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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기유록(奇遊錄)> 은 조선 정조 15년(1791) 청나라 연경으로의 사행단을 따라간 김정중(金正中)이 보고 들은것을 기록한 것이다. 작자는 평양에 살았고 50세가량 나이에 벼슬살이 경험이 없고 시문(詩文)을 좋아한 사족(士族)이였다.
● 연와탕(燕窩湯)은 황제가 드는 별찬(別饌)이다. 섬에 사는 제비가 둥지를 만들 때에, 물 위에 뛰는 소어(小魚)를 엿보다가 얼른 채서 물고 와, 하루를 볕에 쬐었다가 바닷가의 짠 흙에 섞어서 차곡차곡 쌓아 둥지를 만드는데, 대개 양기(陽氣)가 왕성한 물고기는 물 위로 뛰어오르기 때문에 사람에게 좋다고 하며, 해마다 봄 여름 바뀌는 때에 그 둥지를 가져다가 조리하여 탕을 만든다.
● 집을 짓는 제도는 모두 일자이고 굽은 데가 없다. 꼭 필요한 부속으로는 집안에 벽돌을 쌓아 높이가 한 자 남짓하고 길이가 한 길 못 되게 온돌을 만드는 것인데 그 이름을 캉(炕)이라 하며, 온돌 밖에는 벽돌을 깔고 벽돌 위에 의자를 놓아 둔다. 그 사람들은 방 바닥에 앉는 법이 없고, 의자에 기대거나 온돌 끝에 발을 뻗고 걸쳐 앉는다.
● 이발은 어린아이가 하는 것과 조금 달라서, 그 양 이마 위의 머릴 깎되 뒤통수는 깎지 않고 머리를 땋아서 등으로 내려뜨리니, 앞에서 보면 중과 같고, 뒤에서 보면 아이와 같다.
● 여자는 머리를 묶어서 틀어올리는데 수식(首飾)으로 양쪽을 틀어 만든다. 그리고, 채색한 꽃 두 가지를 꽂으며, 옷은 남자와 같은 제도이되 엇걸어 둘러서 깃을 맨다.
● 중국 여자는 치마를 입으며, 또 발을 꼭꼭 묶어서 그 발이 5, 6세의 아이 같고 또 방혜(方鞋)를 신어서 걸음이 기우뚱거려 멀리 가지 못한다고 한다.
● 비단을 짜거나 물을 긷거나 밥을 짓는 따위는 다 남자가 하고, 여자는 아이를 안고 긴 담뱃대를 비껴 들고 집안에서 놀 뿐이다.
● 담배는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비록 처녀라도 작은 담배 주머니를 차고, 주머니 안에 반드시 짧은 담뱃대를 꽂았다. 구리 그릇은 나라에서 금하므로 사기로 대용한다. 먹을 때에는 젓가락을 쓰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다.
● 밭을 가는 데에는 나귀와 노새가 반쯤 섞여서, 소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밭갈이에 쓰는 기구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나 크기가 조금 다르다. 두둑에 당죽(唐竹)이라고도 하는 옥수수를 많이 심고 또 기장ㆍ조ㆍ콩ㆍ보리를 심으나, 논은 아주 없고 풀만 있다.
● 들보가 없는 집이 여양역(閭陽驛)부터 연경(燕京)까지 이따금 있다. 지붕의 만듦새는 평평한 큰 소반 같으며, 바닷가의 짠 흙이나 백회를 그 위에 바르는데, 비록 이엉으로 덮지 않아도 해를 넘기며, 바람과 눈을 겪어도 조금도 무너져 새는 곳이 없다.
● 그들 촌가에서는 재를 천히 여기고 똥을 귀하게 여기므로, 한길에 광주리를 들거나 삼태기를 멘 사람들이 있어, 뒤를 둘러 쌌다가 똥이 땅에 미처 떨어지기 전에 얼른 광주리로 받는데, 그 똥 줍는 꼴이 자못 볼 만하다.
