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고비
시간의 흐름이 직선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흐름은 곡선이다. 살면서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기 때문이다. 산을 넘어야 평지를 만나듯 삶의 풍파를 견디며 고비를 넘겨야 비로소 앞길이 훤해지기도 한다.
어느덧 일흔 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다다랐다. 그 길을 돌아보니 굽이굽이 휘돌아왔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어찌 고비를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고비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도 여태껏 살아오면서 험한 고비를 만났다. 첫 고비는 20살에 대학 본고사를 앞두고 찾아왔다. 본고사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몸져누웠다. ‘유행성감기’인 줄로 알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당시에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시름시름 몸져누워 밤낮이 어떻게 바뀌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비몽사몽 중에 하늘에서 어떤 분(선친?)이 내려와 내일 시험인데 왜 잠만 자고 있느냐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시험에 나올만한 요점을 정리해주셨다. 아픔을 잊고 벌떡 일어나 책을 펼쳐 요점을 복습했더니 날이 훤히 밝았다.
어머니께서 시험을 잘 보라며 고깃국을 끓여주셨다. 한 달 동안 밥알이라곤 입에도 넣지 못했는데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혹시 설사 복통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약을 먹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 문제지를 받아보니 엊저녁에 가르쳐준 것이 그대로 복사한 듯 나와서 만족하게 시험을 치렀다. 그날 시험 보는 동안 아픔도 사라졌는데 집에 와서 다시 몸져누웠다.
또다시 병마와 싸웠다. 한 달이 지나 시험 발표일이 다가왔다. 나는 몸져누웠는데 친구가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뒷날이 설날이었다. 제사 음식을 먹고 방에 누웠는데 기절하고 말았다. 인근의 소아과 의원께서 오셔서 ‘장티푸스’라며 대학병원에 입원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소아과에 통원 치료하여 간신히 병마와 싸워 이겼다. 그 뒤 삼월에 대학 캠퍼스에 입학하였다.
인생길이 순조롭다 싶었는데 또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첫 고비를 넘긴 지 40년이 지난 뒤에 악성 종양이라는 고비를 만났다. 수술과 투병 생활이 이어졌다. 수술 후에 그 고통은 죽을 만큼 끔찍하여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다. 또 투병 생활은 모든 것을 제한하였다. 아마도 그 고비를 넘기는 데는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고비를 겪고 나면 삶이 한층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듯이 시련은 희망을 자아내기도 한다. 경전의 말씀에도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며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라고 한다. 인생역정에서 시련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 시련을 겪고 나면 삶의 의지와 애착, 희망이 다가온다.
또 무슨 고비가 남아 있을까? 아마도 죽음의 마지막 고비이기를 바란다. 그 고비는 고통과 두려움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야 새로운 삶이 다가오기에 기쁨으로 기꺼이 맞으련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