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에세이>
신의 섭리외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절정에서 스러진 삶에서 다시 시작되는 꿈
우리는 각자 같은 곳, 또는 다른 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삶은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의 등장인물 뽀조의 대사 중에 “눈물의 양은 항상 일정하지. 누군가 울기 시작하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웃고 있거든.”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 속에는 신의 섭리가 들어 있다.
우리와 다른 시간, 혹은 같은 시간에 각자 다른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의 섭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 꿈의 절정에서 안타깝게 그 꿈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스러진다. 그런데 다른 공간의 누군가는 그 꿈을 이어받아 완성하며 사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세상을 버리려고 할 때, 또 어느 누군가는 새롭게 삶을 희망차게 시작할 수도 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다른 공간 속의 누구와 누군가는 함께 꿈을 향해 나아갈 수도, 아니면 전혀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신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폴란드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98분)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두 여자의 다른 삶을 통해, 신의 섭리와 인간 존재를 성찰하고 있는 영화이다. 폴란드에서 살고 있는 여성 베로니카는 솔로로 발탁되어 오케스트라와 협연 중에 심장마비로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둔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여성 베로니크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간다. 폴란드에 베로니카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던 순간 갑자기 생경한 이질감을 느끼며 흠칫 한다. 베로니카의 죽음이 베로니크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두 여성은 같은 날 같은 시간, 각자 폴란드와 프랑스라는 다른 공간에서 태어난다. 그렇지만 두 여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우연하게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음악을 향한 꿈과 열정이 같다. 그런데 그 꿈을 향한 여정은 다르다.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무대 위에서 꿈의 절정을 맛보는 순간 안타깝게 숨을 거둔다.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성악 사사의 꿈을 접고 학교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지도한다. 한 여자는 꿈의 절정에서 숨을 거두고, 다른 한 여자는 꿈을 향해 나아가던 순간에 갑자기 그 꿈을 중단하고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다.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사랑을 고백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것을 완성하기도 전에 목숨을 거두지만,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의 완성을 위해 한 발을 내딛어 결국 그 사랑을 완성한다. 한 사람은 음악에 대한 꿈의 절정에서 스러지고, 다른 한 여성은 꿈을 포기하는 대신 사랑을 완성한다.
감독은 왜 이렇게 다른 환경의 두 여성의 삶을 교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폴란드의 베로니카의 삶을, 그리고 다음에는 프랑스의 베로니크의 삶을 차례로 묘사하고 있다. 감독은 서사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감독의 두 여성에 대한 은유적인 의도가 두어 번 개입하고는 있다.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무대 위에서 절정을 노래하며 숨을 거둘 떼,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생경한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폴란드로 관광 차 여행 왔을 때 광장을 지나치던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그녀를 알아보는 순간의 경우, 그리고 엔딩 시퀀스에서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아버지의 작업실로 가던 중 오래 된 나무의 둥치를 쓰다듬고 있을 때, 그리고 목공 작업을 하던 중 베로니크의 아버지가 흠칫 뒤돌아 볼 때 그들 두 사람의 귀에 울려오는 폴란드 베로니카의 청아한 노랫소리 등은 감독의 의도적인 은유로 개입한다. 그것은 곧 두 여성에 대한 신의 의도이기도 하다.
