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는 시계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아,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 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
그 옛날은 일상생활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을 마치고 잠을 잔다. 초승달을 거쳐 상현달, 상현달을 지나 하현달, 하현달을 지나 그믐달이 뜨면 한 달이 된 것이다. 꽃이 피면 봄이 온 것이고, 신록이 우거지면 여름이 온 것이다. 만산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면 가을이 온 것이고, 모든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고 눈이 오면 겨울이 온 것이다. 그 옛날의 시간은 해와 달과 사계절의 운행에 맞추어져 있었고,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자연친화적인 삶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경제적인 삶으로 바뀐 것은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하루를 분절하여 24시간으로 나누고, 또한, 이 시간을 분과 초 단위로 나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시간은 경제적인 시간이며, 경제적인 시간은 ‘돈벌이’에 그 모든 초점을 맞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돈은 행복의 보증수표이며, 이 돈을 많이 축적할수록 그의 권력의 크기와 지배의 영역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시간이 돈이 되고, 일분, 일초가 황금이 되고, 모든 인간들의 활동은 시간, 분, 초 단위로 전면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 많이, 더 빨리 배우고, 더 많이, 더 빨리 돈을 버는 것, 이 자본의 법칙이 우리 인간들을 지배하게 되고, 어느 누구도 이 ‘빠름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천천히 가는 시계]는 자연의 시계이며, 우리 인간들과 자기 자신을 경제적인 시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는 것은 ‘빠름의 시간’에서 벗어나 ‘느림의 시간’을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하고, ‘느림의 시간’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더 빨리’, ‘더 많이’가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과 욕망을 다 비우고 ‘무소유의 행복’을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한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아,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된다.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고, 그 모든 시계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게 된다.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안다.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되고, 이제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 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고 한다. [천천히 가는 시계]는 새들의 시계이며, 꽃들의 시계이고, 나태주 시인과 우리 인간들의 자연친화적인 몸속의 시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돈을 창출해냈지만, 그러나 돈이 자본주의적 재화로 인식되자마자 우리 인간들은 돈의 충직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은 단순한 기호이지만, 그러나 돈은 단순한 기호가 아닌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창출해내는 천의 얼굴을 지닌 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리(돈)는 하나이지만, 이 진리는 수많은 화장과 가면과 얼굴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다닌다. 돈은 땅과 집과 부동산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고, 주식과 채권과 금융자산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들은 땅과 집과 부동산의 노예로 살기도 하고, 우리 인간들은 주식과 채권과 금융자산의 노예로 살기도 한다. 때때로 돈은 자동차와 비행기가 되기도 하고, 때때로 돈은 금과 은과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한다. 돈은 시간, 분, 초와 일년 열두 달이 되기도 하고, 돈은 라디오와 컴퓨터와 스마트 폰이 되기도 한다. 돈은 미술과 음악과 예술이 되기도 하고, 돈은 인공지능과 로봇과 빅데이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들은 이 돈의 얼굴에 따라 울고 웃으며 살고, 이 돈의 차가움과 홀대 속에서 원한 맺힌 저주감정을 품고 죽는다. 돈은 자연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고, 이 돈은 남극과 북극과 시베리아와 히말라야의 설산과 빙산을 다 녹이며, 이 돈의 광풍에 의하여 엘니뇨와 라니냐 등의 이상기온이 나타나기도 한다. 돈은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고, 모든 종교와 음악과 예술은 이 전지전능한 돈에 대한 찬양과 복종의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다.
이 돈의 노예, 이 돈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밖에 없다. 나태주 시인의 [천천히 가는 시계]에 따라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하고, 그 모든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거절하는 것밖에 없다.
시란 좋은 옷과 영양만점의 음식과 달콤한 잠과 꿈이 쏟아지는 집과도 같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건강과 행복이 자라나는 삶의 텃밭이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를 쓸 자격조차도 없는 사기꾼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날이면 날마다 소화불량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텃밭을 일구며, 수많은 학자들과 성인군자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기 자신의 말과 사유로 시를 쓰는 것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론과 실천,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피와 땀으로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다. 새벽에 우는 수탉과 아침, 한낮에 우는 뻐꾸기와 점심, 야행성의 부엉이 울음소리와 저녁을 결합시킨 [천천히 가는 시계]와 나팔꽃과 새벽, 연꽃과 한낮, 분꽃과 저녁을 결합시킨 [천천히 가는 시계]의 이 아름답고 놀라운 시적 성과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태주 시인의 직관(관찰)과 성찰의 힘이 그의 [천천히 가는 시계]의 현실주의를 완성시키고, 그리고 그 ‘명명의 힘’(인식의 힘)이 내가 내 식으로 불러본다면 ‘낙천주의자의 행복’으로 완성된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 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태주 시인의 [천천히 가는 시계]는 ‘새의 울음소리로’ 돌아가는 시계이자 ‘꽃의 향기’로 돌아가는 시계이고, 나태주 시인의 삶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시계이다. 나태주 시인의 [천천히 가는 시계]는 현실주의의 승리이자 낙천주의의 승리이며, 우리 한국어와 우리 대한민국의 서정시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좋은 옷과 영양만점의 음식과 아름답고 행복한 집에 대한 가치 기준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자기 자신의 살과 피가 되지 않는 시란 존재할 수가 없다.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하나인 것처럼, 자기 자신의 삶의 텃밭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창출해낼 수 있는 시인만이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행복을 창출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