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만들어진 현실』은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가 갖는 ‘이데올로기성’을 집중 탐구한 책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사실의 차원보다는 해석과 인식의 차원을 더 많이 갖는 심리적 문제 혹은 상부 구조적 문제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다룰 때는 ‘역사적 접근’도 하고 그것의 성격을 다룰 때는 ‘정치경제적 분석’도 한다. 이데올로기적 권력 효과를 다룰 때는 ‘담론 분석’을 하고 실제 담론 행위자들의 말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지역주의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1987년 대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일종의 ‘반사실적 가정’을 다룰 때는 ‘합리적 선택 이론’을 불러 온다. 이론이든 방법론이든 현실을 더 잘 보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방법론적 기회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출판사 서평
1. 지역주의 문제의 ‘이데올로기성’을 묻는다
지역주의에 대한 기존의 여러 논의는, 그들 내부에서 저항적 지역주의냐 패권적 지역주의냐 아니면 모든 지역주의가 다 망국적이냐 하는 차이는 있었지만 공동적으로 “문제는 지역주의다!”라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 책은 그러한 관점이 갖는 문제를 분석하면서 “문제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 내는 한국 정치다!”라는 새로운 시각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본적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은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가 갖는 ‘이데올로기성’을 집요하고 파고든다. 이 주제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지역주의가 사실의 차원보다는 해석과 인식의 차원을 더 많이 갖는 심리적 문제 혹은 상부 구조적 문제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란다. 모두들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간의 논의에서 지역주의를 가리키는 객관적 사실만 따로 분리해 본다면, 아마 그 내용의 빈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 이슈 가운데 이데올로기성이 가장 심한 주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지역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주의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사실’과 ‘사실이 아닌 주장’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개의 경우 이데올로기 분석은 마르크시즘의 영역에서 다뤄져 왔고 매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특정의 이론이나 방법론에 경도되어 있지 않다. 모든 논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론과 방법론은 주제에 맞게 자유롭게 선택해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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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초점을 끊임없이 교차(double-focused)시키면서 사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거리를 탐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역 차별, 지역 소외, 지역감정, 지역 갈등 등으로 포착될 수 있는 ‘지역주의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패권주의”, “저항적 지역주의”, “3김 청산론”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지역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지역주의 때문에 큰 문제라는 일종의 망국적 지역주의론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어떻게 해석의 차원을 지배하는 담론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
그러한 차이에 주목하다 보면, 한국과 같이 세계에서 지역 간 인종·문화·종교·언어·경제 격차가 가장 작은 동질적 사회에서, 선거 결과 뚜렷한 지역 구도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지역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사회에서 지역 간 대립과 폭력적 갈등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다는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등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인과적 틈새 내지 불일치의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지역주의 때문에 문제라는 기존의 이해 방법이 왜 잘못인지를 보게 되고, 결국 인과적으로 그 반대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 즉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어떤 것들이 지역주의 문제를 끊임없이 불러들이는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함에 주목하게 된다.
요컨대 이 책은 인과적으로 전도된 문제를 다시 제 자리로 돌리면서, 한국 정치가 안고 있고 개선해 가야 할 문제의 구조 안에 지역주의를 위치시켜 그 현실적인 이해 방법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이 책의 주요 내용 및 주장들
비교의 맥락에서 본 한국 지역주의의 특징
-정치학에서 지역주의란 ‘문화적 일체감을 공유하는 지역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개는 분리 독립과 자치, 분권, 비토권(미국), 협의체주의(스위스) 등이 정치적 대안으로 추구된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이와는 매우 다른 성격과 내용을 갖는다. …… 한국의 지역주의는 중앙을 향한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동원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일반적인 지역주의와 다르며 때로 정권의 향배를 두고 격돌하는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누가 소외되고 누가 혜택 받는가를 다투는 여야 균열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주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한국의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 전통 사회에서 존재했던 지역감정이나 지역 정서, 지역 편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매우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후 언제였나? 박정희 정권 시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였다. 이른바 영남 정권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호남의 반대 때문인가? 아니다. 