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아리랑 필사본(1941년).
광복군가집(1946년).
아리랑을 누가 언제부터 불렀는지 학자들 간에도 학설이 분분하다. 밀양아리랑도 마찬가지로 누가 언제부터 불렀는지 확실치 않다. 평생 아리랑을 연구해 온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는 ‘아리랑, 그 맛, 멋 그리고…’(집문당·1988)란 책에서 가사상으로 볼 때 조선 명종 때가 배경인 아랑설화를 들며 밀양아리랑의 최고(最古) 연대는 조선 중기까지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은 단지 가사상의 소재이지 가락의 상한선, 즉 생성 시기를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며 “밀양아리랑은 유희성이 강하고, 신민요가 다수 나왔을 때, 즉 조선 후기 일제시대에 당시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아리랑’ 후렴에다 장구 등의 악기에 알맞은 신곡 정도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며 그 생성 시기를 1920년 전후로 보았다.
김 상임이사는 다른 논문에서 “1926년 9월 26일자 매일신보 광고란에 ‘밀양아리랑타령(密陽卵卵打令)’이 확인되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밀양아리랑의 첫 기록으로 형성 시기를 알려준다”고 밝혔다.
밀양아리랑을 연구한 다른 학자들의 의견도 대체로 이와 일치한다. 밀양아리랑을 국문학 측면에서 연구한 김기현의 논문 ‘밀양아리랑의 형성과정과 구조’(문학과 언어연구회, 1991)를 비롯해 음악학적 연구인 서정매의 ‘선율과 음정으로 살펴 본 밀양아리랑’(한국민요학회, 2007), 곽동현의 ‘밀양아리랑의 유형과 시대적 변천연구’(한국예술종합대학교, 2012) 등에서는 밀양아리랑의 생성 시기를 모두 1920년 이후로 보고 있다.
지난 2011년 제1회 밀양아리랑 학술강연회에 강연자로 나섰던 김 상임이사의 ‘밀양아리랑, 그 역사와 변용’(밀양청년회의소, 2011)이란 주제 발표와 밀양아리랑을 주제로 많은 논문과 기고문을 쓴 서정매 부산대 강사의 ‘밀양아리랑의 변용과 전승에 관한 연구’(한국민속학회, 2012)란 논문 등에 따르면, 밀양아리랑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꿔 계속 출현했다. 이들이 발표된 발제문과 논문에서 밝힌 밀양아리랑의 시대별 변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밀양아리랑은 일제강점기에 음반으로 제작돼 널리 퍼졌다. 당시 일축, 빅터, 콜롬비아, 오케 음반 등에서 녹음한 창자는 거의가 기생 출신의 예인들이었다. 당시 ‘권번’(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부르는 이름)에 속한 기생은 모두 소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프로 소리꾼이었다.
1926년 ‘일축조선소리판’의 김금화는 대구 출신의 한성권번 기생으로 일제강점기의 대중 스타였으며, ‘콜롬비아레코드’의 김인숙은 평양 출신 기생이며, 박월정은 서도 사리원 출신의 기생으로 경서도소리뿐 아니라 남도판소리까지 섭렵한 명창이었다. ‘오케음반사’의 박부용 또한 창원 출신의 한성권번 기생이었다.
일제강점기 방송과 음반으로 확산된 밀양아리랑은 토박이가 부른 것이 아니라 서도, 평양, 서울지역에서 활동한 기생이자 전문소리꾼이었으며, 이들의 노래는 대부분 메나리조(경상·강원·함경·충청도 지방 등의 민요와 무가(巫歌)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선율 형태)의 변형이었다.
