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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야마구치10 - 메이지유신을 이룩해 토사구팽당한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다!
사람이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풀숲에서 자고 진흙탕에서 뒹구는등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목숨 바쳐
싸워서 마침내 성공했을 때는 그에 따른 합당한 보답 이 있어야 하는게 우리 상식이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 에서는 수십년간 풍찬노숙한 사무라이들이 토사구팽 을 당하니.... 이는 유럽과
같은 열강이 되려고 근대화를 지향한 신정부에서 사무라이들은 개화에 걸림돌 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603년에 수립된 일본의 통일 정부인 에도 도쿠가와 막부 가 성립하게 된 과정 부터 살펴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일본의 운명을 걸고 교토 동쪽 에서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서군의 대장으로 추대된 히로시마등 6개국의 영주 모리 씨는 야심이
없었던 까닭에 소극적으로 오사카성에 머물고 부하들만 전쟁터에 보낸지라 도쿠가와 에게 패합니다.
전투 후에 위기에 봉착했으나 일족 중에 깃카와 씨가 동군에 내응했던지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구명해준 덕분에 6국 중에 4국을 빼앗기고 스오와 나가토 2국만 유지해 히로시마에서 하기로
쫃겨온 모리씨의 조슈번 과 또 규슈를 통일했다가 토해낸 사쓰마번 은 절치부심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250여년 세월이 흐르고 1854년 1월에 에도만의 요코하마에 7척의 함선 을 이끌고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 의 압력에 수도인 에도(도쿄) 가 바다에 접한 항구 인지라..... 함포사격
으로 불바다 가 될 것을 염려한 도쿠가와 막부의 다이로 인 아베 마사히로는 굴복합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때 조선도 수도가 인천 이었다면 개항을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도 막부 는 개국 을 결정하고 가나가와에서 미국 과 화친조약 을 맺으니 ① 하코다테,
시모다항의 개항 ② 미국 선박에 식량, 연료, 식수 공급 ③ 최혜국 대우 였습니다.
1858년 7월 새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井伊直弼) 는 양이론(攘夷論) 을 주장했던 대다수의
다이묘와 텐노(천황) 의 의견을 무시한채 독단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 을 체결하게 됩니다.
미일 수호통상조약 의 내용을 살펴 보자면..... ① 요코하마, 나가사키, 니이카타, 효고 의 개항
② 재류 외국인에게 치외법권과 관세 자주권의 방기 인정등 불평등 조약 이었습니다.
그런데 1603년 에도 막부 성립후 막부는 전혀 눈치를 보지 않고 국가를 운영해 왔던지라 허수아비
로 여겼던 일왕이 조약을 반대하자... 난감해진 막부가 독단으로 체결했으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는 양이론 을 펼치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체포하기 시작해서
다음해 까지 100여명의 인사를 대량 숙청하니 이른바 안세이 대옥 (安政の大獄)
으로..... 교토 에서는 마나베 아키카쓰 가 숙청의 총대를 멨는데, 이에 조슈번
(야마구치현) 존왕양이론자 요시다 쇼인 은 막부를 뒤집어 엎는 거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안세이대옥 중에 막부가 에도(도쿄) 에서 우메다 운빙 을 체포하니 요시다 쇼인 이
3년 전에 후쿠이현의 오바마번을 방문해서 운빙을 만난게 드러나는데....
이에 막부가 참고인으로 요시다 쇼인을 소환 하자 그는 난데없이 막부를 타도할
준비를 했다는 진술을 하고 처형되니 일부러 죽어 "유신의 불쏘시개" 가 된 것이지요?
마치 두꺼비 가 새끼 를 낳을 무렵이 되면 일부러 능구렁이 를 도발해서는
스스로 죽어 구렁이 배속에서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구렁이
살을 파먹고 성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네요? 이런 장면은 내가 어려서
농촌에서 살 때 집 마당 구석에서 실제로 본 광경 이라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박수진 시인은 “두꺼비와 구렁이” 라는 시(詩) 를 썼습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라 부르는 본래는 어머니날
아이들 불러 앉히고 두꺼비 얘길 들려준다
옛날에 한 엄마 두꺼비가 있어
새끼를 낳을 때
자기를 먹어줄 구렁이를 찾아갔단다
생각 깊은 구렁이 냉큼 먹어주지 않자
앞길을 막고 뺨을 때리며 약을 올렸지
제 몸 죽이지 않고는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붉은 구렁이 아가리 속에
몸을 던지는 거란다
엄마 두꺼비는 죽고
그 독 때문에 구렁이도 죽고
주검 속에서 아기 두꺼비가 나와
생명을 이어간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 두꺼비 처럼
목숨 걸고 자식 낳아 길렀으리니
아, 성스럽고 가엾은
엄마 두꺼비와 구렁이와
그 사이에 우리 태어나
이렇게 이렇게 살고 있구나
1860년 3월 3일 에도(도쿄)의 사쿠라다문 桜田門(앵전문) 앞에서 미토번 무사들 이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다이로 인 히코네번 번주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 합니다.