● 나귀로 벼 껍질을 갈아서 벗기고, 풍차(風車)로 겨나 쭉정이를 까부르며, 또 외나무에 달린 방앗돌이 있어 하루 사이에 한 사람이 2석을 찧어 내니, 그 힘을 더는 것이 이러하다.
● 둔자(屯子) 안에 식량을 저장한다. 달풀[萑], 갈대[葦]로 엮어서 그 모양이 독 같은데, 길이가 한 길 반에 둘레도 그만하여 큰 것은 5, 60석을 담고 작은 것은 3, 40석을 담으며, 10말을 1석으로 친다고 한다.
● 원앙와(鴛鴦瓦)는 자웅와(雌雄瓦)라고도 하는데 금령이 있으므로, 궁실(宮室)이나 부마(駙馬)의 집이 아니면 감히 쓰지 못하며, 여염의 호족(豪族)이나 부자는 다 암키와로 인다.
● 황성(皇城) 안에서는 석탄으로 불 피우거나 옥수숫대를 때는데, 옥수수는 반드시 뿌리가 붙은 채로 뽑으며, 이따금 팔고 사는 자가 있으니, 땔감으로 하는 풀을 얻기가 어려움이 대개 이러하다.
● 청 나라의 달력에는 납일(臘日)이 없고, 12월 8일을 가절(佳節)로 삼아 그날에는 오곡을 섞어서 죽을 만들어 서로 음식을 돌린다. 그 사람들은 끓이지 않은 찬 것을 마시지 않고 차를 잘 마시며 또 노자(蘆子)와 빈랑(檳榔)을 잘 먹는데, 다 천식을 없애고 위를 편안하게 하는 물건이다. 차는 마시지 않는 때가 없으며, 손님 대접에는 반드시 먼저 차 한 잔을 권한다.
● 기러기, 집오리, 거위, 오리, 돼지, 양은 으레 늘 먹는 음식으로 삼으나,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 낭자산(狼子山)부터는 길 좌우에 버들을 심었는데 심양(瀋陽)에 이르러서 더욱 많다. 이 버들이 심양으로부터 연대(燕臺)에 이르는 2000리에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가지와 잎이 우거지고 밑줄기의 크기가 조금도 들쑥날쑥하지 않으니, 그 나무 기르는 법이 대개 이러하다.
● 솜 타는 기구는 양장(羊腸)으로 활줄을 만드므로 튀길 때에는 봄날 새소리 같고 악기의 울림소리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들을 만하게 한다. 집집이 탁자 위에 작은 금부처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며 반드시 이마를 땅에 대고 꿇어 엎드리는 정례모배(頂禮膜拜)를 한다.
● 소, 말, 나귀, 노새 따위는 코를 꿰거나 매어 두지 않아도 조금도 차거나 물지 않으며, 스스로 마시고 먹도록 맡겨 두어 제 성미대로 하게 하나, 말라서 우리나라의 소에 미치지 못하고, 다만 그 뿔이 곧고 길며 은연히 빛이 난다.
● 돼지를 치는 데에 제각기 주인이 있어서 돼지 수백 마리씩을 몰고 가다가 길가에서 서로 만나 가게에 들어가 함께 자기도 한다. 이렇게 한 뜰 안에 있어 두 무리가 서로 섞이면 가리기 어려울 듯하나, 동이 터서 두 사람이 가게 문밖에 나가 길가에 지팡이를 세우고 몇 마디 부르면, 많은 돼지가 각각 제 주인을 찾아 지팡이 밑에 와서 모이니, 그 길들여 기르는 데에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방안에서 기르는 발발이는 시키는 것을 듣는데, 혹 그 목에 돈을 걸어 주면 반드시 저자로 달려가 어느 물건을 사서 돌아오기도 한다. 염소와 양의 번식은 과연 들은 바와 같아서, 천 백으로 무리를 지어 산과 들 사이에서 자기도 하고 다니기도 하니, 바라보면 눈 같다.
