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아가씨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1964년)
196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동을 건 소위 조국근대화 작업이 본격 추진되는 시기였다. 농촌의 풍부한 유휴인력을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게 하여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박(朴) 정부의 노동집약적 수출산업화가 엄청나게 성공하였다. 1962년 4700만 달러 수출이 1964년에 1억 달러, 1971년에 10억 달러를 수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농촌에 있던 사람들이 출세의 꿈을 안고 도시로 나가 크게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동기를 잘 활용하여 돈을 많이 벌기도 하고, 고시(考試)에 합격하여 고위관료나 법관이 되었으며, 유학을 하여 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는 경우도 많았다. 농촌 출신의 출세자들은 도시의 고명한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이미 잡았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처럼 혁명적인 계층상승이동 과정에서 촌(村)에서 정을 주고받으며 사귀었던 여인과의 사랑은 파탄이 나게 된다.
1960년대 라디오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출세한 남자로부터 버림받는 여인들의 아픔을 소재로 하였다. 이런 작품들에서 하나의 상징적 도식이 드러난다. 즉, 1)시골 출신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곳에 남겨두고 서울로 가서 출세하거나 혹은 서울에서 온 귀한 남자를 촌 출신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2) 촌 출신 여인은 섬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남게 된다. 3) 출세라는 사회적 장벽(즉 문예작품에서는 바다로 표현) 때문에 그에게 다가갈 수 없거나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에서 이런 도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1963년 방송작가 추식(秋湜)이 집필한 <동백아가씨>가 동아방송(DBS) 라디오 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내용은 그 시절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다루었던 청춘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서울에서 약초를 캐러 내려온 젊은 청년이 섬 처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임신을 시킨 후 서울로 간 후 소식이 없다. 그는 이미 서울의 다른 처녀와 결혼을 하고 유학을 떠났다. 그를 찾아온 동백아가씨는 동백빠에서 일하다 유학을 다녀온 그 남자를 만나나 외면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낳은 딸을 그 남자에게 넘겨준다.
1960년대에는 이렇게 라디오 드라마가 히트하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당시의 관행에 따라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도 김기(金起) 감독이 당시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신성일·엄앵란을 주연으로 하고, 김승호·황해 등을 배우로 캐스팅하여 영화로 만들기로 하였다.
부산시 사하구 다대포 해수욕장과 경북 울릉도에서 이 영화에 대한 촬영을 마칠 즈음 부산 부평동 출신 작사가 한산도에게 주제가 작사를 의뢰하였다. 그는 떠나간 연인을 기약없이 기다리며 울다가 지친 여인의 서글픈 심정을 가사에 잘 담아서 부산 출신 작곡가 백영호 선생에게 넘겼다. 한산도의 가사를 본 백영호 작곡가는 이미 머리 속에 구상해둔 듯이 2시간 만에 작곡을 끝냈다고 한다. 당초 이 노래를 인기가수 최숙자가 부르려 했지만 비싼 개런티가 문제였다. 그래서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후 좋은 가창력을 보인 이미자를 이 노래를 부를 가수로 선택하였다.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인 이미자는 스카라 극장 2층 지구레코드 녹음실에서 얼음을 담은 물에 발을 담고 이 노래를 녹음했다고 한다.
지구레코드에서 출시된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상상할 수 없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녀를 인기가수의 위치에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방송가요 차트에서 무려 35주간 1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한국가요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더구나 지방 레코드업자들이 여관에서 진을 치며 <동백아가씨> 레코드를 한 장이라도 더 사려고 혈안이었다. 이런 추세가 한동안 게속되자 <동백아가씨> 레코드는 100만 장이 넘게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한국의 경제사회적 사정을 고려하면 지금으로 치면 수천만 장이 팔릴 정도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이미자는 평생 그녀를 짓눌렸던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레코드의 판매로 얻은 수익 외에도 극장 공연을 할 때 개런티가 엄청 올라갔다. 더구나 여기저기서 출연을 해달라는 곳이 많아 하루 종일 여러 극장을 다니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1965년 12월 예술윤리위원회에서 이 노래를 방송금지 가요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왜색조(倭色調)였다. 설상가상으로 1968년에는 음반제작금지 조치까지 당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경쟁음반사의 음해로 희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야당과 대학생, 재야에서 반대하는 한일협정을 추진한 박 정부는 이런 노래를 왜색조라고 하여 금지조치를 함으로써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려고 했다는 설명이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가요연구가 이영미 씨는 <동백아가씨>의 방송금지 조치는 여론 주도층과 문화계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추진한 것이지 정부가 주도한 것은 아나라는 설명을 내어 놓았다.
이미자는 이 노래로 인해 1966년 7월 일본 빅터레코드의 초청으로 일본에 진출하게 된다. 그녀는 이미자라는 이름 대신에 리요코시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한국어 <동백아가씨>를 일본어 <사랑의 붉은 등>으로 번안(飜案)하여 음반으로 취입하였다. 아울러 일본 TV에 출연하고, 일본의 정상급 가수 프랭크 나가이 등과 듀오 음반을 내었다. 또한 1979년 5월 22일 후쿠다 전 일본 수상 내외 방한(訪韓) 기념 청와대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후쿠다 전 일본 수상 앞에서 금지곡인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국민가요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1965년 위키리, 유주용 등 가수와 곽규석, 구봉서 등 코미디언과 함께 파월장병 위문공연차 베트남에 주둔한 비둘기 부대에 가게 되었다. 열렬한 이미자 팬인 조문환 사단장이 이 노래를 사단가로 지정하여 아침과 저녁 식사시간에 이 노래를 틀어주었다고 한다. 이어서 진행된 공연에서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이미자에 대한 열광적인 환호와 앙콜 요청에 이미자는 이 노래를 몇 번을 불렀고,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같이 합창하였다고 한다. 후일 이미자는 그의 가요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회고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미 돌아가신 유명한 언론인 홍승면씨는 1978년 그의 칼럼에서 <동백아가씨>를 ‘제2의 애국가‘라며, 심지어 ”이북에서 간첩을 보낼 때 고스톱과 동백아가씨는 꼭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유머스럽게 언급하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첫댓글 장사익님의 팬입니다.ㅎ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