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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를 쓰는가?’
- 詩의 화분에 꽃으로 피고 싶다/ 황병숙시인
봄이 오고 있다. 첫사랑의 맨발 곁으로, 이 세상 전부 같던 첫사랑이 노랗게 단물 들던 봄날이 오고 있다. 첫사랑은 향기로운 웃음을 흔들며 빗방울 뒤에 서서 꽃들의 심장을 두드린다.
더듬이가 잘린 개미처럼 첫사랑 주변을 맴돌던 열여덟 봄이 다시 오고 있다.
산뜻한 햇빛 속에서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게 더 자주 행복하다 말하며,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를 꺼내들어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픈 봄이 온다. 첫 꽃송이를 터뜨리는 목련 나무처럼, 사정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첫사랑 앞에 나는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연분홍 복사꽃 같은 그리움의 온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봄이 온다. 수없이 꽃이 피고 그리움이 열리는 봄, 첫사랑이 선을 넘어오고 있다.
내 삶에서 봄날 첫사랑처럼 내게 행복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시였다. 첫 꽃송이를 터뜨리는 목련 나무처럼 설렘을 피어 올렸던 시절이 언제였든가. 시를 만나 느꼈던 연분홍 복사꽃 그리움의 온도를 찾아 나서본다. 어디에서 만났고, 왜 시를 쓰게 되었는지 내 열여덟 봄을 두드려본다.
동네에 또래 여자 친구가 없었던 유년시절, 뒷산 기슭에 오월이면 아름드리 아카시아들이 향긋한 내음으로 마을을 휘저었다. 하얀 아카시아 달콤한 꽃송이를 훑어 한입 가득 오물거리기도 하고, 파란 하늘과 대화를 하며 시를 지었다. 외롭기에 하늘과 산, 꽃과 새가 친구가 되고 시가 되었다. 시는 어릴 적 엄마 품같이 넓은 가슴을 지녔다. 어떤 말도 들어주었고, 비유나 은유로 언제나 나의 대변인이 되어 주었다.
2002년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말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섰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입술에서 맴도는 이야기˼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시론을 펼친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 혀끝에서 맴돌던 말이 마침내 이름을 바꾸고 입술을 통해 뛰어내릴 때 시가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 어린 시절 두 차례나 심한 자폐증을 앓은 적이 있는 키냐르는 또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란 잃어버린 것의 시간을 취하기, 귀환할 시간을 갖기, 잃어버린 것의 귀환에 협력하기이다. 그때 감동은 기억을 되살릴 시간을 갖는다. 기억은 돌아올 시간을 갖는다. 글쓰기, 그것은 잃어버린 목소리 듣기이다.” 시는 침묵을 지키며 소중한 것들을 말하는 매력적인 나의 삶의 방편이 되었다.
또한 나에게 시는 꿈꾸는 일이다. 망상의 달인으로 불리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면 시인은 몽상하는 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라는 몽상하는 존재의 작업이고, 동시에 시인의 시적 몽상의 작업이다.” 시인은 꿈꾸며 뿌린 행복의 씨앗이 마침내 현실 속에서 싹트고 꽃 피게 한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 힘이 되고 길을 열어준 벗이 바로 시였다. 밤새 시어를 찾아내고 고민하던 시간들이 스쳐간다. 때로는 반성문처럼 어떤 때는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절실한 내 삶의 일부였다. 새 중에 가장 작은 벌새도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바다는 하루에 70만 번씩이나 파도를 쳐서 새로워진다고 한다. 부단히 갈고 닦으며 꿈꾸는 시인으로 겸손히 나를 돌아본다.
내가 근무하는 치과에 내원 하시는 분들 중에는 화가 나있고, 스스로 진단을 하여 원장님의 진료를 의심하고 곧이곧대로 듣지를 않아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풍요롭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롭고 불신하며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마저도 믿을 수 없어 분노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인은 세상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미력한 내 시도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 편협하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고, 작은 길 안내판이 되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를 쓰고자 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면 너무 거창해지는 걸까. 내 시를 읽는 독자들께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는 시를 쓸 수 있다면 의미는 충분하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포이에마’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고 여기에서 ‘포임’(pome) ‘시’(詩)라는 단어가 왔다. 시처럼 살고 싶은 울림을 주는 말씀이다. 눈을 열어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 호수와 꽃밭이며 하늘 나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고 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면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을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시’라고 말해주었다.
