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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나의 고아원
-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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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 안미옥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
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 열리
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
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당선소감>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도망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언어의 시작이 되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시를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의 오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정현 덕분이다. 내가 의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말로 다 할 수 없게 고맙고 미안하다.
힘껏 미워하고, 힘껏 사랑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의 벗, 사랑과 버들에게, 나를 믿어주는 은정에게, 항상 지지해 주고, 격려해주는 정숙 언니에게, 곁을 지켜주는 슬기에게, 나보다 나의 잘됨을 더욱 기뻐하는 진희 언니에게, 부케처럼, 바통을 넘긴다. 나은아. 내 옆에 있어 준 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원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했다. 깊고 단단하게,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명지대 교수님들과 부족한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 앞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무서운 손으로.
안미옥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심사평>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 온 16명의 80여 편의 시들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른 작품들은 거의 일치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응모작들에서 그 다름을 분별하는 감각의 얇음과 두꺼움의 차이를 눈여겨보았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그의 시는 재능의 촉을 충분히 느끼게 했고, 작품마다 다른 매력을 뿜어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 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장석주 시인,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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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월면 채굴기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당선소감>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 같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할 것"
바다 건너에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라는 옛 검술이 있다. 그 창시자는 제자들 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오직, 다 버리고 초연하게 내던지는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
”아직 미숙한 내게 등단은 그런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으로 찾아왔다.
숨을 고르며 새삼 뒤돌아본다. 문학을 배우겠다고 덤빈 날이 어느덧 두 자리 햇수를 넘겼을 때, 내 앞의 시는 노력과 버림 사이에 있었고 초연함과 무덤덤함의 사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희망이 없어도 캐어낼 순 있었고, 오랜 그늘 속에서도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로 내려앉은 것 같은 지금의 느낌을, 나는 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가 아닌 ‘시’인 것이라고 뜨겁게 한 번 우겨보려 한다. 나의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들, 부족한 내게서 재능보다 노력을 높이 보아주셨을 고마운 분들에게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행복한 걱정이 앞선다.
문학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주신 김석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권혁웅 조연호 선생님을 비롯한 금요반 모든 시인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우들에게 이 행복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이젠 내가 이 따뜻한 빚을 갚아나갈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늘 촌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마음,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설치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불만도 없이 끝까지 믿음을 주셨던 부모님께, 차마 부끄러워 표현할 수 없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행복하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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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조련사K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당선 소감]
"초심으로 돌아가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아,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연말 캐럴 송을 들었지만 올해의 캐럴은 유난히 따뜻한 음절로 들립니다. 상처받으면 혼자 공상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좋아하던 제가 이렇게 보상을 받는군요.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사물들에게 감사합니다.
한명원 집 근처에 있는 동물원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자주 갔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개최하는 동물교실을 수강 신청했습니다. 염소에게 풀도 주고 물개들에게 생선도 던져주며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련사를 보면 동물들은 달려왔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컸고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나는 여전히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새장 속 독수리, 철창 속 호랑이, 돌 위에서 앞만 멍하게 바라보는 곰 식구들. 그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였기에 야생을 그리워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동물원 입구에 서 있던 나뭇잎이 휘날리고 머리 위로 나뭇잎 왕관이 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동물원을 다 돌고 나올 때가 되면 어느새 마음이 편해져 겸손한 내가 오만했던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미흡한 제 글을 뽑아주신 조선일보와 조정권, 문정희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문학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용기를 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이승하 선생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친구 미정, 옥련, 미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제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이 내린 축복 같은 딸 수연과 오랜 시간 묵묵히 견디어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초심으로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1965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학원 논술강사·여성회관 독서논술지도 강사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 곳’ 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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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물푸레 동면기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당선소감>
'힘든 세상, 환한 불빛 아래 서기 두렵지만…'
세상은 이렇듯 힘든데, 환한 불빛 아래 당선소감문 쓰기가 두렵고 송구합니다. 시는 말씀의 집을 규모 있게 짓는 것이라는데, 집을 지을 재료는 풍성한지 있기는 한지 내심 불안하고 난감할 뿐입니다. 추운 겨울날 얼음의 뜰을 얼려두고 서 있던 그 물푸레나무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곧은 나무라 할지라도 겨울엔 햇살 쪽으로 그 몸이 조금 기울어진다고 합니다. 좋은 공부 진정성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가짐을 다짐해봅니다.
