 회향할 수 있었다.
《부산불교 100년의 발자취》는 관음선행회장을 역임한 금강행 보살과 자제 박익민 교수, 주영배 후배, 노봉호 교수 등의 도움으로 8개월 만에 이룬 불사다. 취지는 절실했다. 세월이 흐르며 부산에는 수많은 불교 단체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그에 따라 부산 불교사의 흔적과 기록들도 일실되어 갔다. 지방불교의 흥망과 성쇠는 곧 한국불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를 정리해서 불교운동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이런 취지를 부산에서 발행되는 월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대표와 협의했다. 김 대표는 2021년 3월호부터 2024년 10월호까지 〈사진으로 다시 보는 근현대 부산불교〉라는 제목으로 연재 지면을 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하여 《사진으로 다시 보는 근현대 부산불교》를 발간했다(양장본 440면). 그리고 드디어 2025년 4월 10일 범어사 선문화관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봉행했다. 무려 4년간 새벽 무렵까지 1,000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료를 고증하며 정성을 쏟은 결실이었다. 그 사이 건강이 악화하여 여러 차례 입원하기도 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회향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책은 1876년 부산항 개항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50년에 걸친 부산불교의 흐름과 흔적을 사진과 설명으로 정리했다. 근대편에서는 일제강점기 범어사를 비롯한 부산지역 사찰의 모습과 명정학교, 범어사 3·1운동,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다루며 해동중고의 전신인 입정상업학교의 설립 과정을 새롭게 조명했다. 일제강점기 불교계 항일 운동 등도 종합적으로 조명했다. 현대편에서는 부산대학교 설립 자금의 절반을 고성 옥천사가 기증했다는 사실을 여러 자료와 함께 새롭게 밝히고, 시대별 부산 불교계의 흐름을 정리하며 주요 가람과 불교 신행단체를 소개했다. 3부 ‘부산불교의 미래’에서는 탈종교화, 저출산 등으로 위축된 현재의 불교 현실을 돌아보며 미래를 탐색하는 내용을 담았고, 부록에는 범어사 근현대 역대 주지와 부산불교 연표를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뜬구름 같은 세월 속에 변변찮은 전법의 자취를 기록하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처님 품 안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도반의 숨결을 되새기며, 본인과 관련된 편린의 기록이나마 부산불교를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그동안 이끌어주고 함께 해온 모든 도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현익채
전 금정중학교 교장.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 졸업.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종립 금정중학교 교법사, 교장을 지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장, 부산불교홍법회장, 부산고불지도위원회 상임부회장, 부산중불지도위원회장, 재단법인 불심홍법원 사무국장 역임. 《부산불교총람》 《사진으로 다시 보는 근현대 부산불교》 등 21권의 저서를 펴냈다. 부산불교인대상, 홍조근정훈장, 부산불교전법대상, 묘엄불교문화상 등 수상. 현재 사회복지법인 해월 이사 등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