‘산문은 백 사람에게 한 번씩 읽히는 문장이지만 시는 한 사람에게 백 번씩 읽히는 문장이다.’라는 글이 기억난다. 시는 형식이 간결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시의 표현이 편하고 쉬워서 보다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아름다운 것, 감동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언어로 옷을 입혀 표현하는 사람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정제된 예술 양식이 시다.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영혼의 보석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시공간을 넘어 감동의 물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좋은 시는 시를 아는 독자보다는 시를 모르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여야 한다. 정말로 시가 필요한 사람들은 일반 대중들이다. 시의 형식은 단호하게 짧아야 하며 시에 동원되는 언어는 쉽고 평이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하고 시의 주제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것이어야 한다. 좋은 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만나 온 사람들처럼 만들어 준다. 시 안에 들어 있는 시인의 마음이 시인과 독자에게 다리를 놓아 주어서 그런 것이다. 그만큼 시는 멀리까지 가면서 세상을 한껏 넓혀 주는 일을 담당한다.
“시의 첫 문장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시를 써 본 사람은 짐작 할 것이다. 언제든 좋은 시의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까지를 통제하도록 되어 있다. 이 또한 인간인 시인이 자의적인 노력이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그 어떤 신비한 영역의 일이다. 한 편의 시는 외부적인 존재(사물, 사람)든 내부적인 존재(마음, 영혼)든 타자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시들 중에 좋은 시는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하면서 그를 가슴속에 간직할 때 쓴 작품들이다. 그것은 번번이 사랑하는 마음 위에 떨어진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시인은 세상 모든 것을 처음 보고 듣는 것처럼 하는 마음이다. 세상 만물은 그 앞에 새롭게 금방 태어난 생명이 된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창조하고 세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사람이다.
가장 최근에 쓴 시 한편 소개해 드린다.
바람은 바다를 건너
봄을 몰고 거슬러 오른다
고삐에 꿰인 봄을
어디에 방목하려는 것일까
오래전 바람이 익힌 유목에
아름다운 봄날도 수정되고 있다
바람에 날아간,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의 마음도 이동경로가 있다
바람의 더듬이 끝에
움트는 연둣빛들
마음에 진을 치고 봄이 머문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강변이 개나리 빛이다
분명 바람의 짓
오래된 이동의 습관에
사막의 하늘이 이곳까지 날아오고
봄은 황사로 길을 연다
도시의 하늘에 제일 먼저 집을 짓는
떼를 지어 달려오는 바람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 황병숙 ˹바람의 유목˼ 전문
시인은 말하는 존재 이전에 듣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듣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서 사물에게 ‘말하는 입’을 주는 존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사물의 그 미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존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청각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시는 내가 본 만큼 쓰게 하고 내가 발견한 만큼 쓰게 하는 내 삶의 저자이다. 시와 소통할 때 끊임없이 나를 격려해 주고 채찍질해 준다. 시는 친구 같은 존재이다. 때론 좌절하지만 나를 성숙시키게 한다. 지금까지 나는 내 가슴에 스스로 무엇을 채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 손에 꼭 맞는 도구가 되어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을 대언하고 싶은 각오도 시를 쓰는 또 다른 이유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이 시가 되고, 시가 노래가 된다. 그리고 노래가 다시 희망을 준다. 온 세상이 캄캄해 보일 정도로 희망이 사라진 날, 정말이지 지독히 외로운 날 그런 날일수록 시를 찾고, 노래를 하며, 누가 뭐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본다. 절망과 슬픔은 끝내 소망과 기쁨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이다. 그곳에는 고석정 전쟁기념관을 비롯해 민통선을 통과해 가는 철원평화전망대와 제2땅굴, 월정역과 두루미관, 노동당사며 백마역까지 관광하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그 중 월정역에는 지금도 녹슨 철마가 누워 있고 곁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 라는 팻말이 있다. 기러기 떼 철원 하늘을 수놓는데 철로는 장벽에 기대어 오수를 즐기며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반백년 세월의 잔재를 덮어쓴 철마가 벌떡 일어나 기적소리 울리며 평양의 하늘을 다시 품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에서 로마까지 횡단하는 실크로드의 원대한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을까. 내 시도 어쩌면 달리고 싶은 철마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라는 제하의 글을 부탁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 그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역량도 부족할뿐더러 내가 선 자리가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정중히 고사했었다. 허나 넘치는 사람에겐 넘침을 배우고 모자라는 사람에겐 모자람을 배운다는 가르침이 있다. 부족하지만 읽어주신 분들께 옷깃을 바로 잡으며 경의를 표한다.
“혀끝에서 맴돌던 말이 마침내 이름을 바꾸고 입술을 통해 뛰어내릴 때 시가 된다.” 는 의미를 가슴에 심어두고 눈물로 물 주어 키워나가겠다.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턱없이 부족한 답이지만 감사함으로 맺으며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다.
photo by. 이은희 작가님
첫댓글 믿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글이 곱고
예쁘네요
향필하세요
정유광시인사모님
고맙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오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좋은 하루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