● 감귤, 배, 밤, 석류, 수박 따위는 겨울을 넘기고 봄을 지내도 썩거나 곯지 않아 물건이 새로 딴 듯하니, 과일 저장하는 방법은 다른 나라가 미칠 바가 아니다.
● 사사로이 싸우지 않고, 술주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혹 서로 다투는 일이 있으면, ‘왕바[王背]하고 나무라는데 왕바는 자라라는 뜻이니, 그들의 욕이 대개 이러할 뿐이다.
● 홍어는 길이가 두 치에 가깝거나 혹은 한 치 남짓하며 온몸이 붉은 것도 있고, 몸은 붉고 꼬리는 흰 것도 있다. 유리병 안에 물을 채우고 홍어 수십 마리를 넣으면, 꼬리 치며 활발히 위아래를 돌아다닐 즈음에 그 영롱한 모습이 황홀해 보인다. 혹 말하기를, 고기를 기를 때에 단사(丹砂)를 물에 타면 고기가 그것을 마시고 붉은색이 배어 들어서 그 바탕이 변한다고 한다.
● 물을 긷는 데는 긴 나무를 양 어깨에 가로 걸치고 나무 끝 좌우에 물통 하나씩을 달며, 섶을 옮기는 데에도 그리하여 옛적부터 등에 지는 법이 없다.
● 죄가 있는 자는 붉은 옷을 입히고 쇠사슬을 채우며 귀밑머리 가에 ‘관(官)’이라고 먹물을 들인다.
● 책문(柵門)으로부터 연경에 이르는 가게 벽과 마을 담에 성욕을 다스리는 춘약(春藥)의 방문을 붙였는데, 그 글이 음란하여 더럽고 도리에 벗어나 문란하기가 한이 없다. 심지어 모형까지 만든 자는 가장 무거운 형벌에 처해진다.
● 유리창에 여남은 칸짜리 뒷간이 있어, 뒷간 안에 깨끗한 궤(几)를 놓고 궤 위에 부용향(芙蓉香)을 사르며 그 사면의 벽에는 성생활을 그린 춘화도(春和圖)를 붙였는데, 사람이 뒷간에 오르면 그 값으로 반드시 돈 3문(文)을 받는다.
● 가난한 중이나 천한 백성은 혹 나귀를 타되, 부호(富豪)는 반드시 거마(車馬)를 탄다. 몽고 사람은 거칠고 사나우나, 문학(文學)이 있으면 내지로 들어가서 연경에서 벼슬하므로, 궁관(宮觀)이나 사찰(寺刹)에 있는 자는 몽고 사람이 반이니, 건륭(乾隆)에게는 심복(心腹)의 환(患)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이다. 동요(童謠)에 ‘붉은 꽃 다 지면 누런 꽃이 핀다[紅花落盡黃花開]’라는 구절이 있는데, 붉은 것은 투구를 가리키며 누런 것은 몽고 사람이 누런 옷을 입는 것을 가리키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라사 사람은 비록 크게 힘세더라도 짐승과 다름없어 염려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수놓은 비단으로 둥우리를 만들어 아이를 그 안에 놓고 시렁 밑에 거는데, 모양이 닭둥우리 같다. 아이가 울면 손으로 그 둥우리를 왼편 또는 오른편으로 흔들어 흔들흔들 멈추지 않으면 아이의 울음소리는 곧 그치는데, 이름을 요거(遙車)라 한다.
● 마하라(麻霞羅)의 정자(頂子)로 그 벼슬의 높고 낮음을 가리는데, 청동석(靑銅石)이 첫째로 높은 품계이며, 그 다음이 산호인데 산호에도 등분이 있어 조각한 것이 조각하지 않은 것의 밑에 들며, 또 그 다음이 옥이며, 은이며, 금은 가장 낮은 품계다.