두 가지 다른 삶, 인간 존재에 대한 신의 섭리
두 가지 다른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감독의 의도는, 그 두 가지 다른 삶은 개별적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윤리적인 태도이다. 사뮈엘 베케트가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이 세상 속 우리는 신의 섭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공간 다른 사람일지라도 신의 섭리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윤리적인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면 다른 어느 쪽에서는 웃기도 하고, 지구의 어느 모퉁이에서 누군가 꿈을 이루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때, 또 어느 모퉁이에서 누군가는 꿈의 절정을 맛보기도 하고, 여기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거기 누군가는 사랑의 절정을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혹은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의 제목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인데 작품의 주제와 연결 지어 볼 때 옳은 작명은 아닌 것 같다. ‘베로니카의 두 가지 삶’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베로니크’가 아니라 ‘베로니카’인가?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이 영화는 각자 이름이 다른 두 여성의 삶이 아니라, 베로니카라고 하는 한 여성의 두 가지 다른 삶일 수도 있다. 한쪽은 꿈을 향해 나아가다 그 절정에서 결국 꿈을 완성하고 죽는가 하면, 어느 한쪽에선 현재의 그 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의 두 가지 다른 삶을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자신의 어느 한쪽에선 꿈을 이루려는 열망이 가득한데, 또 다른 한쪽에선 그 열망의 꿈을 포기해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베로니카라고 하는 한 여성의 두 가지 다른 삶을 보여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자신의 꿈인 성악을 향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오히려 그 꿈의 완성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려는 뜻도 내비친다. 그녀는 매사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가 있는 도시로까지 와서 진정한 사랑을 고백한다. 결국 그녀는 오디션에 발탁되어 꿈의 무대 위에 서서 그 꿈의 절정을 노래한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사랑과 꿈을 오롯이 그대로 품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해서 당당하게 솔로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 절정의 순간에 심장마비로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결국 그녀는 사랑과 꿈을 함께 품은 채 절정의 순간에 스러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 살고 있는 여성 베로니크의 삶은 어떤가? 그녀는 성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레슨을 받고 있다. 그러나 도중에 그 꿈을 포기하고 한 초등학교의 오케스트라를 지도한다. 풀란드의 베로니카가 무대 위에서 꿈의 절정에서 스러지는 순간 그녀는 남자와의 사랑에 생경한 이질감을 느낀다. 그녀는 학교에 초청 공연을 하고 있는 인형극 공연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인형들을 조종하고 있는 남자 알렉상드르(필립 볼테르 분)에게 마음이 꽂히게 된다. 서로의 눈이 우연하게 마주치는 순간 그 둘의 운명은 완성되고 만다. 앙렉상드르는 인형을 조종하는 동화작가이다.
엘렉상드르는 또 다른 인형국의 동화를 쓰기 시작한다. 그 각본에 베르니크는 운명처럼 휘말리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일순 꿈을 포기하지만 다시 사랑의 꿈을 완성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알렉상드르가 새로 쓰는 인형극의 대본은 베로니카와 베로니카의 두 가지 다른 삶에 관한 이야기로, 지금까지 보여준 두 여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알렉상드르는 신의 섭리이기도 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감독 자신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은유적 상징의 메시지일 수 있다.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알렉상드르의 새로운 인형극 시연을 본 뒤 아버지의 작업장으로 향한다. 도중에 한 오래 된 숲의 나무를 발견하고 나무 둥치를 어루만진다. 그 순간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절정의 순간에 부르던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던 순간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흠칫 되돌아 보게 된다. 전혀 다른 공간 다른 삶 속으로 베로니카의 노랫소리가 마치 운명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들 사이의 영적 교감이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은유적인 상징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러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신의 섭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각자 개별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동시에 서로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살고 있어도 그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신의 섭리에 의해 모두 운명적으로 연결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감독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인간 존재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며 성찰이기도 하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는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에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는 무엇 때문에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구호 활동을 벌인 것일까? 인간에 대한 윤리적 책임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베로니크,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폴란드 여인 베로니카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공감하는 것 역시 인간 존재의 연대의식에서 비롯한 윤리적 책임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종과 국가가 다르지만 인간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울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 그것은 인간 존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누군가의 울음에 공감하고 연민하는 윤리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 울음과 우리 사이에는 신의 섭리가 게재되어 있기 때문에 공감과 연민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생 떽쥐베리는 그것을 인간다운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한 신성은 인간다운 행동을 했을 때 밖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크쥐시토프 케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영화이다. 인간은 인간다운 행동을 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으면 우리 역시 그 슬픔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껴야 한다. 그것이 곧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하는 키워드일 것이다. 이 영화는 신의 섭리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리포트이다 <계간 문장, 202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