가장 추운 바람 속에서도 시적 영감을 나에게 준 물푸레나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때 바위 밑에서 들리던 졸졸 물소리를 씨앗으로 삼겠습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컴퓨터 위에 붙여두고 글을 쓰던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끝이 없음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깁니다. 덜 여문 시를 세상으로 밀어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그리고 맹문재 교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하는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힘들 때 꽃을 보라시던 어머니가 많이 생각납니다. 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남편 태규 씨와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 지혜로운 딸 수란과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아들 준영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여원(필명) : 1957년 진주 출생. 주소:서울 양천구 신정7동. 직업:주부.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여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 (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 장하빈 본심: 도광의`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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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경향 신춘문예 당선시 >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인 외팔이의 과거를
한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 레코드 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잿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
안전성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낯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흘린 피를 지워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 듯 소중해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눈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 당선소감>
멋진 병, 현기증이 나에 대한 믿음 되살려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전부 이해하기 위해 한 인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인간이 되길 바랐다. 한때 내 몸은 그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반항하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영혼이 아니라 그의 죽은 몸을 닮고 있었다. 스무 살의 겨울, 몽마르트 언덕에서 길을 헤매던 중 한 묘지로 들어갔고 처음 본 공동묘지에 그를 내려놓았다. 파리의 지붕들을 뛰어다니던 그에겐 밟고 다닐 무덤들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빈자리가 말을 건넨다.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얼마 전 흑백의, 내 머릿속 사진을 보았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커다랗고 외로운 눈(目)이었다. 그 눈은 대답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질문만을 내게 건네는 듯했다. 아무 문제 없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 이후로 나는 눕거나 일어날 때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 살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깨어나면서 나에 대한 불신들 사이에 나를 믿게 만들 씨앗을 흩날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 “멋진 병”에 걸렸다. 다행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고마움과 건강히 오래 지켜봐주길 바라는 아들의 마음을 전한다. 시 쓰는 길을 열어주시고 큰 관심을 가져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곧’이라는 말로 격려해주신 선후배님께 감사드린다. 시 속에 숨어 있으려는 나를 밖으로 꺼내주신 멘토 권혁웅, 조연호 그리고 금요일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크고 달콤한 힘에 감사한다. 다른 내일을 열어주신 도종환, 박주택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최호빈
■ 1979년 서울 출생 ■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새 봄의 문학’이다. ‘새 봄의 문학’은 혹한과 얼음을 이긴 ‘새싹의 문학’이자 ‘꽃핌의 문학’이다. 이는 오랜 탁마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순간을 견디며,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 끝에 찾아오는 문학이다. 이 점에서, 시를 구성하는 미적 형식과 내용을 직조하는 시선, 제재를 가공하는 세공술, 그리고 이를 각고로 새겨 돋우는 치열한 정신은 ‘새 봄의 문학’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예술적 덕목들이다.
예심에서 올라온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령을 견지하면서도 개성적 시각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낸 것들이었다.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썼는가’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어 미래적이다.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하는 강한 추동력과 낮은 자의 고통을 존재의 장소에서 불러내는 동일자의 윤리를 보여준다. 함께 투고한 시편도 고르게 완성도가 높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후보작 ‘곰탕’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뼛속까지 곰삭은 그리움을 푹 고아내고 나면 눈꽃처럼 퍼지는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와 같이 세계를 긍정한다. 그러나 산문적 사변(思辨)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로켓맨’은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튼튼한 신뢰를 얻고 있지만 대상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좁은 것이 흠이었다. ‘그 자작나무 숲으로’는 참신하기는 하나 주제를 드러내는데 인색했다.