● 상사(喪事)가 있는 집은 흰 대자리로 집의 위아래 안팎을 싸는데 이름하여 악실(堊室)이라 하며, 그 문밖에 긴 막대기를 세워 이를 초혼(招魂)이라 하는데 종이가 펄럭이며, 장님으로 하여금 풍악을 울리게 하고 곁에 두 두타(頭陀)가 있어 종을 치며 경을 외는데 이를 ‘오시(娛尸)’라고 한다.
● 객지에서 죽은 자는 나그네 넋이 나부껴 올라 의지해 머무를 곳이 없다가 닭 울음을 들으면 따라 온다고 하므로, 나그네의 속옷 위에 수탉 한 마리를 올려 놓는다.
● 관곽(棺槨)에는 붉은 칠을 하고, 그 위에 산천(山川)과 운기(雲氣)를 그리며, 출구(出柩)할 때에는 풍악을 베풀어 앞에서 인도하며, 묻기에 이르러서는 한 치 남짓하게 무덤 구덩이를 파고 흙을 쌓아서 관을 덮으며, 잔디풀을 덮지 않고 백회를 칠하는데 모양이 돈대(墩臺) 같으며, 흰 담으로 두르고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숲이 울창하게 만드니 볼 만하다. 이것은 부호의 장사다. 가난한 사람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길가나 밭 근처에 관을 그냥 드러내어 두는 것이 많으며, 혹 빈 절에 옮기기도 하여, 해를 넘기도록 묻지 않는 것도 있다. 분묘에 혹 효죽(孝竹)을 세운 것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하면 이것을 세워 나타낸다고 한다.
● 연경(燕京)에서는 백로지(白露紙)를, 영원위(寧遠衛)에서는 첨씨묵(詹氏墨)을, 영평부(永平府)에서는 모직물인 백전(白氈)을, 사하역(沙河驛)에서는 배와 밤을, 대릉하(大凌河)에서는 어류와 과류(瓜類)를, 야계둔(野鷄屯)에서는 뽕나무 줄기로 만든 상지광(桑枝筐)을, 계문(薊門)에서는 안약(眼藥)을, 중후소(中後所)에서는 말털 담요인 총담(驄毯)을, 영원(寧遠)에서는 백당(白糖)을, 무령현(撫寧縣)에서는 편식(遍食)을, 심양(瀋陽)에서는 댓가지를, 청산(淸山)에서는 이홍록용고(梨紅鹿茸膏)를, 낭산(狼山)에서는 고사리를, 연산관(連山館)에서는 산 꿩을, 소흑산(小黑山)에서는 닭을, 백탑보(白塔堡)에서는 두부를 그 고장 토산품으로 특별히 치고, 통천(通川)의 바늘과 냉천(冷泉)의 물은 다 관중(關中)에서 유명하며, 그 밖에 백제(白薺), 땅콩[落花生] 따위가 있으나 남방의 원산물이므로 끼지 못한다.
● 아계(阿桂)는 청인(淸人)으로, 문학에 재주가 있어 조야(朝野)에 명망이 있으며, 벼슬은 각로(閣老)에 이르렀다.
● 화신(和珅)은 청인으로, 군졸 사이에서 발탁되어 출세하였으며, 좋은 신수에 문한(文翰)을 잘하고 가장 총애를 받아서, 나이 겨우 서른에 벼슬이 각로 겸 구문제독(閣老兼九門提督)에 이르렀다.
● 철보(鐵保)는 청인으로, 글씨 잘 쓰고 글 잘하여 벼슬이 각로에 이르렀으며, 지금 상중(喪中)으로 집에 있다.
● 복장안(福長安)은 청인으로 벼슬이 각로에 이르고, 그 아우 강안(康安)은 광동성 도독(廣東省都督)이 되어, 형제가 함께 은총을 받는다.
