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의 빈곤과 고통을 그려낸 영원한 베르나르 뷔페 "
김 종근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1999년 10월 5일 파리의 피가로, 르 몽드,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매스컴들은 한 화가의
비통한 죽음을 알렸다.
‘베르나르 뷔페의 자살‘.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놀라움을 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 이미 50년 전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그는 천부적인 재능
과 독창적인 표현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전설적인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누구인가? 1928년 베르나르 뷔페는 파리의 말제르브시에서 태어났다.
궁핍하고 다정하지 않았던 아버지, 가난으로 늘 근심과 걱정에 싸여 있던 어머니. 그 가운데서 어린 날의 뷔페는
슬픔과 가난으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1살에 카르노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박물학 식물학에만 겨우 관심을 가진 사춘기 철부지이었다.
1943년 15살, 나치하의 파리에서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파리시의 야간 고등학교에서 데생 수업을 받고 파리
의 에꼴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런 화가의 꿈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좌절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17살 되던 해 다행히 그는 학교 친구 로베르 망티엔느의 소개로 시골집에서 머물면서 유화 작업을 시작했
고 이미 ‘십자가의 강하’와 ‘로베르의 초상’ 등에서 그는 타고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여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닷가재>는 바로 뷔페의 이런 초기 작품이며 <채소 정물화>와 <다리미> 같은 작
품을 보면 초창기 작품부터 얼마나 그가 그만의 특성을 보인 독특한 재능을 가진 작가였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1946년 18살에는 파리의 보자르 화랑에서 열린 ‘30세 미만의 살롱전’에 <자화상>을 출품하면서 화가로서 두각
을 나타내는데, 이미 야수파의 경향과 수직 수평선의 교차로 간결한 구성과 구도로 그에게 펼쳐질 세계를 예측케
했다.
19살 그는 피에르 데카르그의 발굴과 추천으로 파리의 대학가이자 라틴식당들이 모여있는 캬티에 라탱의 작은 서
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마치 피카소가 19살에 첫 개인전을 가진 것처럼.
뷔페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전투적인 모습으로 재능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는 단 한 번의 전시로 파리화단의 주목을 온몸으로 받기 시작했고, 도저히 19살의 어린 청년의 작업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풍에서 독특함과 독창성은 사람들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일약 파리화단은 천재 화가의 탄생으
로 흥분했다.
그 전시회에서 파리의 국립미술관을 위해 레이몽 코니아가 ‘ 어린 닭이 있는 정물’을 살 정도로 화가로서 능력을
평가받았다.
삐쩍 마르고 거치른 성격을 가진 뷔페를 신문기자 들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쓴 당대의 뛰어난 천재 시인 랭보
에 비유하였고,
‘난 잔인함이 주는 쾌락을 묘사하는데 내 재주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 ‘말도르로의 노래’의 시인 로트레아몽과
비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뷔페에게 쏟아진 영광은 프랑스의 기라성 같은 비평가들이 작가에게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비평가>상을
수여하면서 최고의 절정에 다다랐다.
그의 나이 고작 20살이었다.
1953년 피카소가 레닌의 초상화를 그려 화제가 된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eres Francaises)’의 지성 루이
아라공은 드루앙 다비드 화랑의 풍경전과 비스콩티 화랑의 데생 전 이 두 전시회를 보고 ‘풍경화는 4세기부터 존
재해 왔으며 베르나르 뷔페는 겨우 24살‘이라고 지적하며 그의 타고난 비범함을 극찬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미술컬렉터인 쟝 지오노는 ‘순수의 탐구’저자를 위해 뷔페가 그린 그림을 보면 “그 안에서
날고 싶다는 욕망을 100번이나 더 느낀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잔인한 정도로 날카로운 선을 가진 화가라고 일컫는 그의 선묘법, 후벼내는 듯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선으로 그
의 명성은 순식간에 유럽의 화랑가에서 최고의 인기작가로 급 부상했다.
1955년 이탈리아의 로마와 밀라노, 스위스의 바젤, 영국의 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미국 등에서도 그의 명성
은 자자했다.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
그해 프랑스의 전통적인 미술잡지‘ 꼬네상스 데쟈르’는 전후의 화가 10인중 1위에 선정될 정도로 그의 인기는 폭
풍적이었고 뷔페의 열풍이 불었다.
