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興城張氏(흥성장씨)
始祖 : 張儒(장유)
始祖(시조) 張儒(장유)는 尙質縣(상질현)(興城) 사람으로 新羅末(신라말)에 亂 (난)을 避(피)하여 中國(중국)에 들어가 中國語(중국어)를 배웠으며 高麗(고려) 가 開國(개국)한 뒤에 歸國(귀국)하여 高麗(고려)光宗(광종)때 禮賓省(예빈성) 에 있으면서 中國(중국)의 使臣(사신)의 接待(접대)를 맡아 하였다고 한다.그의 6世孫(세손) 張基(장기)가 興山君(흥산군)(興城)에 封(봉)해져서 本貫(본관)을
興城(흥성)으로 하였다.
墓所(묘소)는 全北(전북) 高敞郡(고창군) 星內面(성내면) 槽東里(조동리)에 있으며 3月 20日에 享祀(향사)한다.
本貫沿革
흥덕(興德)은 전라북도(全羅北道)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 일대(一帶)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이다. 백제(百濟) 때에는 상칠현(上漆縣: 上村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 고부군(高阜郡)의 관할(管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이후(以後) 장덕현(章德縣: 昌德)으로 고쳐서 감무(監務)를 두고 고창을 겸(兼)해 다스리게 하였다가 1308년(충선왕 1) 흥덕(興德)으로 바꾸었다. 1401년(태종 1) 고창현을 분리하고 흥덕현(興德縣)으로 독립(獨立)하였으며, 흥성현(興城縣) 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전주부(全州府) 흥덕군(興德郡)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全羅南道) 흥덕군(興德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흥덕면(興德郡)으로 축소(縮小)되어, 고창군에 통합(統合)되었다.
科擧及第者(朝鮮時代)
張仲誠(장중성) : 文科 世祖12年(1466) 拔英試 三等
張顯慶(장현경) (1730 庚戌生) : 文科 영조28년(1752) 庭試 丙科
張謹止(장근지) (1730 庚戌生) : 文科 세종11년(1429) 親試 丙科
張宇龜(장우구) (1675 乙卯生) : 文科 숙종34년(1708) 式年試 丙科
張仲誠(장중성) (1675 乙卯生) : 文科 세조8년(1462) 式年試 乙科
張漢弼(장한필) (1675 乙卯生) : 文科 예종1년(1469) 秋場試 丙科
張景觀(장경관) (1747 丁卯生) : 司馬試 正祖7年(1783) 式年試 二等
張論(장논) (1642 壬午生) : 司馬試 顯宗1年(1660) 增廣試 三等
等 모두 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6名, 司馬試 2名).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興城張氏(흥성장씨)는
1985年에는 摠 8,837家口 37,691名,
2000年에는 摠 14,023家口 44,705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출처 : 姓氏의 故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