심사위원 : 박주택시인,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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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당선소감>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 속의 우울을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과 눈 맞추게 하는 행위다. 형체 없이 스며 있던 상처와 욕망이 육체를 얻어 활동하게 하는 작업, 나무속에 들어가 가지 따라 솟구치고 햇볕에 몸 비비며 잎으로 팔랑거리게 하는 일이다. 바람의 팔과 햇살의 눈으로 고루 세상과 마주하는 일. 오래 바라보면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세계는 평등하고 풀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한 개의 삶도 눈물겹도록 진지하다.
보송보송 마른 마음으로는 시가 오지 않는다. 무언가 아련하고 아릿한, 나는 그것이 오랜 세월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우울이라는 것을 안다.
눈부신 날개를 팔랑이며 나비가 돌아온 아침이었다. 당선통보의 벅찬 감동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던 내 시력(詩力)에 대한 절망감에도 환하게 해를 비췄다. 살아 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살 것이다. 언제나 최초의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동진 회원님들, 유진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을 붙들고 밤을 새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슬그머니 놓고 나가던, 내 시의 첫 독자이며 평자인 남편 이일상 씨,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해 준 동걸,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 같은 다영이, 행운을 물고 우리 집으로 날아온 나현.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허영둘 /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김종해· 천양희· 김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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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루귀가 피는 곳
최인숙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당선소감>
“많이 보고 듣고…세상을 색다르게 읽어내는 시인 될 터
안개가 짙은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맑은 날인데도 내 안에 무시로 찾아드는 안개의 시간. 이럴 때면 사물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습니다. 그 말들에 귀 기울이고 견디다가 한없이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떤 날은 정말 간절하게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이렇게 쉽게 기쁨으로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이게 사실인가 아닌 가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직까지 자신감 갖지 못한 제 시를 이렇게 훌쩍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불어 경상일보에도 한없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시인이 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여러 분야를 천천히 보고, 듣고, 느끼며 세상을 색다르게 읽어내겠습니다.
문학의 길을 새롭게 열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저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문우들,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힘든 작업임에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아 준 내 가족과 부모님,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최인숙 / 1966년 서울출생 / 가톨릭대 사회사업학과 졸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이질적 형상화로 작가의 시적 내공 고스란히 묻어나
응모작품들을 공들여 읽었다.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번 응모작들도 그런 경향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시인이 지니는 표현 의도는 최적의 언어로 구조화되고 형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함축으로 끌어안을 때 견고하게 정제된 시를 만날 것이다.
<노루귀가 피는 곳>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의 작자는 작은 풀꽃인 ‘노루귀’에서 환기되는 정서를 한방요법의 ‘뜸’으로 풀어내고 있다. ‘뜸’은 약쑥을 비벼서 인체의 혈 위에 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행위이다.
연기를 내면서 쑥이 타들어가고 그 기운이 혈을 자극해서 막힌 기를 소통시킨다. ‘노루귀’의 식물이미지를 한방치료 요법인 ‘뜸’으로 병치시킨 시인의 착상도 새롭지만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어머니의 노고와 ‘뜸’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합일시킨 상상의 능력도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저리(‘노루귀’ ‘뜸’)를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의 작자가 상당한 시적 내공을 쌓은 분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같은 시인의 투고 작품 <무지개>도 선연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분의 역량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최종까지 남았던 작품들은 <우포의 달 외 2편>, <할머니의 기도 외 3편>, <다리가 잘린 소녀에게 외 2편> 등이었다.
이분들도 나름대로 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이다. 정제된 시에 이르는 노력들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를 바란ek.
