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당(僧堂)마을
해운대 초입에 자리한 승당(僧堂)마을은 수영만(지금의 우2동 동부아파트) 해변 지역이다. 바로 동백섬이 지척에 보인다. 왜 마을을 승당(僧堂)이라 이름 하였을까?
이에는 임란 승병장 사명대사와 관련설이 전해온다. 1601~1603 년경 대사가 남긴 부산에서의 흔적을 보면, 당시울산 가등청정의(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탐정하고 나서 나름대로 일본(왜구)의 재침이 우려되어 긴급 대비책으로 한 일이 부산진성의 수축(修築)이었다.
위 기간 동안 대사는 승들의 부산진성 수축을 지휘 감독하였다. 부산진성은 감만포. 좌수영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당시 그 반경에 있었던 절은 백산(白山. 지금의 민락동)에 있었던 백산사(白山寺. 옥련선원)뿐이었다.
범어사가 본산(本山)이라 할지라도 이미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승려들이 거처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명이 거처할 수 있는 부산진. 감포만. 좌수영을 가까이에서 출입 가능한 절은 백산사 뿐이다. 이 절은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오고 갈 때 모두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산사가 있는 해안가에는 전선(戰船)을 만드는 선소(船所),
산 정상에는 적의동태를 살피는 첨이 대, 건너편 승당마을은 작전의 요충지였기에 사명대사의 거처는 근처에 있는 백산사(지금의 옥련선원)라고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여기에 부역으로 동원된 승(僧)들은 어디서 숙식(宿食)하였을까? 작전상 백산사 와 승당마을이 아니면 불가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승려들이 기거하고 있어서 승당마을이라 불렀다고 본다. 특히 바다에 접해있고 좌수영 인근이라서 부역과 작전 등을 행할 때 배편으로 승들의 이동을 하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2동 승당마을은 1980년 초 수영 만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어촌마을이었다. 특히 강 하구와 맞닿은 위치라 어자원이 풍부하여서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일제 강점기 1930년경 한 어부가 수영 만에서 그물로 인어(人魚)를 잡았는데 이 인어가 하도 슬피 울기에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해는 멸치가 대풍이어서 어민들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동백섬 인어전설에는 황옥공주가 인어로 변신하여 바다 속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가 있었다고 하며, 이것을 가끔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동백섬 앞바다에는 인어가 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전설 적인 고향에서 난 살았다. 누가 보면 어른 인 것 갔지만 난 아직도 그 때에 어린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아보았다. 가는 길에 동부아파트를 지나면서 가끔 자치위원장 깨서 동백 아가씨 노래비 이야기를 한 것을 들어 보았어나 위치를 잘 몰랐다. 아니 깨끗하게 단장을 했다고 하던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은 본거 가타다.. 참 오래 여기(동내) 있어 것만 오늘 에서 처음 발견을 한 거 가타다. 그리고 멍 하니 왜 여기에 이미자 동백아가씨 비가 있어야 하는지 궁금하면서도..
여하튼 노래 말을 되새겨본다..
혜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 그런 네 혜일 수없이 수많은 날들이..나에게 지나갔네! 승당 이라고 하는 마을(승당) 은 없고 아니 내 고향은 이제 없다.. 그래도 잘지 커주는 이가 있어 고맙고..한 참 후에는 이 또한 옛 이야기로 남 아 있겠지.. 바다가 육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