고메이왕(천황) 이 양이론 을 펼치자 존왕양이(尊王攘夷)론 을 주창하는 다이묘 들이
교토에 모여들기 시작하니.... 죠슈번(36만석) 과 사쓰마번(77만석) 이었습니다.
도쿠가와씨가 세력을 잡기 이전에 모리 데루모토의 죠슈번은 120만석~ 200만석 이고
시마즈 요시히사의 사쓰마번은 250만석 이었으니 도쿠가와에게 뺏긴 상실감 이 컸었지요?
1862년12월 존왕양이파를 제압 하기 위해 에도 막부는 아이즈 (会津 후쿠시마 서부)
번의 번주이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를 교토 수호직 에 임명 합니다.
마쓰다이라씨 는 쇼군 이에야스가 원래 쓰던 성씨로 자신의 직계는 성씨를
도쿠가와씨로 바꾸었지만... 나머지 친척들은 계속해서 마쓰다이라씨를 쓰게 했습니다.
이 무렵 조슈번(야마구치) 에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7대 조부 가 번의 장래 를 위해
모은 특별 회계 인 무육금 (撫育金) 이라고 수백만냥에 달하는 저축 이 있었습니다.
이동이 쉬운 기마민족 같은 예외는 있지만, 예로 부터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 이니!
이 돈은 번주도 손을 못댔다는데.... 약관 20대의 신사쿠 는 1862년 7월 상해
견학시 충격으로 2만냥 증기선 을 독단으로 구입 하고 3만 6천냥짜리 배를 계약 합니다.
조슈번 요시다 쇼인의 제자 인 다카스키 신사쿠 는 160석 오오구미시 大組士
( 대조사로 조슈번에는 1,200개의 가문 이 있었음 ) 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조부는 명륜관 을 창설하고 바다를 매립해 제지 및 도자기업 으로 번의 재정 을 확충했는데
손자인 다카스키 신사쿠 는 조슈번 존왕양이론자 요시다 쇼인의 4대 제자 에 속합니다.
1862년 에도에서 귀환중이던 사쓰마 다이묘 시마즈 히사미쓰 의 행렬에 난입한 말탄 영국인
을 살해한 탓에 1863년 8월 영국 함대는 규슈 가고시마를 포격 합니다. 이에 사쓰마번은
서양의 우수성 을 깨닫고 막부와 일왕(천황) 에 웅번이 힘을 합쳐 개국과 개혁 을 하려합니다.
반면에 1863년 8월 양이를 주장하는 조슈번 은 교토에서 추방 당했지만 계속 암약하니
1864년 7월 8일 막부의 신센구미는 이케다야 를 습격해 조슈파를 살해 하자...
이에 조슈번은 후쿠하라 에치고 를 총대장으로 3,000여명의 병력이 교토로 진격 합니다.
아이즈번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를 척결하고 일왕(천황)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이고 다카모리 가 지휘하는 사쓰만번 병력이 도착하니...
전세는 역전돼 중과부적인 조슈군이 몰살 되는데 바로 “금문의변 (禁門の変)” 입니다!
일왕(천황)은 금문의 변 당시 조슈번이 궁궐 대문을 향해 대포를 발사한 책임을 묻는다며
조슈번 토벌령 을 내리니 막부는 35개 번에서 15만 대군을 동원하니 조슈번은
항복하고 존왕양이파를 숙청 하자..... 그해 12월 다카스기 신사쿠가 반란 을 일으킵니다.
신사쿠와 기도 다카요시등 존왕양이파 들이 실권을 잡고 막부에 반기를 들자.... 막부는 다시
10만 대군을 동원해 2차 조슈정벌 전쟁 을 일으키니 조슈번은 사카모토 료마 의 중재로
원수지간 사쓰마(가고시마)와 삿초동맹 을 맺은후 사쓰마번의 이름을 빌려 무기를 구입 합니다.
1865년 7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는 나가사키에서 무기 중개상 글로버 를 만나 소총
7천정( 후장총인 신식 미니에총 4천정 포함 ) 과 군함 을 구입하는데 당시 막부군의
소총인 게벨총은 전장총 구식 으로... 미니에 후장총 은 전장총 10정의 위력 이 있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의 막부군은 사쓰마가 하기 공격을 거부해 4방면으로만 진격해
오자 조슈번의 4천 병사들은 결사항전하는데... 다카스기 신사쿠와 사카모토 료마 는
1, 2함대로 포격지원 을 하는 가운데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천명의 조슈군 을 이끌고
북규슈 고쿠라성 에 집결해서 간몬해협을 건너려는 막부군(규슈군) 2만명을 공격 합니다!