호남은 영남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지지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대한 전북과 전남의 지지는 각각 54%, 62%였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 동안의 불균등 산업화가 낳은 개발 격차와 엘리트 충원에서의 지역 격차 때문인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오히려 산업화의 수혜 지역인 영남과 그렇지 못한 나머지 지역의 갈등이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시기 권위주의 산업화의 공간적 특성과 지역주의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두 차원이 인과적으로 바로 연결될 수는 없다. …… 1950년대까지는 대개 월남한 이북 출신들이 주로 편견의 대상이었는데, 19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호남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호남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가장 강하게 가진 지역민은 영남이 아니라 충청과 서울 경기 출신이었으며, 호남에 대해 가장 덜 거리감을 가졌고 또 호남 출신이 가장 가깝게 생각했던 지역민은 영남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이주는 주로 수도권과 영남의 산업 벨트가 중심이었는데 두 곳에서 생존과 정착, 취업, 소득을 둘러싼 하층의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경쟁의 양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도권에는 호남과 충청 출신의 농촌 퇴출 인구가 집중되었다면, 영남의 산업 벨트에는 같은 지역 농촌 인구의 내부 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연히 영남과 호남의 하층민 간 경쟁의 계기는 약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하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견제했던 야당이 크게 보아 호남 출신의 DJ와 영남 출신의 YS 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영호남 간의 거리감이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였다. 잘 알다시피 그 이유는 민주화를 이끌었던 야당의 두 정치 엘리트 YS와 DJ가 서로 다른 정당으로 분열하여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에서 경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호남 사이의 거리감 내지 투표 패턴의 상이함은 상호 지역민이 갖는 본래의 지역감정 때문이 아니라 민주화 직후 야당의 분열이 만들어 낸 정당체제의 구조를 반영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역주의 망국론의 정치경제적 기초
-한국 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을 반호남주의라고 할 때, 그것을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과 편견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반호남주의가 자원 분배를 인위적으로 차별적이게 만들고 지배의 한 수단으로 기능한 것은 지역민의 생활 세계가 아닌 정치체제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1972년의 유신 체제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는 한국의 선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과 영남 출신의 박정희가 경쟁한 지역주의 선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DJ는 ‘사쿠라 정당’이니 ‘충성스런 야당’이니 하는 오명에서 벗어나겠다며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간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대중 경제를 주장했고,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으며, 중앙정보부를 국회 심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적대적 남북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변 강대국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가져온 반향은 엄청났다. DJ가 그 이전 같은 당의 윤보선 후보보다 득표율을 가장 많이 늘린 곳은 전남, 그리고 다름 아닌 부산이었다. 부산에서 DJ는 42.6%를 득표했는데, 이는 이전 선거에서 윤보선이 얻은 것보다 11%가 많은 표였다. 대구에서도 이전보다 8.8% 더 득표했다.
DJ가 고전한 지역은 영남이 아니라 충청·경기·강원이었다. 결국 전남에서만 10만 표 이상의 무효표가 나올 정도의 부정선거에 힘입어 박정희가 96만 표 차로 승리했지만, 이로써 박 정권이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 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재집권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결과는 유신이었다. 유신 체제가 정상적 통치의 방법을 넘어선 극단적 권위주의 체제였던 만큼, 전보다 더 비정상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억압과 통제는 기본이었고 반공주의는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반대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호남에 대한 편견을 동원하고자 하는 욕구도 커졌다.
권위주의와 그 재생산에 이해관계를 갖는 상층 집단들 역시 이런 욕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 결과 정부의 고위직, 재벌 기업의 상층 관리직 등에서 호남 출신의 비율은 크게 줄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호남 출신에 대한 편견과 허위의식은 의식적으로 조장되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달리 1980년 광주에서의 항쟁과 비극적 사태가 지역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고, 호남에 급진주의의 이미지를 덧붙이고자 하는 담론들이 작위적으로 동원된 것도 같은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상식 세계에 존재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을 말하고 옛날에도 그런 편견이 있었다는 것을 강변한다 해도, 그것은 인위적으로 동원되고 작위적으로 부각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다.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권위주의의 재생산이든 기득권의 방어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그런 편견의 이데올로기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국민 의식 개혁 운동을 수천 번하고, 지역 화합 행사를 수만 번 해도, 그건 우리 사회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이데올로기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반호남주의가 직접적으로 호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언어로 표출된다거나 혹은 그렇게 노골적인 방식으로 지배의 욕구를 실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모름지기 어떤 이데올로기든 권력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보편의 옷’을 걸쳐야 하기 때문이다.
1987년 대선 직전 우리 사회 주류 언론에 나타난 지역주의 관련 담론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당 체제다. 이는 3김이라고 하는 지역 지배 엘리트가 유권자의 지역감정을 경쟁적으로 자극하여 만들어 낸 지역 할거주의의 내용을 갖는다. 지역주의는 출신 지역이 동일한 정치 엘리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전근대적 의식 행태로 유권자의 정치적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3김은 유권자의 지역주의를 볼모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지역당 체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구(舊)정치 엘리트의 퇴출과 함께 유권자의 탈지역주의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논리에는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나 고민은커녕 민주화한다고 해서 결국 지역주의의 혼란만 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고, 야당 지도자들을 추종해 봤자 지역감정만 자극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그들만 배불린 것 아니냐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지역주의 문제는 권위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추종하는 양김의 문제가 된다.