이듬해 28살에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와 함께 대표작가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실상부
한 국제적인 작가로 그 유명도를 전 세계에 떨쳤다.
이전부터 그의 화풍은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그는 특별히 어떤 한 장르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는
꽃도 많이 그렸고, 풍경도, 인물도 정물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기법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며 지칠
줄 모르고 열정적이었다.
우리가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100여 점의 많은 작품이 모두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위대함을 그대로 당시로
되돌아가 증명해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놀랄 만큼 간결하고 날카로운 선, 긴장감 있는 힘 있는 선들을 바탕으로 한 구성으로 그는 불안과 격
분 공포에 대한 거부의 세계를 강렬하게 토해내는 훌륭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전쟁과 세계 대전에 민
감 해했고 격분하였다.
어린 나이인 뷔페의 1955년 개인전에서 그는 ‘전쟁의 공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할 정도로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화폭에서 고발했다.
그 모두가 뷔페가 가진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의 발로였다.
이 작품들은 발표할 때마다 우화적이면서 참혹한 인상을 준 작품들로 인하여 관람객들에게 전율과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의 손이 닿으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도 황폐한 들판의 풍경으로 격동한 듯 힘 있는 경치로 변화했으며, 수직
선이 빚어내는 강렬한 선의 힘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을 경탄하게 하는 서사적 감동과 울림과 여운을 주었다.
1958년 그는 미모의 여인 아나벨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 이후 뷔페의 가장 오랜 여자 모델로 그의 화면에 빠짐
없이 영원한 뮤즈의 여신으로 등장했다.
전시에 출품되는 1960년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나벨 >과 <칸느 영화제의 아나벨>의 아름답고 우아한 인물이
바로 그의 부인에 초상이다.
1961년에는 다비드 에 가르니에 화랑에서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만으로 ‘아나벨의 초상화’ 전을 가질 정도로 그의
아내를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아나벨 역시 마찬가지로 뷔페를 향하여 ‘그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며, 그를 열정 있는
사람, 위대한 화가 기상천외한 화가”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특별했다. 그가 여행한 곳이나 관심이 있는 부분은 시리즈로 제작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는 베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듯 그의 작업은 한 주제를 정하게 되면 곧이어 작업
에 몰두하고 전시를 하는 등 테마작업을 즐겨 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 풍경이나 <록펠러 센터>, <이태리 밀라노 성당>, <아말피 대
성당>에서 처럼 그러한 기행적인 명소의 풍경을 뷔페는 가감 없이 그의 필치로 묘사했다.
투우사나 서커스 풍경 등도 그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 ’ (1952년) 을 시작으로 ‘런던의 전망 (1961)’ ‘베니스’(1963) , ‘가죽벗긴 짐승’(1965) ‘바
다’(1965) ‘옷을 벗은 여인들’ (1966) 투우사전 (1967년) 나의 서커스 (1968) 프랑스의 교회 (1969) 루아르강
의 성(1970) 미친 여자들전 (1970) 배(1973) 풍경 (1974) 단테의 신곡(1976) 꽃 (1979) 나체전 (1980)일본전
(1980) 자화상 (1982) 자동차전 (1985)같은 해 뷔페 자동차 100년전, 네덜란드전 (1986) 돈키호테 (1989) 해
저 2만리 (1990)뉴욕 풍경전 (1991)등 후기 작업까지 그는 이외에도 동물이나 새 등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발표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그는 인간의 근원적 형상과 원형을 보여주는 듯한 고릴라 시리즈와 원숭이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의 제작에서는 대단히 집요함으로 작가의 정신을 지켜왔고 치열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 그는 사실 19세
기의 프랑스의 사실주의의 후계자가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했다.
