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kmib.co.kr/viewDetail.asp?newsClusterNo=01100201.19980701000002801
발자크 ‘고리오 영감’(새로읽는 고전:52)
◎빗나간 자식사랑… 뉘라 탓하랴
황금만능 19세기 프랑스 사회
두딸 위해 모든 것 바친 아버지
오직 돈이면 행복인줄 믿었는데
맹목적 집착은 끝내 비극적 종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그런 까닭에 서양에서는 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제 뱃속의 피와 살을 새끼에게 먹이는 것처럼 보이는 펠리컨을 그려왔고,또 기독교에서는 이 기이한 모습의 새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특성은 아니다.자연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행태를 생물이 생태적으로 지니고 있는 개체보존 본능의 연장으로서의 종(種)의 보존과 확산을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면,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동물적인 본성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고도의 지적 능력을 발전시켜온 인간이라는 종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를 구성하면서 자연의 선택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강구해 왔다.그리하여 인간은 종의 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의 가치를 사회학적 가치로 치환하였고,소유와 세습이라는 제도를 무기로 자연의 법칙에 맞선 인간은 자식에게 생존 조건으로서의 자연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물려주는 대신,새로이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노력해 왔다.
자식의 생존 그 자체뿐만 아니라 자식의 ‘행복한 삶’까지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가 된 것이다.
물론 자식의 행복을 위한 부모의 눈물겨운 희생은 그것이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는 이타성(利他性)의 표현일 때,덕목이 될지언정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그러나 문제는 자연의 선택법칙을 대체하는 인간의 사회적 가치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하는 점이다.물질주의와 정글법칙 위에 서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기적인 가치만을 추구할 때,성찰 없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돈이 출발점이고,돈 없이 살기 위해서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황금만능주의가 모든 가치를 지배하는 왕정복고기의 프랑스 사회에서 자식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그 대답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리오 영감도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재산을 모으는데 열중한다.그러나 그는 황금이라는 우상만을 경배하는 수전노의 전형은 아니다.그의 인생의 목표는 황금이 아니라 두 딸,아나스타지와 델핀의 행복이다.황금의 위력으로 어엿한 신분의 배필을 찾아주는 것이 딸들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고리오 영감은 평생을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딸들의 결혼 지참금으로 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하지만 귀족과 재력가와 혼인한 딸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하숙에서 오직 자식들의 행복만을 빌며 비참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자신들의 출신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버지가 자신들의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찾아오는 것까지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의 딸들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다.아버지는 딸들에게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는다.심지어 자신을 외면하는 딸들이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기 위해,또 변덕스럽고 허영심 많은 애인을 붙잡아두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한다면 자신의 여생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한 푼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다.그의 희생은 딸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을 통해 자신의 위장된 정체성을 확보하고,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이기적 성향의 표출이 아니다.오직 딸들의 행복에 의해서만 기쁨을 알 뿐이다.
부성애의 화신인 고리오 영감은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다.뉘싱겐 남작부인이 되어 화려한 사교계에 진출한 딸 델핀이 애인에게 버림받고 슬퍼하는 것에 델핀 자신보다도 더 괴로워하는 고리오 영감은 같은 하숙에 들어있는 가난한 귀족 청년 라스티냑에게 자신의 딸을 유혹하도록 권할 뿐 아니라,이들의 정사를 위해 밀회 장소를 물색하러 나서고,딸의 새로운 외도를 위해 그곳의 가구까지 손수 마련한다.딸들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해서 도덕률까지도 저버린 고리오 영감은 아버지라기보다 차라리 실연당한 연인이고,사랑하는 딸들을 앗아간 사위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어쩌면 쾌감을 얻기 위해 딸들의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패륜적 관음증 환자일 수도 있다.
근친상간적 성향마저 보이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기괴한 아버지는 딸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지만 끝내 기대하는 딸들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해 절망한다.죽음의 침상에 누워 딸들을 찾고,라스티냑에게 델핀을 돌봐줄 것을 부탁하는 등 마지막 부성애를 잊지 않지만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집착 때문에 배신에 대한 절망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 괴물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배은망덕한 딸들을 저주하며 단말마의 고통과 싸우다 숨을 거둔다.정신적 가치인 사랑에 목말라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는데 있어 물질적 수단밖에는 동원할 것이 없었던 한 인간의 비극이 그렇게 종말을 맞은 것이다.
‘부성애의 순교자’로 묘사되고 있는 고리오 영감은 자본주의 시대의 리어 왕이다.하지만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고 절망적이다.리어 왕의 경우는 딸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인하려는 아버지의 이기적 욕망이 비극의 원인이었다면,고리오 영감의 비극적 상황은 그의 집착과 희생이 그 어디에도 원인을 돌릴 수 없는 광적인 신앙행위였던 까닭에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었다.이 ‘부성애의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의 눈먼 사랑을 지적할 용기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함께 할 막내딸 ‘코델리아’가 없었다.
추구할 가치라고는 신분상의 특권과 물질적 풍요밖에 없고,오직 황금과 권력이 있는 곳에만 행복이 깃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비단 고리오 영감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오늘도 신문과 텔레비전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고리오 영감과 그 딸들의 행태는 황금만능에 적셔진 부모들의 빗나간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닌가.
<이건우 서울대 불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