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반병의 그 사내(3)
(부산의 동래 온천장에는 유명한 온천인 허심청이 있다)
虛心廳(허심청)---마음을 비운다
11.
입동이 지나자 날씨가 많이 차졌다.
가게 앞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흩날리기 시작했고
금정산에도 단풍이 점점이 물들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또 오늘 같을 날들의 연속이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주방도 언자 대충 정리하제......."
경주댁이 이맘때면 늘 하는 시마이 준비를 말했다.
홀 손님도 거의 나가고 두어 팀이 남았을 뿐이다.
그 때 출입문을 열고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어서 오이.....소"
주방에서 옥이엄마가 습관처럼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사내였다.
여전히 혼자인 그는 늘 앉던 그 자리에 가 앉았다.
물 컵과 비닐에 든 1회용 수건을 탁자에 놓으며 마산댁이 물었다.
"뭐 드실랍니껴?"
"순대국밥.......소주 한 병 하고요."
긴가민가하던 옥이엄마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게 몇 년 만인가. 그는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을까.
어쩌면 저렇게 하나도 안 변할 수가 있담.
주방 음식 내는 창구가 작아 밖에서는 주방 안 사람이 잘 안 보인다.
"4번에 순대 하나....들었제?"
마산댁은 건성으로 말하곤 반찬과 밥 그리고 소주와 잔을 챙긴다.
옥이엄마는 순대와 돼지고기를 좀 많이 넣은 순댓국을 내밀었다.
마산댁이 웬일이냐 듯 순댓국과 옥이엄마를 번갈아본다.
옥이엄마는 못 본 척 딴전을 피웠다.
막 시작한 9시뉴스를 보고 있던 그 사내는 식사가 나오자
먼저 소주부터 한 잔 따라서 반쯤 마셨다.
예전의 그는 밥을 반쯤 먹고 술을 따랐는데 그게 달라진 거라고 할까.
주방 일을 하면서도 옥이엄마는 옆모습만 보이는
그 사내를 몇 번이나 훔쳐봤다.
사내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가끔 눈으로는 경제침체가 어쩌고 하는 TV뉴스를 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눈이 몇 년 전 보다 좀 더 깊어진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소주 반병을 남긴 사내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카운터로 가서 식대를 치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12.
"가만......아무래도 면이 익었는데.....생각이 안 나네."
경주댁이 계산대에서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데요?"
빈 그릇을 치우다가 사내가 남긴 소주를 한잔 마신 마산댁이 대꾸했다.
"방금 그 사람.......누구였더라."
"글씨......그라고 보이 나도 어디서 본 사람 같았는데요."
"옥이야, 니는 생각 안나나?"
".......몰라예...."
옥이엄마는 짐짓 모른 체했다.
"그건 그렇고, 그래.......옥이는 언자 그 일 좀 배웠다더나?"
"야......."
"그 골프장 캐딘가 하는 일이 금새 그리 배워지는가요, 어디."
마산댁이 또 아는 체 나섰다.
"아따, 뭐 그기 그리 어렵겠노. 게다가 옥이 갸가 보통내긴가 어디.
뭘 해도 잘 할거구만."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옥이엄마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좀 있는 옥이가 걱정이었다.
그런 건 왜 죽은 지 아빌 닮나 싶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벌당이 어쩌고 하던데 그런 거 안 당하고 잘 했으면 싶었다.
"그.....국이나 한 그릇 가져가서 내일 아침에 멕여보내라모."
"아침밥을 쬐끔 밖에 안 먹는데....."
"그래가 되나. 밥심으로 하는 노동인데, 그것도."
며느리가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는 마산댁이 모처럼 맞장구를 쳐준다.
내일 장사를 위해서 밤새 약한 불에 우려야할 국솥에 불 조절을 하고
찬바람 이는 거리로 나선 옥이엄마의 볼은 아직도 발그레 했다.
도대체 몇 년 만일까……손가락으로 꼽아보니 4년만이었다.
옥이엄마는 그 때 못 준 장갑을 어디 넣어두었더라 하는 생각을 하다가
131번 버스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13.
점심 손님들이 거의 떨어졌을 무렵, 카운터에 앉았던 경주댁이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맞다......언자 생각났다.....그 사람이네."
"누가요?"
"어제 저녁에 왔던 그 사람......소주 반병 남기고 간 사람 말이다."
"아, 느지막이 혼자 왔던 그 사람....."
"생각나제? 예전에......와 옥이엄말 좋아했던....."
"그기 아이고........옥이엄마가 그 사람 좋아했던 거 아잉교?"
"우쨌던.....갑자기 발걸음 뚝 끊겼던 그 사람 맞제?"
"그라고 보이 맞네요....그 사람."
"골푸연습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저리 높은 아파트 들어섰으니.....
그기 몇 년 만이고......"
경주댁과 마산댁이 한참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근처 사무실에 배달했던 음식 그릇을 챙겨오는 옥이엄마가 들어왔다.
오늘 주방 담당은 마산댁이었다.
장사가 예전 같지 않아 주방 주모를 내보내고 번갈아 맡는다.
"옥이야.....봐라 봐라. 어제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 맞제?"
"야아?.......누가요?"
"아따, 시치미 떼긴, 국그릇에 웬 고기가 그리 많나 싶었더만."
"............."
"와 그 때......골프연습장에서 차사고 나고, 그거 챙겨준 그 사람?"
"몰라예........"