밀양아리랑의 가락은 1930년대 중국 및 노령(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독립군아리랑’으로 불렸고, 1941년에는 임시정부 광복군들의 군가인 광복군아리랑으로 사용됐다. 밀양아리랑이 군가로 채택된 이유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통속민요로서 누구나 곡조를 알고 있어 새로 가사만 익히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일본총독부가 친일 또는 관제(官製) 아리랑인 ‘滿洲아리랑’(1935년), ‘非常時아리랑’(1941년), ‘愛國아리랑’(1942년)과 친일적 악극 ‘아리랑’을 유포해 황민화에 도모할 시기에 중국에서는 한형석 작 가극 ‘아리랑’과 ‘광복군아리랑’이 대항하고 있어 우리 민족의 긍지를 살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독립군 아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이조와 말년에 왜난리나서 이천만 동포 등 살길이 없네
2.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일제놈 쳐부셔 조국을 찾자
3.내고향 산천아 너 잘있거나 이 내몸 독립군 따라가노라
4.부모님 처자를 리별하고 왜놈을 짓부셔 승리한 후에
5.태극기 휘날려 만세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독립군 아리랑 불러나보세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해방 이후에도 밀양 아리랑은 가사를 바꿔 쉽게 부를 수 있어 파급력이 대단했다. 이런 장점 때문에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중공군까지도 밀양아리랑을 ‘빨치산아리랑’이라 이름 붙여 빨치산 유격대의 군가로 사용했다. 1953년 중공군 발행 군가집인 ‘朝鮮之歌’에 ‘파르티잔아리랑’의 악보가 수록돼 있으며, 유격대소창용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밀양아리랑은 일명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대표적인 곡이 되었으며, 80년대 후반 노동자들의 투쟁가요인 노동가(勞動歌)로서 기능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밀양아리랑의 곡조에 민주노조의 결성과 노동자의 단결 등의 내용을 담은 ‘신밀양아리랑’을 불렀으며, 이 같은 민주화 열기는 곧이어 통일의 열기로 나아가 ‘통일아리랑’으로 개사해 부르게 됐다. 이 역시 가사 전달이 쉬워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장점 때문이며, 일제강점기에 군가로 불리게 된 이유와 같다. 신밀양아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후렴)
1.이불이들썩 천장이들썩 지붕이들썩 혼자자다 둘이자니 동네가들썩
2.공장이들썩 공단이들썩 인천이들썩 우리노동자 단결하니 전국이들썩
3.과장이벌렁 상무가벌렁 사장이벌렁 민주노조 결성되니 회장이벌렁
4.학생도단결 농민도단결 시민도함께 우리노동자앞장서니 온나라가불끈
밀양에서의 밀양아리랑
유감스럽게도 밀양아리랑은 1980년대부터 이미 지역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1983년 간행된 ‘密陽志’는 당시 밀양지역에서는 밀양아리랑이 많이 불리지 않았고, 다만 중장년층의 경우에는 경쾌한 밀양아리랑을 자주 부르지만 노년층의 경우에는 본조아리랑을 주로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3년 ‘감내게줄당기기’가 경남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면서 미약하게나마 밀양아리랑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감내게줄당기기는 앞놀이, 게줄당기기, 뒷놀이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으며, 앞놀이 부분에 흥를 돋우기 위해 지게 목발로 ‘아리 당다꿍 쓰리 당다꿍’하며 장단을 맞추며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대목이 있다.
2009년 밀양아리랑의 또 다른 변용된 모습이 밀양연극촌 연희단거리패에 의해 ‘약산아리랑’이란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이윤택 예술감독은 항일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도시 밀양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밀양 출신의 독립투사인 약산 김원봉(1898~1958) 장군과 만주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한 밀양 출신 독립 열사와 아나키스트들의 질풍노도 같은 삶의 여정을 악극 형식으로 극화한 ‘약산아리랑’을 제작, 그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초연했다.
약산아리랑은 이어 2012년 5월 제55회 밀양아리랑 대축제 때 특별 축하공연으로 무대에 올라 다시 큰 호응을 얻었고, 같은 해 8월 제24회 거창 국제연극제에도 초청돼 전 공연이 매진되는 등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약산아리랑은 현대에 와서 창작한 내용이지만 그 내용은 일제시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 광복군이 부른 ‘광복군아리랑’과 맥을 같이한다. 약산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의 가장 최근의 변용이면서 동시에 다른 아리랑과 달리 ‘광복군아리랑’으로서 불렸다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11년 밀양시가 밀양아리랑 전승·보존·발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밀양 시티투어 프로그램에 ‘밀양아리랑 배우기’가 처음 시도됐고, 2011년 12월 27일 남산국악당에서 개최된 ‘전국아리랑 한마당’에서 밀양아리랑의 공식적인 공연이 최초로 이뤄졌다.
밀양아리랑 단독음반은 2011년에 이르러서야 신나라레코드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이 음반에는 토박이가 부른 밀양아리랑을 비롯해 독립군아리랑, 광복군아리랑, 빨치산아리랑, 신밀양아리랑, 통일아리랑 등이 모두 수록돼 있다.
이 음반에 소개된 밀양토박이 고(故) 김수야 옹의 밀양아리랑은 다음과 같다. 후렴구에 나오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은 남자들이 나무하러 가면서 지게 작대기로 두드리는 소리로 일명 ‘지게목발소리’라고 하며 ‘감내게줄당기기’(1983)의 앞놀이에도 나온다.
(후렴) 아리당다쿵 쓰리당다쿵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잘넘어간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조꼼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조꼼보소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못해 행주처마 입에물고 입만빵긋
옥양목 겹저고리 연분홍치마 죽어도죽어도 못놓겠네
담넘어 갈때는 큰맘을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떤다
물명주 당속곳은 널러야 좋아 옥당목 ..................
3。 밀양아리랑과 전국의 아리랑
2。 시대별로 본 밀양아리랑
1。 밀양아리랑의 현주소 |