광주와 호남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욕구를 표현한 것을 맹목적 지역감정이라고 말할 때, 이 논리 안에서 5공화국과 전두환, 노태우의 책임이라는 문제는 모두 사라진다. 나아가 정치의 방법을 통한 민주화의 길을 비관적으로 조망하게 함으로써 반권위주의 연합 전선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지역주의를 이렇게 보고 지역주의를 극복하자고 하면 그것은 결국 양김 내지 3김이 아닌 노태우 후보의 당선, 즉 권위주의 정당이 재집권하는 대안을 추천하는 것이 된다. 야당의 집권을 싫어할 수 있고 노태우의 당선을 바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위한 알리바이를 지역감정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확실히 인과적으로 전도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주류 언론 전체가 이런 내용을 말했고, 지식인들도 대부분 그랬다. 선거 및 정당을 전공하는 정치학자들의 분석도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불행하게도 지역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의 틀을 수용하고 재생산한 것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던 많은 재야 세력과 진보파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민중당이 있다. 1992년 총선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후 김문수·이재오·이우재 등 민중당 지도부 대부분은 망국적 지역주의 극복과 3김 청산을 내세우며 권위주의 후계 세력인 신한국당에 참여했다.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하는 데 ‘망국적 지역주의 극복’만큼 좋은 알리바이 담론은 없었다.
또 다른 예는 제3의 정당을 모색하고자 했던 재야 정치 세력이다.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한 ‘정치개혁시민연대’, 홍성우를 비롯해 장을병·서경석·장기표 등이 참여했던 ‘개혁신당’, 그 밖에 여러 정치 지향 재야 세력은 통합민주당으로 결집하여 1996년 총선에 참여했으나 참패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지역주의와 3김 정치에서 찾았다.
이듬해 대선을 위해 ‘국민통합추진회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력을 결집한 이들은 “오늘의 정치 현실은 망국적인 지역 할거주의에 기초한 맹주 정치와 붕당 정치로써 정쟁만을 일삼고 있다”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홍성우·이철 등이 차기 후보로 영입하려 했던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었다.
제정구·원혜영·유인태 등이 옹립하려 했던 조순은 선거 막바지에 “지역주의 극복, 3김 시대 청산”을 이유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재야 출신의 이부영·김원웅·홍성우·제정구·이철·박계동 등 역시 동일한 이유를 내세우며 뒤따라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남은 세력 가운데 장을병 등 일부는 이인제 후보에게 갔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김원기와 노무현만이 최종 순간 DJ 진영에 합류했다. 지역주의 망국론은 이처럼 주류 언론, 보수파의 이데올로그 지식인, 학자, 전문가, 마지막으로 여기에 재야 출신 정치 지향 세력이 가세하면서 확산되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치의 갈등과 대립이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정당은 대개 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보고 유권자는 이들에 의해 이용당해 지역주의 투표를 한다는 주장이 아무렇게나 개진되게 되었다. 누구도 이런 엄청난 주장을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지역주의가 영호남을 넘어 모든 지역을 지배하는 망국적인 문제로 정의될 때, 당연히 가장 응집적인 지역주의 문제 지역은 호남이 된다. 요컨대 ‘지팡이’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는 지역, 혹은 차별과 소외를 ‘한’으로 푸는 지역이라는 해석은, 망국적 지역주의론의 다른 짝인 것이다.
지역주의와 지역정당체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지역주의의 지배적 성격과 그것이 망국적 지역주의론으로 변형되어 발휘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강조하고, 따라서 한국 정치를 지역주의로 몰아붙이는 대책 없는 논리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래도 지역주의는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 근거로 지역별로 표의 큰 편차가 존재한다는 사실, 특정 지역이 특정 정당에 의해 독점적으로 대표되는 선거 결과의 문제를 들 것이다.
요컨대 적어도 표의 지역별 편차만큼 지역주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선거 결과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대표성의 함수다. 하나는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기능적 대표 체제’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지역적 차이 내지 지역적 요구가 표출되는 것으로 ‘지역적 대표 체제’라고 부른다.