"모르긴........근데 와 아는 체 안 했노?"
마산댁은 끈질기게 채근을 했다.
"하이고 우짠다꼬 그리 발걸음을 뚝 끊었는지 이담에 또 오면
내 함 물아봐야것다."
경주댁이 눈을 깜빡이며 말하자 옥이엄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젯밤에 집에 들어서자 말자 서랍을 뒤져서 그 장갑을 찾았다.
아직 장갑을 낄 정도는 아니지 싶어서 그냥 넣어두었지만
몇 년이나 지난 걸 선물이라고 내밀어도 될까.
차라리 여자용이었으면 옥이에게라도 줬을 텐데 싶었다.
옥이는 지난달에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근무를 한 지 보름 남짓이다.
입으론 할 만하다지만 세상에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일이 어디 있던가.
옥이엄마가 좀체 안 하던 화장까지 엷게 하고 나왔건만
기다리던 그 사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기야 예전에도 며칠에 한번 씩 왔었지.
그런 행동 습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짱하게 나타나다니.
옥이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4.
계절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외려 손님이 더 많은데 오늘은 이상하게 손님이 뜸했다.
그 사내가 지정석처럼 앉던 주방 앞 4번 탁자를 행주로 한 번 더
깨끗이 훔치며 옥이엄마는 자꾸만 출입문으로 눈길이 갔다.
'오늘도 안 오시려나........'
그가 몇 년 만에 한번 다녀간 지 닷새나 지났다.
마산댁이 소개한 영도 조선소에 다닌다는 마산댁의 먼 일가붙이를
마다하고 옥이와 둘이서 산 보람이 있을까.
맞선 삼아 저녁이라도 한번 같이 먹어달라는 걸 이 핑계 저 구실로
피하고 있던 중에 그예 그 일이 터졌다.
조선소 작업장에서 사고가 나고 그 사람이 크게 다쳤다는 말이 들렸다.
목숨은 건졌으나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
보상금을 좀 받겠지만 앞으로가 예삿일이 아니라고 했다.
옥이엄마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덜컥했다.
남자 복이 이렇게 없다니…….
자기와 연관만 되면 죽고 다치고 하니 이게 무슨 팔자일까 싶었다.
오순도순 사는 소박한 행복을 바라는 게 어째서 이다지 어려울까.
자기와 인연을 맺으려했기에 그렇게 됐지 싶어 오싹한 느낌까지 들었다.
"남자 둘은 잡아먹어야 될 팔자구만.......한사람은 크게 다치겠고......
그래도 그 사람이 인연이야." 철학관의 그 사람은 단정하듯 말했다.
옥이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목이 움츠려들면서 주눅이 들었다.
벌써 두 명인데 또 한 명이 불행해져야 한다니........울고 싶어졌었다.
싫다는데도 철학관엘 자꾸 같이 가보자고 한 마산댁이 원망스러웠다.
"불경기라더니 언자는 순대국밥도 못 사먹을 처지들일꼬......."
"진짜라예......대통령이 바뀌면 좀 나을까 했더니....쯧쯧......"
"꼭 대통령 탓만은 아이라며........미국도 흔들거린다 안 카더나."
"그라고 보이 왜넘들이나 떼넘들이 제일 실속이 있는 기라."
"아까 그치들 보라모……내참."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둘이 먹고 가던 사람들?"
"하모.......국물 좀 더 주소, 밥도 좀 더 주소...해쌓던....."
"적선 하듯이 베푸입시더......절에 시주하는 셈치고."
경주댁과 마산댁이 홀에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길 하고
주방에서는 옥이엄마는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친척 남자가 다치고 나서 마산댁은 표 나게 쌀쌀해졌다.
그래도 옥이엄마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15.
온천장역에서 출발하는 T골프장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옥이를 두고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던 옥이엄마는 딸을 뒤돌아봤다.
줄선 사람 하나같이 얼굴을 산업도로 쪽으로 돌리고 있다.
무슨 부끄러운 일을 하러가는 것도 아닌데 왜들 저러지 싶었다.
수습 딱지를 떼고 첫 근무를 하고 온 딸아인 살갑게 말했다.
"엄마, 내가 이제 열심히 일해서 엄마 여행도 보내줄게요."
선배 언니가 자기 부모를 일본여행 보내주더라고
건실하게 사는 그 언니를 닮고 싶다는 신통한 생각을 했다.
"난, 니가 번 돈을 그리 못쓴다. 차곡차곡 적금 부어서
니 시집가는데 보태야지……여행은 무슨……나 혼자서."
"난 시집 안가. 엄마랑 살 거야."
"아서라.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 애 낳고 가정을 꾸려야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는 거야."
넌 나 같은 팔자만 아니면 돼. 제발 그래야 되고말고........
그나마 두 번째 남편의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일까 싶었다.
전철 한 구역이지만 비교적 짧은 거리라서 걸어가기로 했다.
온천장역 3번 출구를 지나던 옥이엄마의 걸음이 멈칫 멈췄다.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에서 오는 길일까.
"어?........저기요."
눈을 내리깔고 길옆으로 걷는 옥이엄마를 향해 전철역을 나온
그 사람이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보곤 말을 걸었다.
옥이엄마는 며칠 째 하던 엷은 화장을 못하고 나온 게 후회스러웠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그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노란 은행잎이 나비처럼 바람에 날리던 11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4)편으로 계속.......
첫댓글 알쏭~달쏭하네, 흐름은 다변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