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헌강왕과
처용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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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천, 박천익)
천년왕국 신라는 어떻게 망했으며,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해서 실록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읽고 있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면서 국운이 쇠퇴하고 왕들의 처신 또한 해이해져 갔다.
특히 51대 진성여왕 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말기적 현상이 심하다.
49대 헌강왕은 그 가운데서도 명민하고, 글일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찬 위홍을 상대등 (신라 최고관직 수상격), 대아찬 예겸을 시중 (상대등 다음자리 부수상 정도)에 임명하여 조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당시도 국제정치의 중심이던 당나라의 혼미(황소의 난)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헌강왕의 처세는 무난했다. 천재지변이 없었고, 흉년도 없었다.
그 덕분에 국민들은 오랫만에 태평성대를 누렸다. 헌강왕은 음악과 사냥을 즐겼다.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잇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다. 해마다 풍년이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여 신하들은 가사를 짓고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제 49 대 헌강대왕 시대에는 경주 수도에서 부터 동해까지 초가집이 한 채도 없었고 모두 기와집이었으며, 길거리에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참으로 신라의 태평성대가 지금 생각해도 부러울 정도이다. 필자는 경주를 좋아해서 자주 들리며, 그 곳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태고의 향취가 몸속 깊숙히 스며들어 인생의 심연을 찾는 기분이다.
신라의 이야기 가운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 처용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오늘은 처용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삼국유사>는 헌강왕 시절 처용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용이 동해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처용은 지방 호족의 자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 역병귀신조차 밤마다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를 취했다. 하루는 처용이 밤늦게 놀다 집에 들어와 보니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처용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났다. 처용가로 불리는
이 노래는 이렇다.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고, 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긴걸 어쩌리.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역병 귀신이 깜짝 놀라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무릎 꿇고 말했다. "내 당신의 아내를 탐내어 지금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이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기까지 하오.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 그림만 봐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소."
처용 이야기의 앞뒤에 헌강왕이 등장한다. 헌강왕은 지금의 울산 지역인 개운포를 순행하고 있었는데, 처용이 그곳에서 살았다. 처용의 부인이 천하미인으로 소문났기에 헌강왕이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실록은 밝히고 있다.
당시 신라왕은 누구의 부인이든 취할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처용가는 말미에 한탄조로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라고 말미를 적고 있다. 아내의 상대는 역병귀신이 아닌 헌강왕이 었을 것으로 실록은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