이 두 대표의 양식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자가 표의 지리적 편차를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면 후자는 표의 계층적 차이를 동질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갈등에 바탕을 둔 정당 이론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의 설명은 단호하다. 선거 결과로 나타난 표의 지역적 편차는 지역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기능 이익에 기반을 둔 갈등의 사회화가 억압되는 정도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
유럽과는 달리 노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 미국이나, 보수당과 노동당의 이념적 차이가 크게 줄어든 블레어 시대의 영국 선거가 지역적으로 표의 분포가 큰 편차를 보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현대 정당 이론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사르토리(G. Sartori) 역시 지역적 대표성에 기반 한 정당체제 분류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요구를 거절하면서, 표가 지리적으로 큰 편차가 생기는 것은 정당체제의 이념적 범위가 협소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당 간 이념적 거리가 분명해지는 이슈가 등장할 때 표의 지역적 응집성은 “불가피하게 분해의 압박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기능적 대표성이 완전에 가까운 정도로 실현된다 해도 표의 지역적 편차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표의 지역적 편차를 가져오는 변수는 매우 많다. 정당들이 어떤 이슈나 갈등을 중심으로 경쟁하느냐도 중요하고, 지역별 산업구조나 계층 구성도 중요하고, 선거제도도 중요하고, 정부 정책이 지역별로 어떤 분배 효과를 낳았는지도 중요하고, 해당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환경도 중요하고, 정당의 전략과 후보자의 개인 변수도 중요하다.
어느 사회든 이 모든 변수들이 지역마다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전국이 똑같은 투표 행태를 보일 수는 없다. 따라서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도 어느 지역은 어느 정당이 강하다는 설명을 하고 또 듣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지역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규범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모든 지역에서 표의 분포가 동일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중앙정부의 자원 배분 능력이 크고, 주요 정당의 이념적 분포가 협소하고 계층적 기반의 차이도 약하며, 정치 엘리트의 집단적 결속에 있어서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1차적 유대가 크게 작용하고, 주류 언론이나 거대 재벌과 같이 권위주의 구체제의 영향력도 강한 분단국가에서 표의 분포가 동질적이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신화에 가깝다.
이런 사회구조에서는 못 배우고 못 가진 하층에 대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지배자적 심리 구조가 커질 수밖에 없다. 어떤 집단이든 이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배타적 낙인과 편견은 얼마든지 작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동원될 수 있다. 과거 4·3 사태 이후 제주가 그랬고, 그 뒤 호남이 그랬으며, 지금은 같은 피를 나눴다고 하는 조선족이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 운명이 되었다. 따라서 지역이나 출신과 같은 1차적 유대가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구조나 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선거 결과의 지역적 차이를 무작정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태를 왜곡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다.
이념화된 반지역주의가 갖는 문제
-사회 속에서 인간은 계급이라는 기능적 구조물 위에서 살고 동시에 지역이라는 공간적 기초 위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 죽는다. 계급으로만 살아서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지역의 차이가 유해한 갈등을 만들고 때로 비합리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지역과의 공간적 유대 없이 인간적인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역과 관련된 주관적 인식이나 객관적 정보가 과도하게 비난받고 금기시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계급의 문제를 과도할 정도로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들이 보이는 반지역적 성향 내지 지역과 계급을 대립시켜 전자를 퇴영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계층적 차이와 불평등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자세가 진정성을 갖는 것이라면, 심리적인 상처로는 그보다 덜하지 않는 지역 차별과 소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관용적이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호남 출신 지식인들이 주장하듯, 한국 사회를 반호남 지역주의에 지배되는 사회로까지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남의 역사적 한’을 말하며 지역주의가 긴 역사적 연원을 갖는다고 왜곡하거나, ‘구조화된 지역 대립 구조’, ‘지역 지배 체제’ 등 지역주의의 사회적 기초를 과도하게 강조해 온 논리나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호남의 피해 의식을 이용해 지역 기반을 독점하려는 정치 세력의 전략적 이해에 기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적으로 개입하거나 사회적 의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인간 행위의 외면적 결과이지 그 내면까지는 아니다.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 국한해 본다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10년의 민주 정부는 호남의 선택이 만들었고, 그것으로써 반호남 지역주의는 더 이상 한국 정치가 해결해야 할 중심 문제의 지위는 벗어났다고 보아야 하고,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나 도전 세력에게 가혹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차별의 구조 일반으로 문제의식을 넓히는 데 있다. 호남 차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실업자와 비정규직, 조선족과 이주 노동자 등 우리 사회 최저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부당한 배제와 차별의 구조로부터 이득을 얻는 집단들은 저항 연합의 최대화를 억제하기 위해 언제든 지역이나 출신, 성, 연령 등 1차적 요인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지역과 관련된 특성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런 지역성을 작위적으로 동원하고 불러들이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 문제라고 이해해야만, 호남 차별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과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이 병행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지역주의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국가, 정당체제, 시민사회로 확대되고 생활 세계로 넘쳐흐르는 효과를 통해 해소되는 다소 긴 시간의 변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해야 할 문제이지, 정치 이념화된 ‘반지역주의’ 내지 거꾸로 전도된 저항적 지역주의로 다시 부추기고 자극할 일은 아니다.
왜 제목이 “만들어진 현실”인가?
우리 사회에서 지역주의 문제라고 이야기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실제 있는 그대로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닌 특정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위해 ‘창조’되고 ‘동원’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제목을 붙였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