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국과 낙랑군이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 되고 있죠.
검색해 보니.. 책사풍후의 글이 있어서 퍼 옵니다.
밑에다 다른 사람의 글도 인용해 봅니다.
http://egloos.zum.com/ragwangfal/v/1877780
== 최씨 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 낙랑국과 같은 존재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학계의 정설은 후한 광무제 서기 30년에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 예 땅에 있는 동부도위 영동 7현(낙랑군 소속)을 전부 제후국들로 바꾸었다는 후한서, 삼국지 동이전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본기에서 호동 왕자가 옥저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났다는 말로 보아 평양엔 낙랑군. 옥저엔 낙랑국이 있었다라고 본다.
낙랑국의 자명 나팔, 북, 악기, 역시 한나라가 변방 제후국에게 하사하던 나팔, 북, 악기로 해석할 수 있다.
(후한서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는 현토군에 나아가 관모, 관복, 나팔, 북, 악기 등을 하사받는다.)
한漢제국의 나팔, 북, 악기를 가지고있으면 주변국은 함부로 침략할 수 없다.
천자의 제후국이므로, 낙랑공주는 천자가 하사한 악기를 모두 때려부수고, 호동의 고구려군을 맞아들인다.
열받은 최리는 공주를 죽이고 항복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본기는 서기 44년 후한 광무제가 바다 건너 수군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고 살수(청천강) 이남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하지만 중국 기록들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사건은 전혀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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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어질 수 없는 사랑과 신비의 자명고... 이러한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면서 우리는 당연히 낙랑공주는 낙랑군의 공주, 즉 한사군(漢四郡)의 공주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삼국사기에 호동왕자에 의해 멸망한 낙랑이 멸망했다는 기사(37년)와 다르게 그 후에도 한(漢)의 광무제의 공격으로 낙랑이 등장하며 지속되다가 313년 미천왕에 의해 멸망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자의 낙랑은 무엇이며 후자의 낙랑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여기서 우리는 호동왕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최리(崔理)라는 왕의 존재에 대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한나라의 낙랑군이라면 태수의 직함이 있어야지 왕이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또 다른 낙랑국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낙랑국과 관련된 여러 견해를 종합하여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낙랑국과 낙랑군을 하나로 보는 입장이다.
낙랑태수가 본국의 통제력이 느슨해져 왕의 행세나 왕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본국에 대해서는 태수의 직함을 쓰고 본토에서는 왕으로 군림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낙랑국과 낙랑군을 별개의 존재로 설정한 학설이다.
이는 한(漢)이 침공하기 이전부터 임둔, 진번, 현도가 위만 조선의 주변 소국으로 존재했다가 한의 군현이 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는 별도로 고구려현이 현도군 속현으로 존재한 사실에 견주어 낙랑국과 낙랑군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한(漢)나라는 위만조선의 상층부가 분열해 붕괴하자 친(親)중국 세력인 낙랑국을 중심으로 군현을 만들어 낙랑국의 낙랑왕을 계속 두고, 별도로 중국의 군 태수가 설치된 이중적 통치구조를 유지했다는 입장이다. 이들의 영역은 중첩됐고 중심 위치는 인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학계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낙랑군은 랴오둥(遼東)의 카이펑(開平) 일대에, 낙랑국은 현재의 평양 일대에 존재했다고 본다.
셋째, 낙랑이란 표현이 낙랑군과 이에 예속된 존재들에 대한 포괄적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란 학설도 있다. 즉,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낙랑’이란 표현이 신라, 백제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와 거리상 낙랑에 포섭됐던 말갈이나 옥저, 동예 등과 같은 예속세력을 ‘낙랑의 세력’이란 의미로 ‘낙랑’이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낙랑공주의 모국인 낙랑을 낙랑국 또는 낙랑에 예속됐던 주변 소국으로 이해한다. 즉, 친중국적 낙랑국을 다스린 최리 정권이 호동왕자 사건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어(서기 32년) 고구려에 복속됐고(서기 37년),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자 ‘삼국사기’ 기록처럼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다시 장악하고 후한시대의 낙랑군 체제를 수립해 살수(薩水·청천강) 이남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이때 재정비된 낙랑군이 후에 미천왕에 의해 다시 복속된다(서기 313년). 이 경우 낙랑은 평양과 인접한 지역이 된다. 결국 낙랑국과 낙랑군이 따로 존재했고 먼저 고구려에 의해 낙랑국이 복속된 다음 나중에 낙랑군이 복속된 것으로 정리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낙랑은 중국과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을 했던 친중국적 세력으로 파악되며 특히, 그 속성상 고구려 발전을 위해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 참고 자료: 한국사 이야기 1, 이이화/ 동아일보 2004-04-19,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
[출처] 낙랑국(?) 낙랑군|작성자 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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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왜 낙랑국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뭔가 유물이 있어서?
첫댓글 낙랑국의 자명 나팔, 북, 악기, 역시 한나라가 변방 제후국에게 하사하던 나팔, 북, 악기로 해석할 수 있다.
(후한서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는 현토군에 나아가 관모, 관복, 나팔, 북, 악기 등을 하사받는다.)
낙랑국의 북 사건을 이렇게 연결해서 볼 수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