고쿠라성이 조슈군의 공격으로 고전 하던 1866년 7월 20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서거 하고
고쿠라성이 함락 되니 전의를 상실한 막부가 휴전을 제의하자,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교토에
진출해 이와쿠라 토모미와 함께 어린 메이지왕(천황) 을 끼고 왕정복고 막부 토벌을 준비 합니다.
사카모토 료마 는 내란을 막기위해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 에게 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
을 돌려줄 것을 권고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가 거부하면 공격의
구실로 삼으려 했으나 1867년 10월 막부 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대정봉환 을 시행합니다.
막부가 260년간 행사해온 통치권을 조정(천황)에 돌려주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니
조슈번과 통치권을 잃은 에도 막부 양 세력에게 미움을 산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는 결국 교토 오미야 여관에서 신센구미 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살해 당하니 33세라!
이때의 일은 일본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2010) 과 야에의 벚꽃(2013) 에 그려지는데....
사쓰마 번주 히사미쓰 는 막부 타도를 결심 하고는 조슈번에 뜻을 전하니 조슈번은
군사 전략가인 오무라 마스지로 가 서구식 군사훈련 으로 조슈군을 단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조슈와 사쓰마가 장악한 조정에서 왕정복고 대호령을 내려 막부의 권력과 토지를 몰수 하고
에도(도쿄)에 500명의 낭인 을 풀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해서 도발을 유도 하니....
막부는 교토로 출병 을 개시하는데, 신센구미와 아이즈번 및 구와나번이 교토로 진격 합니다.
1868년 1월 3일 막부 세력과 신정부 세력간의 보신전쟁 (戊辰戦争 무진전쟁) 의 시작을
알리는 도바 후시미의 전투 가 벌어지는데..... 막부군이 15,000명 인데 비해
조슈번, 사쓰마번, 도사번 및 히젠번 신정부군은 5,000명으로 병력은 3:1 로 열세 였습니다.
하지만 막부군이 구식 전장총인 게벨총 이 주류를 이룬데 비해 신정부군 은 나가사키의 영국
무기상 글로버 에게 구입한 신식 후장총 미니에총 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또
암스트롱 곡사포와 기관총 개틀링포 를 보유해 월등한 화력 으로 신정부군이 전투를 압도합니다.
1868년 1월 4일 정세를 관망하던 조정은 신정부군이 우세해 지자..... 니시키노미하타
(錦の御旗 금기) 를 하사하니 조슈군은 관군 이 되고 막부군은 역적 이 되었으니
사쓰마번 오쿠보 와 조슈번 야지로 가 조정의 중신 이와쿠라 도모미 에게 받은 것이지요!
신정부군 이 錦旗(금기, 천황기) 를 만들어 달라고 조정에 부탁해서는 요도강변에 걸리자.....
졸지에 반란군 신세가 된 에도 도쿠가와 막부군은 사기가 떨어져 탈주자 가 속출합니다!
이에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의욕을 잃고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로 돌아가 근신 합니다.
그러자 신정부군 은 타루히토 친왕을 총독으로 한 동정군을 편성 하고 도카이군(東海道軍)·
토산도군(東山道軍)· 호쿠리군(北陸道軍) 세 방향 에도를 향해 진군하는데.....
관군을 상징하는 니시키노미하타 기 를 앞세우고 3월 15일 에도성(도쿄) 총공격을 계획합니다.
이무렵 막부 해군사령관 인 개화파 가쓰 가이슈 가 신정부군을 찾아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 을 짓고는..... 평화적으로 에도성(도쿄성)을 넘겨 주기로 합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미토번으로 돌아가 은거 하며, 저항하지 않는 막부세력에 대해
용서를 받아주니 무기는 신정부군에 넘기고 에도성(도쿄성) 을 내어 줍니다. 쇼군인
요시노부가 다이묘를 해 보지 않아.... 영지를 사수하려는 결심이 약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 같았으면 영지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 했을 것이나 평화기 귀공자로 다이묘
경험이 없었던 요시노부가 쉽게 포기한 것인데, 신정부군 총수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가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266년을 이어 내려온 도쿠가와 막부 는 막을 내립니다.
물론 막부의 모든 무사들이 순순히 항복한 것은 아니고 에도에서도 우에노에서 2천명이 모여
항전하다가 몰살 됐으며... 교토 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카타모리 는 아이즈번 으로
돌아가 신정부군에 반기 를 드니 동북 31개 번 이 奧羽列藩同盟 (오우열번동맹) 을 맺습니다.
나가오카번과 아이즈번 그리고 북해도의 하코다테 에 이르기 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신정부군이 승리 해서는.... "메이지 유신" 을 이루게 됩니다.
그로 부터 2년후인 1871년 9월 이와쿠라 도모미 와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와 이토 히로부미 등 48명의 미국과 유럽 사절단 이 요코하마를 떠납니다.