● 두광내(竇光鼐)는 한인(漢人)으로, 벼슬이 각로 상서(閣老尙書)에 이르고, 해내문종(海內文宗)이라는 호칭을 받으며, 지금 문집(文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 손사의(孫思毅)는 자를 연여(淵如)라 하며 한인인데, 문한의 재주가 있어 벼슬이 각로에 이르렀다.
● 왕술(王述)은 청인으로, 글씨 잘 쓰고 글 잘하여, 벼슬이 각로 상서에 이르렀다.
● 장화(蔣和)는 취봉(醉峯)이라 하며 청인인데, 글씨를 잘 쓰므로 벼슬이 학사(學士)에 이르렀으며, 신석고문(新石皷文)을 썼다.
● 장조(張照)는 자를 득요(得夭)라 하며 청인인데, 글씨를 잘 쓰므로 총애를 받아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으며, 한 문공(韓文公)의 석고비(石皷碑)의 글씨를 썼다.
● 양산주(梁山舟)와 유몽루(劉夢樓)는 한인으로, 온 나라에서 필종(筆宗)으로 불리지만, 다 포의(布衣)이다.
● 신종익(辛從益), 섭대관(葉大觀), 방사관(方士冠), 변운룡(卞雲龍)은 모두 한인으로, 문장의 재주가 있어 지금 한림이다.
● 장도악(張道渥)은 자를 수옥(水屋)이라 하고 호를 몽각(夢覺)이라 하며 태원(太原) 사람인데, 시화를 잘하되 지례(指隷)에 더욱 공교하며, 벼슬은 양주 자사(楊州刺史)에 이르렀다가 지금은 벼슬에서 떨어져 집에 있다.
● 소진함(邵晉涵)은 소강절(邵康節)의 후손으로, 벼슬은 경각 학사(經閣學士)에 이르렀고, 그 정통으로 드러났다.
● 정가현(程嘉賢)은 자를 소백(少伯)이라 하고 강남(江南) 사람이며 정명도(程明道)의 23세손인데, 시를 잘하고 글씨에 공교하며, 지금 국자 이업(國子肄業)으로 있으며, 사림(士林)에게 존중받는다.
● 주경귀(朱景貴)는 절강(浙江) 사람이고 회암(晦庵.주희)의 후손인데 호를 백지재(伯志齋)라 하며, 그 조카 지재(砥齋)는 춘산(春山)이라 하는데, 그 문필이 볼 만하나, 철보(鐵保)의 문생(門生)이 되어 선조의 명예를 떨어뜨림이 많으나, 어찌 이를 논하랴?
● 나사봉(羅梭峯)은 한인으로, 도장을 잘 새긴다.
● 진희(陳熹)는 한인으로 문한(文翰)을 잘하며, 벼슬은 권농대부(勸農大夫)이다.
● 박명(博明)은 몽고 사람으로, 문장을 잘하고 벼슬이 한림이었는데, 경술년(1790) 가을에 연경에서 죽었다고 한다.
● 반정(潘庭)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글 읽기를 잘 하고 가시(歌詩)를 좋아하며, 벼슬은 한림학사였으나, 지금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도림사(道林寺)에서 불법(佛法)을 강(講)한다고 한다.
● 연경(燕京)은 둘레가 67리이고, 인구가 21만이다.
● 연경의 절경으로는 금대석조(金帶夕照), 노구효월(蘆溝曉月), 옥천수홍(玉泉垂虹), 경도춘운(瓊島春雲), 계문연수(薊門煙樹), 거용첩취(居庸疊翠), 서산적취(西山積翠), 태액청파(太液晴波)인데, 강희(康煕) 때에 통주야시(通州夜市)를 더 넣었다고 한다.
● 정사(正使)에 김이소(金履素), 부사(副使)에 이조원(李祖源), 서장관(書狀官)에 심능익(沈能翼)이고, 유학(幼學) 김정중(金正中)이 일기(日記)를 지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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