다비드와 제리코, 쿠르베를 숭배했던 뷔페는 인본주의와 원시주의를 가진 장엄한 분위기를 가진 엄격성을 회화
속에서 구현하고 싶어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회화를 비롯하여 입체 그리고 판화 등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21점의 드라이 포인트로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카뮈의 이방인, 장 꼭 토, 보
들레르 등의 판화와 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롤랑 쁘띠 발레단의‘방’과 프랑스와즈 사강의 ‘어설픈 만남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하기도 할
정도로 그의 재능은 폭넓게 끝이 없었다.
그만큼 뷔페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 인기작가로 영예를 누렸다.
뷔페는 매우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손재주가 있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작가가 무엇
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모두 영감이 아니고 손의 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71살인 1999년 <
죽음>이라는 100호가 훨씬 넘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이전에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 <브로타뉴의 폭풍>이라는 작품과 <복장 도착 해골>이란 작품을 완
성했다. 마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는 프랑스 투르 자택에서 비닐봉지를 얼굴에 덮어쓴 채 질식해서 자살했
다,
평소에 그는 말이 적고 극도의 단절 상태에 있었으며,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으며 ‘삶에 지쳤다’라는 말로 이미 자
살을 예고하고 있었다.
1971년 43살 그는 퐁피두 대통령이 주는 슈발리에 들라 레지옹 드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
그러나 정작 당시에는 프랑스 현대미술의 보고이자 산실인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딴 퐁피두 센터는 단 한 점도
그의 그림을 사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었고 중요한 전시 때도 그는 그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공식적으
로는 대접받지 못했다.
그러나 문화예술 프로그램인 ARTE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베르나르 뷔페의 특집을 기획했고 이 특별기획은 베르나
르 뷔페의 70년에 이르는 예술과 인생을 모두 방영했다,
여기서 베르나르 뷔페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준비하고 있는 300호를 능가하는 대작들로 가득한 그의 아틀
리에서 작업중인 작품들을 소개했다.
이번 전시처럼 당연히 그가 특징적으로 자신의 화풍을 구축해 가는 모든 과정을 다 볼 수 있는 정물에서 시작하여
풍경, 인물. 서커스 동물 물고기 그리고 아나벨의 초상, 모든 도시의 풍경, 명소, 자동차 ,자화상, 오딧세이 시리
즈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작품까지 모든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베르나르 뷔페는 침묵했지만, 거기서 부인 아나벨 뷔페는 이렇게 국제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전람회에조차 미술평
론가들은 그림조차도 보러 오지도 않는다고 평론가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평론가들이 아무리 뷔페를 낮게 폄하
해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사람이 뷔페의 작품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서
항변했다.
그 자신 역시 ‘비평가들의 욕지거리가 나의 붓을 꺾을 수 없고 이런 우직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라고 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언제나 억대 이상의 비싼 값에 거래가 되고 그의 그림은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현금과
같은 작가이며 일본에 개인 미술관이 있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이고 알려진 작가이다
뷔페는 매우 부지런한 작가이며 화단의 귀재였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는 사실 많은 작가가 부러
워할 정도로 그의 전람회는 해마다 이어졌고 그때마다 그의 전시는 성황을 이루었다.
물론 화사한 색채와 고민 없는 꽃, 풍경과 건물들 광고처럼 보이는 자동차 그림 등이 등장하여 전형적인 매너리즘
에 빠진 양식화된 작품을 낳게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무거운 인간의 비극적인 세계를 죽기 전까지 온 정열을 다하여 악착같이 인간에 관한 고민을 진지하게 성찰한 그
림들은 아직 뷔페 이후에 없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8천여 점이라는 작품을 남긴 채 가고 없다, 마크 로스코처럼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총리가 ‘전후의 빈곤과 고통을 예리하게 그려낸 작가’로 쟈크 시락 대통령이 ‘그의 붓놀림과 채색은 우
리 마음속에 영원하다’라며 거장의 죽음을 애도했던 프랑스 현대 예술의 교주로 불렸던 뷔페.
그런 그의 작품을 초기작에서부터 마지막 자살하기 전까지의 일대기를 한 번에 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뷔페가 우리
에게 남겨진 가장 소중한 추억이자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쟈크 시락 대통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한 작가라고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이제는 <베르나르 뷔페>의 예술세계
를 우리가 가슴속 마음에 영원히 담아둘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