이토 히로부미 가 기획한 48명 사절단은 태평양을 건너고 미국을 횡단하며 배운후 다시 대서양을
건너고 유럽을 배운후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지구를 한바퀴 돌아 2년만에 귀국 했는데,
구미제국과 맺은 불평등협정을 재협상 하고 교육, 과학, 기술, 군사, 경제 등 근대화 를 배웁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해 구미 사절단을 따라간 유학생 60명 은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도 5년간
현지에서 신문명 을 배워 귀국해 "일본 근대화의 초석" 이 되었습니다. 이후 서구문명 의 일본
도입은 유학생들이 철도, 전기, 총포, 군함, 전신, 무역, 병원, 보험,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것이라!
그런데 사절단이 귀국한 1873년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무라이들 이 근대화 개혁으로 무사신분을 잃고
실업자가 되는 토사구팽 이 되자, 달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을 주장하니 오쿠보
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와 싸울 군비를 갖추지 못했다며 반대하고 대신에
1874년 대만을 침공 하자 다카모리는 사직하고 사쓰마로 돌아가 1877년 서남전쟁 반란 을 일으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 가 대만침공 수습차 북경을 방문했을때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 는 일본이 서양 세력권
인 중국과 동남아 로 진출할까 염려해서 "일본이 대만이 아니라 한국으로 진출하면 열강의 지원 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던 영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도록 이용할 참이니 이후 두나라는 영일동맹을 맺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합니다.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1868년 무진전쟁 신정부군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 반란 을 일으킨게
흥미로운데..... 수십년 목숨을 바쳐 성사시킨 일등공신인 사무라이들은 서양을 따라 잡으려는 근대화로
인해 토사구팽 을 당하니, 번이 없어지면서 실직하니 연봉(봉급) 이 없어졌고 칼을 차는 특권까지 뺏겼으니
반란 일보 직전이었으니....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런 사무라이들을 달래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만약에 서양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 일본이 침략당해 속국 이 될수 있다는 두려움
이니.... 몽골은 기마민족이라 수군이 없으니 일본을 침략할수 없지만, 고려를 속국으로 삼은
이후 고려인들에게 말을 기르게 하고 900척 배를 만들게 해서는 고려인 선원들이 저 배를
조종해 일본을 2차례 침략 했는데, 게다가 동원된 고려군은 몽골군을 위해 화살받이 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나 영국은 식민지인을 침략에 앞장세우니... 영국은 인도를 침략할때 인도인들을 모병해 이웃 인도
국가들을 야금야금 잠식했고, 1차대전때 오스만투르크를 치러 이라크에 상륙한 인도군이 50만 이고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했을때 항복한 영국군중 인도인 병사가 8만명 이니 조선인이 침략에 동원될수도...
실제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후 2차대전에 일본군 군복을 입은 조선인의 수는 10만명 이 넘습니다?
2004년 개봉한 '라스트 사무라이' 는 둘이 격돌한 세이난(西南) 전쟁을 배경 으로 한 영화다"
"내용은 단순하니 정부군의 훈련 교관이었던 미군 중위(톰 크루즈) 가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사무라이 문화에 빠진 끝에 아예 사무라이 갑옷 을 걸치고
반란군의 선봉 에 선다는 얘기인 데...... 평가는 극단이니, 최고의 전쟁영화 라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일본 귀족 문화에 반한 미국 '쌍놈' 이야기 라는 악평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영상은 아름다우니..... 총과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을 향해 말을 타고 돌진하는
반란군의 장려한 낙일(落日) 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 엔딩 처럼
애잔한데!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게 정부군의 절도 있는 행군 모습 이니"
"메이지 유신 전 까지 일본인들은 현대인 처럼 걷지 않았으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시대물을 보면 사람들이 발로 땅을 스치듯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옵니다.
소위 '난바' 라고 하는 이 걸음걸이는 진흙탕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동작이 일상화한 것"
"오른발이 나갈때 오른쪽 상반신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나갈때는 왼쪽 상반신이 나가는
식인데.... 이 걸음걸이로는 군대의 행진이 절대 불가능 하니 새로운 걸음걸이 를 만드는
것이 메이지 정부의 절실한 과제였는데 여기에 답을 준 게 1871년의 이와쿠라 시찰단 입니다"
"새 정부를 세웠지만 메이지 정부에 구체적인 국가 발전 계획 같은 건 없었으니, 그래서 세계
최고만을 보고 오겠다는 신념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저 시찰단 을 꾸렸고..... 22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국 을 돌며 서구 문명의 정수를 체험합니다. 시찰 결과로 얻은게
두 가지이니 하나는 최대 위협 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해서 중국과 청일전쟁해서 얻은 조선을 러시아가 가로채자 다시 러일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