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책과 인생의 승리
묵시 3,1-22; 루카 19,1-10 /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2024.11.19.
사람의 일생은 두 가지 양식으로 마칩니다. 스스로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다가 죽는 양식을 택하거나, 사고나 질병이나 또는 그저 나이 들어서 노화된 신체의 기능이 약화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이 다만 누구든지 당신의 제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수명을 다하고 죽거나 고통 없이 죽는 자연사를 예찬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고 그분의 처신과는 더욱 반대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단지 생의 마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과 주도성이 드러나야 할 가장 큰 삶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지니는 무게는 죽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며, 우리 인간의 공동 목표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온 시간의 길이보다는 사는 동안 그 삶의 질과 내용에 대해 강조하셨다고 하겠고, 그 삶의 질과 내용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과 맺는 관계와 거리에 달려 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었던 초대교회에서 사르디스 교회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린 신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라오디케이아 교회에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서 미지근하게 사는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로마제국의 무지막지한 박해가 지속되던 그 엄혹한 상황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부디 박해를 견디어 내고 오히려 신앙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삼아서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라고 당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도 백 살이 다 되어 가는 늙은 나이에도 파트모스 섬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던 힘든 처지였지만, 틈나는 대로 동굴에 가서 기도하면서 이 묵시록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라오디케이아가 아니라 사르디스의 용감한 신자들처럼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도 중에 환시로 보았다는 생명의 책은 죽임을 당한 이들이 아니라 죽음을 택한 이들, 즉 삶도 죽음도 주도적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는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렸고, 라자로를 괄세한 익명의 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자캐오는 바늘 구멍을 통과한 낙타처럼 기적적인 구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자캐오는 예리코에 살았고 익명의 그 부자는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머지 않은 위치에 자리한 예리코는 그 역사가 그 당시로부터도 무려 오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 아주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는 수량이 풍부한 오아시스가 있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이집트로 가거나 그 반대로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가는 상인들과 나그네들은 반드시 예리코에 들러서 물도 마시고 쉬기도 했으므로 예리코는 오래된 만큼이나 번창하던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세관장 자리까지 걸머진 자캐오는 부유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직업 때문에 공적으로는 기피 인물이 되어 사람들과 마음편히 만나지 못하고 소외된 채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께서 그 도시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나고 싶었지만 어려웠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행동 속에 표현된 자캐오의 성의를 보신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묵으시며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자캐오의 가족들까지 구원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자캐오 역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노라며 공개적으로 회개를 선언함으로써 예수님의 자비에 응답하였습니다. 졸부의 회개와 구원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자기 이름을 생명의 책에 올리게 된 경위가 이러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도 요한이 권고하는 바 생명의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인생의 승리는 세상 사람들이 내리는 평판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는지,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얼마나 베풀었는지에 따라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그러니 죽임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시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살아가시기 바라면서,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이 전해 주는 성령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