이건청 / 1942년 경기이천 출생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외
-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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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 당선소감>
지친 나에게 새로운 불꽃이 일어
이런 기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무 떨려서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젊은 문학도의 길을 가로막은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가슴에 시의 씨앗 하나 묻어놓으신 분들,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주저앉은 제 손을 잡아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주택 선생님, 항상 용기를 주시던 이문재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시던 마경덕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들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과 딸 미라, 아들 명훈이와 창훈이, 친지들, 친구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해원 / 본명: 이숙자. 1948년 경북 봉화 출생. 1999년 ‘수필춘추’ 신인상 수상
< 심사평 >
따듯하고 애달픈 시…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 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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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풍경 재봉사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당선소감>
몸속 깊숙한 곳 비어있는 詩의 공간 채워갈 것
유난히 올해는 제 글이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원고를 투고했습니다. 내년에 다시 시작하자, 라는 마음으로 연말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지방에 갔다가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요일, 묵직한 소식을 받았습니다.
많은 인연들이 제 머릿속을 앞서 나가다가 멀어졌습니다. 붙잡지 못한 인연과 아직까지 손 놓지 못한 인연 사이에서 제가 달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켜주신 분들이 있어 제가 한 줄기 빛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성실함의 아버지, 기원의 어머니, 의지의 형, 우리 가족에게 제가 받은 이 빛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제가 시를 계속 쓸 수 있도록 언제나 힘을 실어주신 이사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신 김미도 선생님, 항상 따뜻하게 저의 일을 챙겨주신 신연우 선생님, 시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신 최서림 선생님, 삶의 큰 틀을 보게 해주신 박정규 선생님, 제 고민을 많이 들어주셨던 박영준 선생님, 우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께 무한한 빚을 졌습니다. 이번 당선 소식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친구, 이병일에게 감사합니다. 그와 함께 꿈꿨던 일이 훗날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첫 만남 이후, 핸드폰에 행운의 여신으로 저장되어 있는 그녀. 곁에 머물러 버거울 정도의 행운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몸속에 깊숙하게 비어 있는 시의 공간과 시간을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김민철이 되겠습니다.
▲ 1981년 서울 출생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유행·시류 벗어난 우아한 아름다움 돋보여
예심을 거친 20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이해존의 ‘안락한 변화’, 유정용의 ‘IN 1914 네루다’, 안대근의 ‘샌드위치 인생’, 김민철의 ‘풍경 재봉사’ 등 4편이었다.
‘안락한 변화’와 ‘IN 1914 네루다’는 사실성이 두드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되었다.
정말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
‘샌드위치 인생’은 ‘벽돌의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의 등은 벽돌보다 벌겋지’라는 첫 행에서부터 개성적 면모가 두드러졌으나 결국 희망이 상실된 어두운 심상으로 시가 종결되고 말았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하는 능력이 약했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므로 시 전체를 관류할 수 있는 제목이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같은 시를 제목만 바꾸어 중복 투고해 성실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풍경 재봉사’는 신선하고 아름답다.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섬세하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시가 근래 들어 잃고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 앞으로 이 시인의 큰 덕목이 될 것이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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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당선소감>
뛸 듯이 기쁩니다. 무변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것만도 같이 기쁩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야 벗어버리는 듯한 홀가분한 이 기분 생에 최곱니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줍니다. 무량으로 기쁩니다.
뼛속까지 다 비워버리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시조새의 날갯짓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좀체 떠날 수 없었던 슬픔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깨지고 부서지고 여과 없이 떠나갑니다. 화석으로 옹이 박혀 점점 더 깊이 화인 자국을 남기고 결집해 있던 시의 응어리들이 가차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십수 년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곪을 대로 곪은 상처투성이,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신춘폐인으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과 마음으로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힘을 주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 즉 위대한 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같습니다. 제게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으니까요.
이제 시의 꽃을 피우는 봄이 왔습니다. 마음껏 시의 밭을 누비며 황량했던 마음을 갈고닦으며 경작해 보이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전날 밤 꿈속에서 본 영롱한 빛깔의 시 무지개를 하늘에 걸겠습니다. 한림대 김은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태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식구들 감사합니다. k.k.k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끝으로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첫눈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공손히 받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1955년 강원 춘천 출생 ◇제7회 김유정문학공모 대상 ◇신사임당문예 수상 ◇강원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3회.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 김언희
첫댓글 깊은 겨울밤에 시밭에서 머물다 갑니다~~
신선생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